‘가리봉동’ 주민들이 영화에 반대하고 나선 까닭

입력 2017.08.1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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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개봉한 영화 <황해>에서 살인청부업자의 제안을 받은 조선족 구남(하정우分)은 중국 연변에서 한국으로 향한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연락이 끊긴 부인이 일하던 식당. 식당 사장은 부인이 이미 떠났다며 구남에게 말한다.

사장 "가리봉동으로 간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구남 "어디메?"
사장 "서울 가리봉동."

그리고 사장은 이렇게 덧붙인다.

"괜히 사고치지 말고. 조선족들 여기와서 사고쳤다가 바로 추방당해. 조용히 참고 돈이나 벌어가."

이윽고 구남이 찾은 곳은 가리봉 시장. 사람들이 빼곡한 어두운 골목엔 한문 간자체로 된 간판들이 번쩍거린다. 골목 한쪽에선 사내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구남이 하룻밤 묵는 허름한 여관은 비좁은 데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다.

지난 2007년 가리봉동에서 활동하던 ‘연변 흑사파’가 무더기로 경찰에 검거됐다.지난 2007년 가리봉동에서 활동하던 ‘연변 흑사파’가 무더기로 경찰에 검거됐다.

<범죄도시-가리봉동 잔혹사> 크랭크인…주민들 '결사반대'

실제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주민 만 9천여 명 가운데 중국교포 비율은 40%. '조선족이 등장하는 영화'하면 가리봉동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느와르 영화 <신세계(2012)>도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틀리다. <신세계> 제작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가리봉동에서 촬영한 장면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지난 2월,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영화가 크랭크인했다. 강윤성 감독이 연출하는 <범죄도시-가리봉동 잔혹사>로, 10년 전의 '연변 흑사파'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연변 흑사파'는 연변 출신의 폭력배들이 2005년 경 결성한 조직으로, 가리봉동 일대 차이나타운을 거점으로 활동하다 2007년 4월에 32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검거됐다.

영화 촬영은 곧장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제작사 측은 관할인 서울 구로경찰서에 '촬영시 교통 정리 협조'를 부탁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영화의 주제가 동네 이미지를 왜곡한다"는 주민들 반대에 거절했다. 영화 가제에 붙었던 '가리봉동'이라는 지명도 빠졌다. 가리봉동 주민자치회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영화는 8월 현재까지 가리봉동에서 한 번도 촬영을 하지 못했다.

<외딴방>에서 <가리베가스>까지…주민들 "이젠 '갈등'보단 '공존'에 관심 가져주길"

영화 촬영으로 홍역을 앓고 있는 가리봉동은, 이미 1980년대부터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의 모습을 투영하는 문학 작품의 단골 배경이었다.

박노해 <가리봉 시장>(1984), 양귀자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1995), 신경숙 <외딴방>(1996), 고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1999)…. 구로공단 노동자에서 '코리안드림'을 안고 온 조선족들까지, 가리봉동은 우리 사회를 다룬 작품들의 주요 소재가 돼 왔다.


하지만 가리봉동 주민들은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 '저소득층, 가난, 범죄'라는 이미지를 이제는 떨치고 싶다고 말한다. 한 주민은 "중국 동포들도 이곳에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갈등보다는 다문화 가족과 더불어 사는 주민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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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리봉동’ 주민들이 영화에 반대하고 나선 까닭
    • 입력 2017-08-10 16:27:30
    취재K
2010년 개봉한 영화 <황해>에서 살인청부업자의 제안을 받은 조선족 구남(하정우分)은 중국 연변에서 한국으로 향한다.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연락이 끊긴 부인이 일하던 식당. 식당 사장은 부인이 이미 떠났다며 구남에게 말한다.

사장 "가리봉동으로 간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구남 "어디메?"
사장 "서울 가리봉동."

그리고 사장은 이렇게 덧붙인다.

"괜히 사고치지 말고. 조선족들 여기와서 사고쳤다가 바로 추방당해. 조용히 참고 돈이나 벌어가."

이윽고 구남이 찾은 곳은 가리봉 시장. 사람들이 빼곡한 어두운 골목엔 한문 간자체로 된 간판들이 번쩍거린다. 골목 한쪽에선 사내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구남이 하룻밤 묵는 허름한 여관은 비좁은 데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다.

지난 2007년 가리봉동에서 활동하던 ‘연변 흑사파’가 무더기로 경찰에 검거됐다.
<범죄도시-가리봉동 잔혹사> 크랭크인…주민들 '결사반대'

실제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주민 만 9천여 명 가운데 중국교포 비율은 40%. '조선족이 등장하는 영화'하면 가리봉동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느와르 영화 <신세계(2012)>도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틀리다. <신세계> 제작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가리봉동에서 촬영한 장면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지난 2월,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한 또 하나의 영화가 크랭크인했다. 강윤성 감독이 연출하는 <범죄도시-가리봉동 잔혹사>로, 10년 전의 '연변 흑사파'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연변 흑사파'는 연변 출신의 폭력배들이 2005년 경 결성한 조직으로, 가리봉동 일대 차이나타운을 거점으로 활동하다 2007년 4월에 32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검거됐다.

영화 촬영은 곧장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제작사 측은 관할인 서울 구로경찰서에 '촬영시 교통 정리 협조'를 부탁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영화의 주제가 동네 이미지를 왜곡한다"는 주민들 반대에 거절했다. 영화 가제에 붙었던 '가리봉동'이라는 지명도 빠졌다. 가리봉동 주민자치회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영화는 8월 현재까지 가리봉동에서 한 번도 촬영을 하지 못했다.

<외딴방>에서 <가리베가스>까지…주민들 "이젠 '갈등'보단 '공존'에 관심 가져주길"

영화 촬영으로 홍역을 앓고 있는 가리봉동은, 이미 1980년대부터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의 모습을 투영하는 문학 작품의 단골 배경이었다.

박노해 <가리봉 시장>(1984), 양귀자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1995), 신경숙 <외딴방>(1996), 고 김선민 감독의 <가리베가스>(1999)…. 구로공단 노동자에서 '코리안드림'을 안고 온 조선족들까지, 가리봉동은 우리 사회를 다룬 작품들의 주요 소재가 돼 왔다.


하지만 가리봉동 주민들은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 '저소득층, 가난, 범죄'라는 이미지를 이제는 떨치고 싶다고 말한다. 한 주민은 "중국 동포들도 이곳에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갈등보다는 다문화 가족과 더불어 사는 주민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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