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聖君)’의 불편한 진실…‘두 얼굴’의 세종?

입력 2017.08.1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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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오랠수록 더욱 공경히 하여,
일호도 속이려는 마음이 없었음은 천지 신명인들 어찌 모르리오.
그러나 혹 일호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을까 심히 두려워 한다"
-세종실록(세종 13년 8월 19일)-


'애민의 군주'로 불리며 조선을 태평성대로 이끈 세종의 업적 뒤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세종은 명나라에 극진한 사대를 했다. 명나라 황제의 요구에 조선의 백성들을 공녀와 화자(火者, 여덟 살부터 열두서너 살까지의 환관 후보자)로 바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만 마리의 말을 보내기까지 이른다. 그가 이토록 지극정성으로 명에 사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성 사대'는 피할 수 없는 선택?

15세기 세종이 재위한 당시 명나라에는 황제 영락제가 있었다. 영락제는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일으키며 영토를 확장했고, 그의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15세기 명나라는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신생 왕조였던 조선의 국왕 세종은 영락제의 위세를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위협을 느낀 조선은 명과의 전쟁 대신 사대를 외교의 방편으로 선택해, 명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세종이 사대로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사대의 역습? 4군 6진 개척

1432년 여진족이 평안도 여연군의 조선인 마을을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세종은 여진족 토벌을 명령한다. 이듬해 노장 최윤덕은 1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중국 랴오닝성 환런헌의 파저강 유역에 사는 여진족을 정벌한다. 아군 사상자가 단 4명에 불과한 조선의 압승이었다.


파저강 전투를 시작으로 조선은 4군 6진의 북방 영토를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립한다. 북쪽으로 올라오는 조선군의 칼끝은 명을 향해 있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명나라는 세종의 북방 개척을 용인한다. 세종이 지성 사대를 하며 쌓아온 신뢰 덕분이었다. 훈민정음, 역법,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자주(自主) 정책을 펼친 세종은 조선의 자주적 문화 부흥기를 이끈다. '자주'를 위해 '사대'를 선택한 세종의 역습이었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이 명에 사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는 13일(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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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군(聖君)’의 불편한 진실…‘두 얼굴’의 세종?
    • 입력 2017-08-13 08: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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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오랠수록 더욱 공경히 하여,
일호도 속이려는 마음이 없었음은 천지 신명인들 어찌 모르리오.
그러나 혹 일호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을까 심히 두려워 한다"
-세종실록(세종 13년 8월 19일)-


'애민의 군주'로 불리며 조선을 태평성대로 이끈 세종의 업적 뒤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세종은 명나라에 극진한 사대를 했다. 명나라 황제의 요구에 조선의 백성들을 공녀와 화자(火者, 여덟 살부터 열두서너 살까지의 환관 후보자)로 바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만 마리의 말을 보내기까지 이른다. 그가 이토록 지극정성으로 명에 사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성 사대'는 피할 수 없는 선택?

15세기 세종이 재위한 당시 명나라에는 황제 영락제가 있었다. 영락제는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일으키며 영토를 확장했고, 그의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15세기 명나라는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신생 왕조였던 조선의 국왕 세종은 영락제의 위세를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위협을 느낀 조선은 명과의 전쟁 대신 사대를 외교의 방편으로 선택해, 명을 상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세종이 사대로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사대의 역습? 4군 6진 개척

1432년 여진족이 평안도 여연군의 조선인 마을을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세종은 여진족 토벌을 명령한다. 이듬해 노장 최윤덕은 1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중국 랴오닝성 환런헌의 파저강 유역에 사는 여진족을 정벌한다. 아군 사상자가 단 4명에 불과한 조선의 압승이었다.


파저강 전투를 시작으로 조선은 4군 6진의 북방 영토를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립한다. 북쪽으로 올라오는 조선군의 칼끝은 명을 향해 있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명나라는 세종의 북방 개척을 용인한다. 세종이 지성 사대를 하며 쌓아온 신뢰 덕분이었다. 훈민정음, 역법,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자주(自主) 정책을 펼친 세종은 조선의 자주적 문화 부흥기를 이끈다. '자주'를 위해 '사대'를 선택한 세종의 역습이었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이 명에 사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는 13일(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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