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징용 희생 …70년 만에 인정
입력 2017.08.15 (23:34)
수정 2017.08.16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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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태평양 전쟁 말기 수 많은 한국 징용자들이 오키나와 등지에서 강제 노동에 내몰리다 희생됐지만 일본은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왔는데요.
극히 일부지만 15명의 희생자가 70여 년 만에 죽음을 인정받아 올해 오키나와 평화 공원 비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키나와 현지에서 이승철 특파원이 전해왔습니다.
<리포트>
토모리 씨는 전쟁 당시 항구에서 일하던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토모리(오키나와 주민) : "로프 다발로 조선 사람을 때리고 있었어요. 이건 정말 일본군은 괴물 같구나 생각하게 됐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강제 노역 생활. 허기져 구걸까지 하던 모습이 노래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녹취> "할머니 감자 있으면 하나 주세요."
토모리씨가 목격했던 '조선 징용부대'의 명부입니다.
102중대 약 700명의 이름 아래 행방불명을 뜻하는 아니 불(不)자가 대부분 찍혀 있습니다.
<녹취> "어떻게 됐는지 가족에게 연락이 전혀 없었던 듯 합니다."
오키나와 평화공원 위령비에는 24만 여 명에 달하는 오키나와전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한국인이 소수에 불과했던 건 죽음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0여 년 만인 올해에야 징용부대 소속이었던 '권운선' 씨 등 15명이 희생자로 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터뷰> 권수청(故 권운선 씨 아들) : "거기서 돌아가셨으니 이름 석자라도... 가봐야죠."
오키나와에서 숨져간 사람들의 이름 이름은 전쟁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산 교훈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만 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수 많은 한국 징용자들이 오키나와 등지에서 강제 노동에 내몰리다 희생됐지만 일본은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왔는데요.
극히 일부지만 15명의 희생자가 70여 년 만에 죽음을 인정받아 올해 오키나와 평화 공원 비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키나와 현지에서 이승철 특파원이 전해왔습니다.
<리포트>
토모리 씨는 전쟁 당시 항구에서 일하던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토모리(오키나와 주민) : "로프 다발로 조선 사람을 때리고 있었어요. 이건 정말 일본군은 괴물 같구나 생각하게 됐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강제 노역 생활. 허기져 구걸까지 하던 모습이 노래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녹취> "할머니 감자 있으면 하나 주세요."
토모리씨가 목격했던 '조선 징용부대'의 명부입니다.
102중대 약 700명의 이름 아래 행방불명을 뜻하는 아니 불(不)자가 대부분 찍혀 있습니다.
<녹취> "어떻게 됐는지 가족에게 연락이 전혀 없었던 듯 합니다."
오키나와 평화공원 위령비에는 24만 여 명에 달하는 오키나와전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한국인이 소수에 불과했던 건 죽음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0여 년 만인 올해에야 징용부대 소속이었던 '권운선' 씨 등 15명이 희생자로 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터뷰> 권수청(故 권운선 씨 아들) : "거기서 돌아가셨으니 이름 석자라도... 가봐야죠."
오키나와에서 숨져간 사람들의 이름 이름은 전쟁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산 교훈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만 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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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7-08-15 23:36:07
- 수정2017-08-16 00:16:40
<앵커 멘트>
태평양 전쟁 말기 수 많은 한국 징용자들이 오키나와 등지에서 강제 노동에 내몰리다 희생됐지만 일본은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왔는데요.
극히 일부지만 15명의 희생자가 70여 년 만에 죽음을 인정받아 올해 오키나와 평화 공원 비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키나와 현지에서 이승철 특파원이 전해왔습니다.
<리포트>
토모리 씨는 전쟁 당시 항구에서 일하던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토모리(오키나와 주민) : "로프 다발로 조선 사람을 때리고 있었어요. 이건 정말 일본군은 괴물 같구나 생각하게 됐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강제 노역 생활. 허기져 구걸까지 하던 모습이 노래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녹취> "할머니 감자 있으면 하나 주세요."
토모리씨가 목격했던 '조선 징용부대'의 명부입니다.
102중대 약 700명의 이름 아래 행방불명을 뜻하는 아니 불(不)자가 대부분 찍혀 있습니다.
<녹취> "어떻게 됐는지 가족에게 연락이 전혀 없었던 듯 합니다."
오키나와 평화공원 위령비에는 24만 여 명에 달하는 오키나와전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한국인이 소수에 불과했던 건 죽음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0여 년 만인 올해에야 징용부대 소속이었던 '권운선' 씨 등 15명이 희생자로 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터뷰> 권수청(故 권운선 씨 아들) : "거기서 돌아가셨으니 이름 석자라도... 가봐야죠."
오키나와에서 숨져간 사람들의 이름 이름은 전쟁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산 교훈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만 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수 많은 한국 징용자들이 오키나와 등지에서 강제 노동에 내몰리다 희생됐지만 일본은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왔는데요.
극히 일부지만 15명의 희생자가 70여 년 만에 죽음을 인정받아 올해 오키나와 평화 공원 비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키나와 현지에서 이승철 특파원이 전해왔습니다.
<리포트>
토모리 씨는 전쟁 당시 항구에서 일하던 조선 사람들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토모리(오키나와 주민) : "로프 다발로 조선 사람을 때리고 있었어요. 이건 정말 일본군은 괴물 같구나 생각하게 됐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강제 노역 생활. 허기져 구걸까지 하던 모습이 노래로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녹취> "할머니 감자 있으면 하나 주세요."
토모리씨가 목격했던 '조선 징용부대'의 명부입니다.
102중대 약 700명의 이름 아래 행방불명을 뜻하는 아니 불(不)자가 대부분 찍혀 있습니다.
<녹취> "어떻게 됐는지 가족에게 연락이 전혀 없었던 듯 합니다."
오키나와 평화공원 위령비에는 24만 여 명에 달하는 오키나와전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한국인이 소수에 불과했던 건 죽음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70여 년 만인 올해에야 징용부대 소속이었던 '권운선' 씨 등 15명이 희생자로 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터뷰> 권수청(故 권운선 씨 아들) : "거기서 돌아가셨으니 이름 석자라도... 가봐야죠."
오키나와에서 숨져간 사람들의 이름 이름은 전쟁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산 교훈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만 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키나와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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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기자 neos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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