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朴 전 대통령 정치 입문시켜…국정운영 보며 실망”

입력 2017.08.22 (16:00) 수정 2017.08.22 (16:0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2일(오늘) 출간된 회고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정계에 입문시켰던 인연과,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등을 밝혔다.

회고록에 따르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7년 12월 2일이다. 박 전 대통령이 이 전 총재에게 요청해 비공개로 만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우리나라가 경제난국에 처한 것을 보고 아버님 생각에 목이 멜 때가 있다"며 "이럴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게 국가와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이 전 총재는 전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좋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흔쾌히 응낙했다"며 "그를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나"라고 기술했다.

이 전 총재는 당시 박 전 대통령 첫인상에 대해 "차분하고 침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부모님이 모두 비명에 가신 참담한 일을 겪었는데도 어두운 이미지는 전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맡아 천막당사로 옮겨 당의 재기를 이루는 것을 보고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에는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02년 당시 박 전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을 고맙게 기억해서 2012년 대선 때 그가 나를 찾아와 지지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응낙했다"며 "소통과 화합의 정치를 한다면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지원유세도 자발적으로 열심히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대통령이 된 후 국정운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기대도 접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터지고 탄핵 사태까지 진전되는 상황을 보며 그의 실질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원하는 대로 대통령이 됐지만, 대통령의 일에 대한 정열과 책임감, 판단력은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최순실의 국정농단 게이트 발생 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 했다"고 밝혔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에 대해서는 "소신을 지키고자 한 것이 왜 배신자인가"라고 반문했고,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집단 의사표출이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일상화되거나 정치수단으로 활용되면 헌법적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게 된다"는 우려를 표했다.

이 전 총재는 회고록에서 박 전 대통령뿐 아니라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이들에 대한 개인적 평가도 가감 없이 밝혔다.

특히 1993년 대법관으로 있던 자신에게 감사원장직을 제의, 결과적으로 정치권으로 입문케 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뒷이야기를 술회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이 전 총재는 "나는 그날 그의 말을 듣고 허풍이 아니라 기성 정치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의 풍모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략) 그는 동물 같은 정치적 후각을 가졌으면서도 약간의 이상주의자적 면모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었다"며 YS에 대한 첫인상을 설명했다.

이 전 총재는 훗날 정치인으로서 살게 된 것이 바로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에 오른 데서부터 비롯됐다며 '운명의 갈림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회고록에서는 1994년 YS와의 갈등 끝에 당시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다뤘고 사퇴 이후 정부·여당이 보인 행동과 YS가 퇴임 후 낸 회고록에서 자신을 '비하'한 데 대해서는 매우 격앙된 목소리도 냈다.

이 전 총재는 "사퇴 이후 청와대와 민자당 측에서는 (중략) 별의별 유치한 인신공격성 발언을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중략) 그때의 비방,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쓰레기 같은 모략 중상이었다"며 "그는 내가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공개적으로 나를 배신자라고 비난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소신 때문에 대립한 것을 배신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대꾸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15대 대선에서 자신에게 1.6%포인트 차 석패를 안긴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DJP 연합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권이 대한민국에 과연 무슨 기여를 했나?"라며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이른바 진보정권·좌파정권이 잘못된 남북관계 설정으로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데 일조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DJP 연합은 야합이지만 선거에 이기는 신묘한 수임은 틀림없고 나는 완벽하게 패한 것"이라면서도 "선거에 이기기 위한 야합이 정권에 부담되거나 족쇄가 되고 국정 수행에 지장을 받았다면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겠냐?"라고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임기를 포기하고 내각제로 개헌할 의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김종필 총재를 속인 셈"이라며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전 총재는 대권 문턱에서 또 한 번 무릎 꿇게 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내가 보기에 그는 정치에 들어온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그 연륜에 알맞은 기반을 잡지 못했다"고 술회하며 "변방으로 돌며 전두환 전 대통령 청문회에서 보듯이 뛰어난 언변과 돌출적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정치를 해온 것으로 보았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때 민감하게 이에 편승해 부상하는 데 능하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당시 나는 '노무현 부상 현상'은 조만간 깨질 바람이라고 보았다"고 회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한 것을 두고는 정치공학적 야합이었다며 "국민의 판단 기준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고 정당주의 원리에서 어긋나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막장극으로 치닫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당시의 충격을 전했다.

이 전 총재는 정몽준 당시 대선후보에 대해서는 "자신은 인식했는지 모르나 한때 후보교체에까지 몰린 노 후보를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시대변화의 상징처럼 떠오르게 한 훌륭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회고록에서는 세 번의 대선 패배에 대한 분석과 반성도 이어졌다.

이 전 총재는 15대 대선 때 이인제 후보의 출마와 DJP 연합이 대형 변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선 패배에는 자신의 탓이 더 크다고 고백했다.

2002년 제16대 대선 패배에 대해서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같은 외적 변화 때문이 아니라 유권자 설득능력 부족, 이미지 변신 실패, 인터넷 매체의 저조한 활용 등을 패배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대통령이라는 국가 지도자의 일에 대한 정열과 판단력,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이를 유권자들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며 "이미지에서도 노무현 후보 측이 내세운 귀족과 서민, 기득세력과 개혁세력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이미지와 연출의 대결에서 완패했고 나의 능력 부족이었다"고 밝혔다.

다만 이 전 총재는 득표율 15.1%로 3위에 머물렀던 17대 대선에 관해서는 지난 두 차례 대선 때와 같은 아쉬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나의 출마로 보수층이 분열돼 정권교체가 무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와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합한 것의 절반이 여권 후보인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보다 아래로 떨어질 때 즉각 사퇴하겠다는 마지노선을 마음속에 정했다"고 당시 기억을 더듬으며 "예상대로 낙선했지만, 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썼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이회창 “朴 전 대통령 정치 입문시켜…국정운영 보며 실망”
    • 입력 2017-08-22 16:00:07
    • 수정2017-08-22 16:02:08
    정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2일(오늘) 출간된 회고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정계에 입문시켰던 인연과,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등을 밝혔다.

회고록에 따르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7년 12월 2일이다. 박 전 대통령이 이 전 총재에게 요청해 비공개로 만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우리나라가 경제난국에 처한 것을 보고 아버님 생각에 목이 멜 때가 있다"며 "이럴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게 국가와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이 전 총재는 전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좋은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흔쾌히 응낙했다"며 "그를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나"라고 기술했다.

이 전 총재는 당시 박 전 대통령 첫인상에 대해 "차분하고 침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부모님이 모두 비명에 가신 참담한 일을 겪었는데도 어두운 이미지는 전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맡아 천막당사로 옮겨 당의 재기를 이루는 것을 보고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에는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02년 당시 박 전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을 고맙게 기억해서 2012년 대선 때 그가 나를 찾아와 지지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응낙했다"며 "소통과 화합의 정치를 한다면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지원유세도 자발적으로 열심히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대통령이 된 후 국정운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기대도 접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터지고 탄핵 사태까지 진전되는 상황을 보며 그의 실질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원하는 대로 대통령이 됐지만, 대통령의 일에 대한 정열과 책임감, 판단력은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최순실의 국정농단 게이트 발생 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 했다"고 밝혔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에 대해서는 "소신을 지키고자 한 것이 왜 배신자인가"라고 반문했고, 촛불집회에 대해서는 "집단 의사표출이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일상화되거나 정치수단으로 활용되면 헌법적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게 된다"는 우려를 표했다.

이 전 총재는 회고록에서 박 전 대통령뿐 아니라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이들에 대한 개인적 평가도 가감 없이 밝혔다.

특히 1993년 대법관으로 있던 자신에게 감사원장직을 제의, 결과적으로 정치권으로 입문케 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뒷이야기를 술회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이 전 총재는 "나는 그날 그의 말을 듣고 허풍이 아니라 기성 정치인에게서는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의 풍모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략) 그는 동물 같은 정치적 후각을 가졌으면서도 약간의 이상주의자적 면모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었다"며 YS에 대한 첫인상을 설명했다.

이 전 총재는 훗날 정치인으로서 살게 된 것이 바로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에 오른 데서부터 비롯됐다며 '운명의 갈림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회고록에서는 1994년 YS와의 갈등 끝에 당시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다뤘고 사퇴 이후 정부·여당이 보인 행동과 YS가 퇴임 후 낸 회고록에서 자신을 '비하'한 데 대해서는 매우 격앙된 목소리도 냈다.

이 전 총재는 "사퇴 이후 청와대와 민자당 측에서는 (중략) 별의별 유치한 인신공격성 발언을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중략) 그때의 비방,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쓰레기 같은 모략 중상이었다"며 "그는 내가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공개적으로 나를 배신자라고 비난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소신 때문에 대립한 것을 배신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대꾸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15대 대선에서 자신에게 1.6%포인트 차 석패를 안긴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DJP 연합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권이 대한민국에 과연 무슨 기여를 했나?"라며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이른바 진보정권·좌파정권이 잘못된 남북관계 설정으로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데 일조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DJP 연합은 야합이지만 선거에 이기는 신묘한 수임은 틀림없고 나는 완벽하게 패한 것"이라면서도 "선거에 이기기 위한 야합이 정권에 부담되거나 족쇄가 되고 국정 수행에 지장을 받았다면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겠냐?"라고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임기를 포기하고 내각제로 개헌할 의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김종필 총재를 속인 셈"이라며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전 총재는 대권 문턱에서 또 한 번 무릎 꿇게 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내가 보기에 그는 정치에 들어온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그 연륜에 알맞은 기반을 잡지 못했다"고 술회하며 "변방으로 돌며 전두환 전 대통령 청문회에서 보듯이 뛰어난 언변과 돌출적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정치를 해온 것으로 보았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때 민감하게 이에 편승해 부상하는 데 능하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당시 나는 '노무현 부상 현상'은 조만간 깨질 바람이라고 보았다"고 회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한 것을 두고는 정치공학적 야합이었다며 "국민의 판단 기준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고 정당주의 원리에서 어긋나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막장극으로 치닫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당시의 충격을 전했다.

이 전 총재는 정몽준 당시 대선후보에 대해서는 "자신은 인식했는지 모르나 한때 후보교체에까지 몰린 노 후보를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시대변화의 상징처럼 떠오르게 한 훌륭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회고록에서는 세 번의 대선 패배에 대한 분석과 반성도 이어졌다.

이 전 총재는 15대 대선 때 이인제 후보의 출마와 DJP 연합이 대형 변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선 패배에는 자신의 탓이 더 크다고 고백했다.

2002년 제16대 대선 패배에 대해서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같은 외적 변화 때문이 아니라 유권자 설득능력 부족, 이미지 변신 실패, 인터넷 매체의 저조한 활용 등을 패배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대통령이라는 국가 지도자의 일에 대한 정열과 판단력,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이를 유권자들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며 "이미지에서도 노무현 후보 측이 내세운 귀족과 서민, 기득세력과 개혁세력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이미지와 연출의 대결에서 완패했고 나의 능력 부족이었다"고 밝혔다.

다만 이 전 총재는 득표율 15.1%로 3위에 머물렀던 17대 대선에 관해서는 지난 두 차례 대선 때와 같은 아쉬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이 전 총재는 "나의 출마로 보수층이 분열돼 정권교체가 무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와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합한 것의 절반이 여권 후보인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보다 아래로 떨어질 때 즉각 사퇴하겠다는 마지노선을 마음속에 정했다"고 당시 기억을 더듬으며 "예상대로 낙선했지만, 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썼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