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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주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죠”…그녀들의 생존기
입력 2017.08.23 (08:00) 인터넷 뉴스
“양공주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죠”…그녀들의 생존기
1945년 일본의 2차대전 패전 후, 한국과 일본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터전이 파괴된 두 나라의 미군 부대 주변 상권은 인근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 됐다. 이곳에 먹고 살기 위해 모여든 여성들이 있다. 미군 장교의 집안일을 도왔던 여성부터 부대 인근에서 성매매했던 여성들까지, '달러'로 생존한 할머니들의 전후 생존기다.


미군 상대로 매춘 나선 고아 소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거주하는 85세 할머니 피자 크림션.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하녀로 떠돌던 피자는 자신의 이름도 몰랐다. 혈혈단신으로 한국전쟁을 맞닥뜨렸다. 10만 명이 넘는 피난민 행렬 속에 그녀도 있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매춘으로 내몰린 그녀는 그곳에서 '옥순 리'라고 불렸다. 엉겁결에 떠밀린 거리에서 참전 미군 프랭크를 만났다. 프랭크의 구애에도 일방적으로 이용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다행인 건 프랭크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점이다. 프랭크는 온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피자를 찾아냈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문제는 한국전쟁 기간 미군과 한국 여성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는 점이다. 프랭크는 10개월간 미 의회와 각 부처에 결혼 이민 청원을 넣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52년 아시아 여성의 결혼 이민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피자 크림션은 1954년 미국에 온 116명의 한국인 결혼 이민 여성 중 한 명이었다.


피자는 미국 땅을 밟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더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생존자"라고.

미군 장교 가정부가 된 일본 소녀


가데카루 아케미 할머니(85)는 팔순이 넘어서야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1945년 오키나와에서 벌어졌던 미군과의 지상전 당시 할머니는 12세였다. 공부해야 할 나이였지만 전쟁 통에 상처 입은 아버지와 동생을 낳은 지 얼마 안 된 어머니를 대신해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 시기 여성들이 생계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지 않았다.


가데카루는 나이를 속이고 미군 장교의 가정부로 취업해 6년간 일했다. 다른 10대에 비해 높은 임금을 받았지만, 식구들을 홀로 먹여 살리기엔 부족했다.

그 무렵 가난한 딸들을 사고파는 일이 흔치 않게 벌어졌다. 많은 여성이 미군을 상대하는 매춘 업소로 팔려나갔다. 여성을 물색하던 장사꾼은 가데카루의 아버지에게도 딸을 팔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다행히도 가데카루의 부모는 그녀를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상대 여성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오키나와 농작물의 1년 매출과 맞먹었다고 전해진다.



‘양공주’, ‘양색시’로 불린 소녀들 양공주들의 전후 생존기

대한민국 평택시.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 인근은 기지촌으로 불렸고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가 이뤄졌다. 빈곤 때문에 다른 생존 수단을 찾고 있던 여성들이 기지촌으로 유입됐고 이들은 '양공주', '양색시'로 비난받았다.

포주들은 두려움을 안고 기지촌을 찾은 여성들에게 향정신성 약물인 옥타리돈을 먹였다. 부끄러움을 없애준다는 목적에서였다. 이는 장부에 다 기록돼 빚으로 남았다.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느라 더욱 빚에 허덕여야 했다. 여성들은 '신랑(미군) 잘 만나면 갚고 나가겠지'하는 심정으로 간신히 버텼다.

김숙자 할머니(75)도 이 중 한 명이었다. 떳떳하지 못했던 세월을 지나온 김숙자 할머니와 다른 기지촌 여성들은 항상 그늘 속에 숨어 지냈다.


2012년 움츠렸던 이들이 기지촌에서의 경험을 연극으로 만들고 직접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편견의 시선을 떨쳐내고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6월 25일 122명의 기지촌 여성들은 대한민국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KBS스페셜 '전쟁과 여성 3부-그녀의 꿈(24일(목) 밤 10시, KBS 1TV)'에선 전쟁의 상흔을 딛고 미국에 정착한 1세대 결혼 이민 여성과 미군 기지촌 인근에서 생계를 이어온 한일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 “양공주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죠”…그녀들의 생존기
    • 입력 2017.08.23 (08:00)
    인터넷 뉴스
“양공주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죠”…그녀들의 생존기
1945년 일본의 2차대전 패전 후, 한국과 일본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다. 전쟁으로 터전이 파괴된 두 나라의 미군 부대 주변 상권은 인근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 됐다. 이곳에 먹고 살기 위해 모여든 여성들이 있다. 미군 장교의 집안일을 도왔던 여성부터 부대 인근에서 성매매했던 여성들까지, '달러'로 생존한 할머니들의 전후 생존기다.


미군 상대로 매춘 나선 고아 소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거주하는 85세 할머니 피자 크림션.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하녀로 떠돌던 피자는 자신의 이름도 몰랐다. 혈혈단신으로 한국전쟁을 맞닥뜨렸다. 10만 명이 넘는 피난민 행렬 속에 그녀도 있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매춘으로 내몰린 그녀는 그곳에서 '옥순 리'라고 불렸다. 엉겁결에 떠밀린 거리에서 참전 미군 프랭크를 만났다. 프랭크의 구애에도 일방적으로 이용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다행인 건 프랭크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점이다. 프랭크는 온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피자를 찾아냈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문제는 한국전쟁 기간 미군과 한국 여성의 결혼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는 점이다. 프랭크는 10개월간 미 의회와 각 부처에 결혼 이민 청원을 넣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52년 아시아 여성의 결혼 이민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피자 크림션은 1954년 미국에 온 116명의 한국인 결혼 이민 여성 중 한 명이었다.


피자는 미국 땅을 밟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더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생존자"라고.

미군 장교 가정부가 된 일본 소녀


가데카루 아케미 할머니(85)는 팔순이 넘어서야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1945년 오키나와에서 벌어졌던 미군과의 지상전 당시 할머니는 12세였다. 공부해야 할 나이였지만 전쟁 통에 상처 입은 아버지와 동생을 낳은 지 얼마 안 된 어머니를 대신해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 시기 여성들이 생계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넓지 않았다.


가데카루는 나이를 속이고 미군 장교의 가정부로 취업해 6년간 일했다. 다른 10대에 비해 높은 임금을 받았지만, 식구들을 홀로 먹여 살리기엔 부족했다.

그 무렵 가난한 딸들을 사고파는 일이 흔치 않게 벌어졌다. 많은 여성이 미군을 상대하는 매춘 업소로 팔려나갔다. 여성을 물색하던 장사꾼은 가데카루의 아버지에게도 딸을 팔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다행히도 가데카루의 부모는 그녀를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상대 여성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오키나와 농작물의 1년 매출과 맞먹었다고 전해진다.



‘양공주’, ‘양색시’로 불린 소녀들 양공주들의 전후 생존기

대한민국 평택시.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 인근은 기지촌으로 불렸고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가 이뤄졌다. 빈곤 때문에 다른 생존 수단을 찾고 있던 여성들이 기지촌으로 유입됐고 이들은 '양공주', '양색시'로 비난받았다.

포주들은 두려움을 안고 기지촌을 찾은 여성들에게 향정신성 약물인 옥타리돈을 먹였다. 부끄러움을 없애준다는 목적에서였다. 이는 장부에 다 기록돼 빚으로 남았다.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느라 더욱 빚에 허덕여야 했다. 여성들은 '신랑(미군) 잘 만나면 갚고 나가겠지'하는 심정으로 간신히 버텼다.

김숙자 할머니(75)도 이 중 한 명이었다. 떳떳하지 못했던 세월을 지나온 김숙자 할머니와 다른 기지촌 여성들은 항상 그늘 속에 숨어 지냈다.


2012년 움츠렸던 이들이 기지촌에서의 경험을 연극으로 만들고 직접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편견의 시선을 떨쳐내고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6월 25일 122명의 기지촌 여성들은 대한민국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KBS스페셜 '전쟁과 여성 3부-그녀의 꿈(24일(목) 밤 10시, KBS 1TV)'에선 전쟁의 상흔을 딛고 미국에 정착한 1세대 결혼 이민 여성과 미군 기지촌 인근에서 생계를 이어온 한일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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