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방랑자들

입력 2017.09.05 (21:42) 수정 2017.09.05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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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탈북 반대했다”…北공작원 출신 탈북민의 고백

캐나다에서 만난 탈북민 박창민(가명) 씨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놨다. 박 씨는 북한에서 대남 공작원이었다. 탈북 이후 한국에 와서는 반대로 대북 정보를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박 씨가 한국 생활을 접고 캐나다로 온 건 북한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이 친구는 박 씨에게 정보를 넘긴 사실이 발각돼 북한 당국의 고문을 받다가 숨졌다. 이를 알게 된 박 씨는 심한 죄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일회용으로 계속 이용만 당하는 본인의 업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한국 생활 내내 마음의 정착을 하지 못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결국, 박 씨는 캐나다로 와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박 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탈북을 반대했다고 취재진에게 털어놨다. 한국에 오지 말라고 한 것이다. 못 살고 못 먹더라도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만큼은 가족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탈남(脫南) 행렬 그 후…‘불법 체류’ 전락하기도

취재진은 올여름 영국과 캐나다에 사는 많은 탈북민을 만났다. 이들은 배가 고파서 자유를 찾아서,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했었다는 어느 탈북민 부부는 TV다큐멘터리에 본인들의 사연이 방영된 이후 손님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해 결국 식당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2010년을 전후로 탈북민들의 탈남(脫南) 행렬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해 정착했던 한국을 다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 한국을 떠난 탈북민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숨기고 난민 신청을 해서 받아들여졌다. 한때는 영국이나 캐나다에 각각 천 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4년 무렵부터 영국과 캐나다 이민 당국이 한국 정부로부터 탈북민 지문 정보를 받아 난민 심사를 강화했다. 이른바 '위장 난민'을 걸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탈북민들의 난민 신청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 생계비 지원도 끊기고 '불법 체류' 상태로 떠도는 탈북민들이 적지 않다. 누가 이들을 제3국으로 내몬 것일까?

◆ 정체성 흔들리는 新디아스포라…그들의 조국은?

다시 선택한 해외 난민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영국의 경우 몇 년씩 걸리는 난민 심사 동안 일을 할 수도, 이사를 할 수도 없다. 심지어 캐나다에선 한국을 거쳐왔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을 당하는 탈북민들이 줄을 이었다. 분단의 현실은 아예 이들의 삶을 바꿔놨다. 탈북민의 탈남은 아직 공식적으로 집계된 통계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 사회의 무관심 속에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났고, 언제 끝날지 모를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취재진은 인터뷰 과정에서 탈북민들에게 공통된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이들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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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단의 방랑자들
    • 입력 2017-09-05 18:17:37
    • 수정2017-09-05 22: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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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탈북 반대했다”…北공작원 출신 탈북민의 고백

캐나다에서 만난 탈북민 박창민(가명) 씨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놨다. 박 씨는 북한에서 대남 공작원이었다. 탈북 이후 한국에 와서는 반대로 대북 정보를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박 씨가 한국 생활을 접고 캐나다로 온 건 북한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이 친구는 박 씨에게 정보를 넘긴 사실이 발각돼 북한 당국의 고문을 받다가 숨졌다. 이를 알게 된 박 씨는 심한 죄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일회용으로 계속 이용만 당하는 본인의 업무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한국 생활 내내 마음의 정착을 하지 못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결국, 박 씨는 캐나다로 와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박 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의 탈북을 반대했다고 취재진에게 털어놨다. 한국에 오지 말라고 한 것이다. 못 살고 못 먹더라도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만큼은 가족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탈남(脫南) 행렬 그 후…‘불법 체류’ 전락하기도

취재진은 올여름 영국과 캐나다에 사는 많은 탈북민을 만났다. 이들은 배가 고파서 자유를 찾아서,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했었다는 어느 탈북민 부부는 TV다큐멘터리에 본인들의 사연이 방영된 이후 손님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해 결국 식당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2010년을 전후로 탈북민들의 탈남(脫南) 행렬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해 정착했던 한국을 다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 한국을 떠난 탈북민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숨기고 난민 신청을 해서 받아들여졌다. 한때는 영국이나 캐나다에 각각 천 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4년 무렵부터 영국과 캐나다 이민 당국이 한국 정부로부터 탈북민 지문 정보를 받아 난민 심사를 강화했다. 이른바 '위장 난민'을 걸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탈북민들의 난민 신청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 생계비 지원도 끊기고 '불법 체류' 상태로 떠도는 탈북민들이 적지 않다. 누가 이들을 제3국으로 내몬 것일까?

◆ 정체성 흔들리는 新디아스포라…그들의 조국은?

다시 선택한 해외 난민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영국의 경우 몇 년씩 걸리는 난민 심사 동안 일을 할 수도, 이사를 할 수도 없다. 심지어 캐나다에선 한국을 거쳐왔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을 당하는 탈북민들이 줄을 이었다. 분단의 현실은 아예 이들의 삶을 바꿔놨다. 탈북민의 탈남은 아직 공식적으로 집계된 통계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 사회의 무관심 속에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났고, 언제 끝날지 모를 방랑을 거듭하고 있다. 취재진은 인터뷰 과정에서 탈북민들에게 공통된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이들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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