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과 사대부의 식탐기(食貪記)

입력 2017.10.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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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이나 사대부의 음식 취향은 어떠했을까?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과연 절제가 가능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주로 어떤 음식을 좋아했을까?

지난 11일 방송된 KBS 1라디오 '김난도의 트렌드 플러스'에서는 역사 속 대식가와 미식가에 대해 알아봤다.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은 대식가이면서 미식가였다. 특히 세종은 육류 없이는 식사를 못 할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인 태종은 "주상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못 하니 내가 죽은 후 상(喪) 중에도 고기를 들게 하라"는 유교(遺敎;임종 때 남긴 말)를 내릴 정도였다.

당시 조선은 상을 치르는 동안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됐다. 이에 따라 세종도 육류를 먹지 않았다. 그러자 대신들이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고기나 생선이 들어있지 않은 반찬)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라면서 고기 먹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1월 2일조선왕조실록 누리집/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1월 2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1권(세종 8년)에는 세종이 연회에 올라온 고기가 아랫사람보다 양이 적자 관련자를 문책했다는 기록이 있다. "큰 상에 놓인 고기가 바깥사람들의 작은 상에 차린 것만도 못하니, 이것은 담당 관청에서 반드시 내가 직접 보지 않을 줄로 알고 이렇게 한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조심하지 아니하는가"하며 해당 관리를 문초하게 했다.

83년을 산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임금으로 기록된다. 그의 장수 비결은 소식(小食)이었다. 늘 적게 먹고 채식 위주로 식사했다. 영조 뒤를 이어 왕이 된 손자 정조도 적게 먹었다. 그러나 두 왕의 식사에는 차이가 있었다. 영조는 소식·절식·채식을 하며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정조는 소식과 절식을 하면서도 술에는 한없이 관대했다.

고종 황제가 좋아한 음식은 냉면이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즐겼다고 한다. 상궁 김명길의 수기를 모아 낸 책 '낙선재 주변'을 보면, 고종은 맵거나 짠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나는 냉면을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양반들 사이에서는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소고기를 구워먹는 ‘난로회’가 유행이었다./KBS ‘역사저널 그날’(2014.02.02)양반들 사이에서는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소고기를 구워먹는 ‘난로회’가 유행이었다./KBS ‘역사저널 그날’(2014.02.02)


그런가 하면 학문을 사랑한 선비 중에서도 탐식(貪食)했던 이들이 있다. 그중 조선 전기 문신(文臣)인 서거정은 음식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애정을 문학으로도 표현했다. 특히 음식을 주제로 많은 시를 지었다.

서거정은 두부나 소의 간·염통 등을 시로 찬양했다. 그는 '필원잡기'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소의 간·염통을 꼽았다. 이를 '용의 알'에 비유해 "용의 알을 맛보았더니 석 달 동안 다른 고기 생각은 나지 않았다"며 시를 짓기도 했다.

사진 : gettyimagesbank사진 : gettyimagesbank

홍시는 많은 조선 사대부가 예찬한 과일이다. 홍시 외에 게장도 많이 칭송되었다.

최초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귀양살이할 때도 "먹을 것이 많이 나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할 정도로 음식 사랑이 유별났다. 귀양 전, 어느 고을에 임명돼 관직을 수행할 것인가를 두고 허균이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에게 보낸 편지 중 이런 것이 있다. "가림(부여군 임천면)은 바닷가에 있어 궁벽한 지역이기는 하나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KBS ‘한국사 전’(2008.07.05) KBS ‘한국사 전’(2008.07.05)

그는 전라북도 함열(익산)로 귀양을 간 뒤에도 음식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 시기 그는 전국 팔도 향토음식과 지역 식재료 맛을 꼼꼼히 기록한 책을 집대성한다. 조선 최초의 음식 비평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이다. 도문대작은 '고기를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는 뜻으로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리킨 말이다. 귀양지에서 거친 음식을 먹게 되자 전에 먹었던 좋은 음식을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와 이덕무도 음식을 두고 다투는 대식가이자 미식가였다. 그중에서도 이덕무는 단 것을 좋아해 동료들이 단 음식을 챙겨두었다가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덕무는 친구들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모두가 나에게 단 것을 주는데 오로지 박제가만이 내 입에 든 것도 빼앗아 먹는다"는 것이다.

박제가의 친구들은 그에게 특별한 별명을 지어줬다. 앉은 자리에서 냉면 세 그릇과 만두 100개를 해치웠다고 해서 '냉면 세 그릇에 만두 100개'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당시 만두 한 개의 크기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그 크기가 아이 주먹보다 컸다고 하니 왜 대식가라는 말이 나왔는지 짐작할만하다.

KBS ‘역사추적’(2008.12.06)KBS ‘역사추적’(2008.12.06)

조선 시대 많은 남성이 음식을 사랑하고 찬미했지만, 당시 남자가 요리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궁중 잔치인 진연이나 진찬 때 음식을 하는 '대령숙수(待令熟手)'는 모두 남자였다. 솜씨가 좋은 숙수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가며 궁에 머물렀고 왕의 총애도 많이 받았다.

조선 시대 선비 중에서도 직접 요리한 이들이 있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은 환갑에도 고추장을 직접 담갔다. 그는 "고추장 작은 단지를 하나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거다. 내가 직접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는 편지를 자녀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정약용은 유독 개고기를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살아있는 개를 잡는 법, 개고기 삶는 법까지 남겼다. 자신의 비법을 정리해 형제와 친구에게 공유하는 것을 즐기기도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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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왕이나 사대부의 음식 취향은 어떠했을까?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과연 절제가 가능했을까? 그리고 그들은 주로 어떤 음식을 좋아했을까?

지난 11일 방송된 KBS 1라디오 '김난도의 트렌드 플러스'에서는 역사 속 대식가와 미식가에 대해 알아봤다.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은 대식가이면서 미식가였다. 특히 세종은 육류 없이는 식사를 못 할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인 태종은 "주상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못 하니 내가 죽은 후 상(喪) 중에도 고기를 들게 하라"는 유교(遺敎;임종 때 남긴 말)를 내릴 정도였다.

당시 조선은 상을 치르는 동안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됐다. 이에 따라 세종도 육류를 먹지 않았다. 그러자 대신들이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고기나 생선이 들어있지 않은 반찬)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라면서 고기 먹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1월 2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1권(세종 8년)에는 세종이 연회에 올라온 고기가 아랫사람보다 양이 적자 관련자를 문책했다는 기록이 있다. "큰 상에 놓인 고기가 바깥사람들의 작은 상에 차린 것만도 못하니, 이것은 담당 관청에서 반드시 내가 직접 보지 않을 줄로 알고 이렇게 한 것이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조심하지 아니하는가"하며 해당 관리를 문초하게 했다.

83년을 산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임금으로 기록된다. 그의 장수 비결은 소식(小食)이었다. 늘 적게 먹고 채식 위주로 식사했다. 영조 뒤를 이어 왕이 된 손자 정조도 적게 먹었다. 그러나 두 왕의 식사에는 차이가 있었다. 영조는 소식·절식·채식을 하며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정조는 소식과 절식을 하면서도 술에는 한없이 관대했다.

고종 황제가 좋아한 음식은 냉면이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즐겼다고 한다. 상궁 김명길의 수기를 모아 낸 책 '낙선재 주변'을 보면, 고종은 맵거나 짠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나는 냉면을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양반들 사이에서는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소고기를 구워먹는 ‘난로회’가 유행이었다./KBS ‘역사저널 그날’(2014.02.02)

그런가 하면 학문을 사랑한 선비 중에서도 탐식(貪食)했던 이들이 있다. 그중 조선 전기 문신(文臣)인 서거정은 음식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애정을 문학으로도 표현했다. 특히 음식을 주제로 많은 시를 지었다.

서거정은 두부나 소의 간·염통 등을 시로 찬양했다. 그는 '필원잡기'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소의 간·염통을 꼽았다. 이를 '용의 알'에 비유해 "용의 알을 맛보았더니 석 달 동안 다른 고기 생각은 나지 않았다"며 시를 짓기도 했다.

사진 : gettyimagesbank
홍시는 많은 조선 사대부가 예찬한 과일이다. 홍시 외에 게장도 많이 칭송되었다.

최초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귀양살이할 때도 "먹을 것이 많이 나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할 정도로 음식 사랑이 유별났다. 귀양 전, 어느 고을에 임명돼 관직을 수행할 것인가를 두고 허균이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에게 보낸 편지 중 이런 것이 있다. "가림(부여군 임천면)은 바닷가에 있어 궁벽한 지역이기는 하나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KBS ‘한국사 전’(2008.07.05)
그는 전라북도 함열(익산)로 귀양을 간 뒤에도 음식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 시기 그는 전국 팔도 향토음식과 지역 식재료 맛을 꼼꼼히 기록한 책을 집대성한다. 조선 최초의 음식 비평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이다. 도문대작은 '고기를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는 뜻으로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리킨 말이다. 귀양지에서 거친 음식을 먹게 되자 전에 먹었던 좋은 음식을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와 이덕무도 음식을 두고 다투는 대식가이자 미식가였다. 그중에서도 이덕무는 단 것을 좋아해 동료들이 단 음식을 챙겨두었다가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덕무는 친구들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모두가 나에게 단 것을 주는데 오로지 박제가만이 내 입에 든 것도 빼앗아 먹는다"는 것이다.

박제가의 친구들은 그에게 특별한 별명을 지어줬다. 앉은 자리에서 냉면 세 그릇과 만두 100개를 해치웠다고 해서 '냉면 세 그릇에 만두 100개'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당시 만두 한 개의 크기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그 크기가 아이 주먹보다 컸다고 하니 왜 대식가라는 말이 나왔는지 짐작할만하다.

KBS ‘역사추적’(2008.12.06)
조선 시대 많은 남성이 음식을 사랑하고 찬미했지만, 당시 남자가 요리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궁중 잔치인 진연이나 진찬 때 음식을 하는 '대령숙수(待令熟手)'는 모두 남자였다. 솜씨가 좋은 숙수들은 대부분 대를 이어가며 궁에 머물렀고 왕의 총애도 많이 받았다.

조선 시대 선비 중에서도 직접 요리한 이들이 있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은 환갑에도 고추장을 직접 담갔다. 그는 "고추장 작은 단지를 하나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거다. 내가 직접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는 편지를 자녀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정약용은 유독 개고기를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살아있는 개를 잡는 법, 개고기 삶는 법까지 남겼다. 자신의 비법을 정리해 형제와 친구에게 공유하는 것을 즐기기도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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