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고종이 즐긴 ‘고종시(高宗柿)’의 계절

입력 2017.11.22 (14:0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경남 산청의 11월은 감나무의 달이다. 오는 사람 다 품어준다는 지리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엔 선홍빛으로 통통하게 여문 감이 집집마다 주렁주렁 열렸다. 산청에 사는 사람 중 감나무에 대한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 마을의 어머니들에게 감나무는 현실이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뻗은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고, 깎고, 말려 곶감을 만들어야만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고달픈 시절이 있었다. 감나무와 숱한 세월을 함께 보내며 어머니는 감나무와 닮아가기 시작했다.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붙이듯 시집와서 자식 낳아 키우니 피부는 마르고 갈라졌다. 늙으면 속이 까매지는 감나무처럼 멍든 마음까지도 닮았다. 어머니에게 감나무는 어떤 의미일까?


"좋은 거는 아들 보내주고 벌레 먹은 거는 내 묵고"

풍년이다. 고종황제가 즐겨 먹어 '고종시(高宗柿)'라 불리는 감이 마을 골목과 논밭에도 탐스럽게 열렸다. 산청에서 재배한 고종시는 전국 곶감 생산량의 10%를 차지한다. 높은 당도를 자랑하는 데다 식감이 부드럽고 차져 고종황제에게 진상됐고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청와대 설 선물로도 납품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 과일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다리던 고종시가 지천으로 열렸지만, 김필순(79) 씨는 감나무를 지나쳐 밭으로 향한다. 감 수확을 앞두고 전답의 일들이 필순 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내주기 위해 약 한 번 뿌리지 않고 키웠건만 멧돼지에 까치, 달팽이까지 나눠 먹는 통에 농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필순 씨는 자식 농사 하나만큼은 잘 지었다. 자식들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았고, 자식들도 훌륭하게 자라줬다. 틈만 나면 자식 걱정하는 필순 씨 덕분이다. 필순 씨 손은 성한 곳 없이 휘고 비틀어졌지만 정작 자식들이 속 썩인 것보다 자식들 제대로 못 먹인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시려온다. 도대체 모성애란 무엇일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가난

산청 할머니들이 귀한 사람이 와야만 꺼내 먹는다는 곶감을 갖고 마당에 모였다. 이들은 감 떡을 찌고 곶감 장아찌를 버무리며 솜씨를 발휘한다.


감 수확을 앞두고 감나무에 얽힌 할머니들의 경험담은 끊이지 않는다. 마을로 시집와 가난에 고생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곶감 잔치를 벌이는 이 순간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때로는 골병들게 한다 하여 골병 나무로 불리는 감나무지만 잘 커 준 자식들만 생각하면 고마운 효자 나무다.

감 따는 철, 전쟁터가 따로 없는 감나무골


송장의 손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다는 감나무의 계절은 낮으로 따고 밤으로 깎아도 시간이 부족하다. 손 놀리는 날 없이 마을에서 제일 많이 일했다는 바지런한 필순 씨도 태산 같은 감 앞에선 걱정이 앞선다. 일손을 구하고 싶어도 모두 바쁜 시기라 사람이 없다.

감을 따기 위해 나무에 오를 때마다 필순 씨는 3년 전 세상을 뜬 남편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진다. 자식들은 혹여나 어머니가 다칠까봐 일하지 말라 하지만 필순 씨는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감나무를 쉽게 놓지 못한다. 감나무는 남편이 심어놓은 흔적이자 자식들을 키워낸 기억이기 때문이다.


'다큐공감'(25일(토) 저녁 7시 10분 KBS 1TV)에서 11월 감나무 수확 철을 맞이한 어머니들의 속 깊은 인생 이야기를 전한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11월, 고종이 즐긴 ‘고종시(高宗柿)’의 계절
    • 입력 2017-11-22 14:07:43
    방송·연예
경남 산청의 11월은 감나무의 달이다. 오는 사람 다 품어준다는 지리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엔 선홍빛으로 통통하게 여문 감이 집집마다 주렁주렁 열렸다. 산청에 사는 사람 중 감나무에 대한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 마을의 어머니들에게 감나무는 현실이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뻗은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고, 깎고, 말려 곶감을 만들어야만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고달픈 시절이 있었다. 감나무와 숱한 세월을 함께 보내며 어머니는 감나무와 닮아가기 시작했다.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붙이듯 시집와서 자식 낳아 키우니 피부는 마르고 갈라졌다. 늙으면 속이 까매지는 감나무처럼 멍든 마음까지도 닮았다. 어머니에게 감나무는 어떤 의미일까?


"좋은 거는 아들 보내주고 벌레 먹은 거는 내 묵고"

풍년이다. 고종황제가 즐겨 먹어 '고종시(高宗柿)'라 불리는 감이 마을 골목과 논밭에도 탐스럽게 열렸다. 산청에서 재배한 고종시는 전국 곶감 생산량의 10%를 차지한다. 높은 당도를 자랑하는 데다 식감이 부드럽고 차져 고종황제에게 진상됐고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청와대 설 선물로도 납품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 과일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다리던 고종시가 지천으로 열렸지만, 김필순(79) 씨는 감나무를 지나쳐 밭으로 향한다. 감 수확을 앞두고 전답의 일들이 필순 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내주기 위해 약 한 번 뿌리지 않고 키웠건만 멧돼지에 까치, 달팽이까지 나눠 먹는 통에 농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필순 씨는 자식 농사 하나만큼은 잘 지었다. 자식들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았고, 자식들도 훌륭하게 자라줬다. 틈만 나면 자식 걱정하는 필순 씨 덕분이다. 필순 씨 손은 성한 곳 없이 휘고 비틀어졌지만 정작 자식들이 속 썩인 것보다 자식들 제대로 못 먹인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시려온다. 도대체 모성애란 무엇일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가난

산청 할머니들이 귀한 사람이 와야만 꺼내 먹는다는 곶감을 갖고 마당에 모였다. 이들은 감 떡을 찌고 곶감 장아찌를 버무리며 솜씨를 발휘한다.


감 수확을 앞두고 감나무에 얽힌 할머니들의 경험담은 끊이지 않는다. 마을로 시집와 가난에 고생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곶감 잔치를 벌이는 이 순간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때로는 골병들게 한다 하여 골병 나무로 불리는 감나무지만 잘 커 준 자식들만 생각하면 고마운 효자 나무다.

감 따는 철, 전쟁터가 따로 없는 감나무골


송장의 손도 빌려야 할 정도로 바쁘다는 감나무의 계절은 낮으로 따고 밤으로 깎아도 시간이 부족하다. 손 놀리는 날 없이 마을에서 제일 많이 일했다는 바지런한 필순 씨도 태산 같은 감 앞에선 걱정이 앞선다. 일손을 구하고 싶어도 모두 바쁜 시기라 사람이 없다.

감을 따기 위해 나무에 오를 때마다 필순 씨는 3년 전 세상을 뜬 남편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진다. 자식들은 혹여나 어머니가 다칠까봐 일하지 말라 하지만 필순 씨는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감나무를 쉽게 놓지 못한다. 감나무는 남편이 심어놓은 흔적이자 자식들을 키워낸 기억이기 때문이다.


'다큐공감'(25일(토) 저녁 7시 10분 KBS 1TV)에서 11월 감나무 수확 철을 맞이한 어머니들의 속 깊은 인생 이야기를 전한다.

[프로덕션2] 최정윤 kbs.choijy@kbs.co.kr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