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80년…사샤의 아리랑

입력 2017.12.15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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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지 8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서 '고려인'으로 불리며 살아왔다. 할아버지 세대에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사샤 가족도 마찬가지다.

고려인 4세 사샤(24)가 우즈베키스탄 전역에 퍼져있는 고려인들을 찾아갔다. 생생한 이주 역사를 듣기 위해서다. 'KBS스페셜-사샤의 아리랑'(15일(금) 밤 9시 40분, 1TV)은 사샤의 시선으로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 80년을 되돌아본다.



고려인 노화가의 마지막 증언


고려인 1세대 화가 안 블라디미르(90)가 기억하는 고려인 이주과정은 '민족 비극'에 가깝다. 1937년, 구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17만 명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그중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던 고려인은 7만 6천여 명에 달한다.


당시 기차역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강제로 실리는 고려인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우즈베키스탄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황량한 갈대밭을 개간했다. '깔'이라 부르는 거친 갈대를 베어 움막집을 짓고, 황토를 개간해 목화밭으로 바꿨다.

블라디미르는 이런 이주 과정을 화폭에 담았다. 우즈베키스탄 예술훈장(2001년), 러시아 자연과학아카데미 공훈십자상(2004년) 등을 수상했다. 현재 안 블라디미르는 수도 타슈켄트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고려인의 땀과 눈물, 갈대밭을 목화밭으로 바꾸다


우즈베키스탄 정착 당시 고려인 대부분은 집단농장을 이루고 살았다. '북극성 콜호즈'(집단농장)는 고려인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병화가 성공으로 이끈 대표적인 농장이다. 농장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그의 지도 덕분에 다른 지역 농장보다 월등한 수확량을 이뤄냈다. 이후 그는 1948년과 1951년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다.


벼농사와 목화농사를 짓던 고려인 집단농장은 사라졌지만 김병화박물관에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병화박물관의 관장인 고려인 2세 장 에밀리아 여사는 사샤에게 우즈베키스탄 초기 어려웠던 고려인의 삶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우즈베키스탄의 어머니'라 불리는 고려인, 박 베라


고려인 박 베라 원장은 우즈베키스탄에서 32년 동안 고아원을 운영했다. 가난한 고려인 2세로 살았던 그녀는 국립 카라칼팍스탄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로 근무한 뒤, 히바시 교육청 장학감독관 자리에 올랐다.

1985년, 구소련 정부는 아이들에게 헌신적이던 박 베라에게 '히바 20번 고아원' 운영을 맡겼다. 그녀는 히바 20번 고아원을 모범적으로 운영한 공로로 2001년 고려인으로는 유일하게 '우즈베키스탄 영웅' 칭호 및 금별 메달을 받았다.


현재 히바 20번 고아원에는 120여 명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다. 기숙사는 모두 19개로, 한 기숙사 당 6~8명의 아이가 생활한다. 기숙사마다 '엄마'라고 불리는 담당 선생님이 있다. 방과 후 아이들은 음악, 미술, 체육 등 동아리 활동을 한다.

한민족의 문화를 지켜온 고려인들

1991년 설립된 고려인 문화협회는 고려인의 전통과 풍습을 유지하는 행사와 한글 교육 등 문화 사업을 담당한다. 수도 타슈켄트의 본부와 전국 26개 지부를 두고 있다.


고려인 이주 80주년을 기념해 우즈베키스탄 전역에 흩어져있는 고려인을 위한 순회공연이 이뤄졌다. 사샤는 사회자 겸 가수로 참가했다. 한 마가리타가 이끄는 한국 전통무용단인 고려가무단과 고려인 유명 가수 김 막달레나 등 28명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일주일간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돌며 공연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약 17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그들은 지난 80년간 비극적인 삶을 극복하고 수도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내고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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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인 강제이주 80년…사샤의 아리랑
    • 입력 2017-12-15 17:45:08
    사회
올해는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지 8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서 '고려인'으로 불리며 살아왔다. 할아버지 세대에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사샤 가족도 마찬가지다.

고려인 4세 사샤(24)가 우즈베키스탄 전역에 퍼져있는 고려인들을 찾아갔다. 생생한 이주 역사를 듣기 위해서다. 'KBS스페셜-사샤의 아리랑'(15일(금) 밤 9시 40분, 1TV)은 사샤의 시선으로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 80년을 되돌아본다.



고려인 노화가의 마지막 증언


고려인 1세대 화가 안 블라디미르(90)가 기억하는 고려인 이주과정은 '민족 비극'에 가깝다. 1937년, 구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17만 명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켰다. 그중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던 고려인은 7만 6천여 명에 달한다.


당시 기차역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강제로 실리는 고려인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우즈베키스탄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황량한 갈대밭을 개간했다. '깔'이라 부르는 거친 갈대를 베어 움막집을 짓고, 황토를 개간해 목화밭으로 바꿨다.

블라디미르는 이런 이주 과정을 화폭에 담았다. 우즈베키스탄 예술훈장(2001년), 러시아 자연과학아카데미 공훈십자상(2004년) 등을 수상했다. 현재 안 블라디미르는 수도 타슈켄트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고려인의 땀과 눈물, 갈대밭을 목화밭으로 바꾸다


우즈베키스탄 정착 당시 고려인 대부분은 집단농장을 이루고 살았다. '북극성 콜호즈'(집단농장)는 고려인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병화가 성공으로 이끈 대표적인 농장이다. 농장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그의 지도 덕분에 다른 지역 농장보다 월등한 수확량을 이뤄냈다. 이후 그는 1948년과 1951년 두 차례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받았다.


벼농사와 목화농사를 짓던 고려인 집단농장은 사라졌지만 김병화박물관에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병화박물관의 관장인 고려인 2세 장 에밀리아 여사는 사샤에게 우즈베키스탄 초기 어려웠던 고려인의 삶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우즈베키스탄의 어머니'라 불리는 고려인, 박 베라


고려인 박 베라 원장은 우즈베키스탄에서 32년 동안 고아원을 운영했다. 가난한 고려인 2세로 살았던 그녀는 국립 카라칼팍스탄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로 근무한 뒤, 히바시 교육청 장학감독관 자리에 올랐다.

1985년, 구소련 정부는 아이들에게 헌신적이던 박 베라에게 '히바 20번 고아원' 운영을 맡겼다. 그녀는 히바 20번 고아원을 모범적으로 운영한 공로로 2001년 고려인으로는 유일하게 '우즈베키스탄 영웅' 칭호 및 금별 메달을 받았다.


현재 히바 20번 고아원에는 120여 명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다. 기숙사는 모두 19개로, 한 기숙사 당 6~8명의 아이가 생활한다. 기숙사마다 '엄마'라고 불리는 담당 선생님이 있다. 방과 후 아이들은 음악, 미술, 체육 등 동아리 활동을 한다.

한민족의 문화를 지켜온 고려인들

1991년 설립된 고려인 문화협회는 고려인의 전통과 풍습을 유지하는 행사와 한글 교육 등 문화 사업을 담당한다. 수도 타슈켄트의 본부와 전국 26개 지부를 두고 있다.


고려인 이주 80주년을 기념해 우즈베키스탄 전역에 흩어져있는 고려인을 위한 순회공연이 이뤄졌다. 사샤는 사회자 겸 가수로 참가했다. 한 마가리타가 이끄는 한국 전통무용단인 고려가무단과 고려인 유명 가수 김 막달레나 등 28명으로 구성된 공연단이 일주일간 우즈베키스탄 전역을 돌며 공연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약 17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그들은 지난 80년간 비극적인 삶을 극복하고 수도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내고 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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