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일본은 사죄하라”…일본의 양심 이끈 ‘이토 나리히코’

입력 2018.03.05 (16:45) 수정 2018.03.0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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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 운동에 앞장선 일본 지식인

일본 도쿄 지요다 구에는 '왕궁'과 국회의사당, 총리 관저, 최고재판소, 그리고 주요 중앙 부처 등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의 상징과 정치 권력이 핵심이 집결해 있어,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상부구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토 나리히코 교수(추도모임 제공)이토 나리히코 교수(추도모임 제공)

3·1절을 나흘 앞둔 2월 25일, 지요다 구의 총리 관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본 주류사회를 불편하게 했던 일본인 학자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추도식이 열렸다.

2017년 11월 29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토 나리히코 일본 주오대 前 명예교수. 1973년 유신 독재정권 시절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규명 운동을 오랫동안 주도했다.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지식인의 양심에 이끌려 참여한 활동이었다.

한승헌 전 감사원장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이토 나리히코 교수(추도모임 제공)한승헌 전 감사원장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이토 나리히코 교수(추도모임 제공)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과 특별한 친분이 없었지만, 일본내 지식인 등의 뜻을 모아 '김대중 납치 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모임'을 결성해 10년 이상 활동했다.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실제로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미국에서였다.

인권과 평화, 진정한 한일 연대를 위하여...

젊은 시절의 이토 교수(추도모임 제공)젊은 시절의 이토 교수(추도모임 제공)

이토 교수는 독일 문학·사상을 연구한 문학도였다. 특히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 겸 혁명가로 독일에서 활동한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했고, 국제적 연구모임을 만들어 활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의 관심사는 군축, 평화, 반핵, 평화헌법 옹호, 그리고 한일 연대와 상호 이해를 위한 활동 등 다양했다. 단체를 이끌지 않더라도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시민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이토 나리히코 선생의 뜻을 계승하는 모임(추도 모임)'의 오카모토 아쯔시 대표는 고인이 학창시절부터 임종 때까지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연구실이나 거리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을 모아 독서회를 만들고 평화운동을 조직했다고 한다.

1992년 당시 활동 사진(추도모임 제공)1992년 당시 활동 사진(추도모임 제공)

일본내 양심적 지식인의 각성을 이끌다

한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활동에 앞장섰던 인권변호사, 한승헌 전 감사원장과도 교류하는 등 특히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2010년 도쿄 시내에서 '한일 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 공동선언 대회'가 열렸다. 강제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할 것과 강제징용자 및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해 사죄하고 보상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15개 시민단체와 시민, 한국 측 인사 등 천500여 명이 참여해,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했다. 당시 일본 측 실행위원회 공동대표가 이토 교수였다.

이들은 공동선언에서, 민주당 정권의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했지만 병합조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했다.

민감한 역사 문제에서 위축됐던 일본 내 지식인과 시민단체가 움직였다는 점에서 '선언'의 반향은 컸다. 일본의 역사적 잘못을 부인해온 극우단체들은 차량 10여 대를 몰고와 행사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 극렬하게 반발했다.

이토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도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했다. 2014년 5월,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려온 정례 수요집회에 참가했다. 이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과해 주목받았다.

그는 저서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를 통해, 일본 내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을 경고하는 등 평화운동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조용한 추도식 ... 한국 지식인·시민단체 애도 잇따라


이토 교수는 지난해 11월 서거했지만, 임종 소식은 뒤늦게 알려졌다. 일본 언론은 침묵했고, 극소수 지인들에게만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서거 100일 추도식'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행사 장소를 관할하는 관계자라고 신분을 밝힌 일본인이 이례적으로 KBS 촬영팀에게 구체적 장소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토 교수는 사후에도 일본 사회에서 감당하기 쉽기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날 추도식에는 고인의 삶을 기억하는 한일 양국의 지식인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우리나라의 한승헌 변호사(前감사원장, 前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 대표)와 오재일 전남대 명예교수(前 5·18기념재단 이사장),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前 노동부 장관) 등도 먼길을 찾아와 추모의 뜻을 함께 했다.

추도사를 하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추도사를 하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

또,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 이희호 여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이희자 태평양 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그리고 황석영 작가 등은 미리 추도사를 보내왔다.

日우익 주류 사회의 거대한 편견에 도전한 삶

이희호 여사와 만난 이토 교수(추도모임 제공)이희호 여사와 만난 이토 교수(추도모임 제공)

이희호 여사는 한승헌 변호사가 대신 읽은 추도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성원을 잊을 수 없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 운동이 양국 시민단체의 교류 와 연대로 발전해, 민주화와 인권문제 전반까지 분야를 넓혔다'고 평가했다.

특히 고인인 일본의 평화헌법 지키기에 앞장섰음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노력이 면면히 계승되기를 기원했다.


불행하게도, 아베 총리가 이끄는 보수 우익정권은 이토 교수의 염원과는 반대되는 길로 치달아 왔다. 옛 군국주의 정권의 역사적 과오와 반인도적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 철저히 부정하면서, '전쟁 가능 국가'로의 공식 회귀를 위한 개헌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보수 우익세력이 날로 목소리를 높여가는 지금, 일본내 양심적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이토 나리히코 교수의 빈자리가 더욱 커보인다. 추도회에 참석한 동료와 후학들은 일본 주류사회의 거대한 편견에 맞서 이토 교수의 유지를 반드시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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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일본은 사죄하라”…일본의 양심 이끈 ‘이토 나리히코’
    • 입력 2018-03-05 16:45:19
    • 수정2018-03-06 10:22:19
    특파원 리포트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 운동에 앞장선 일본 지식인

일본 도쿄 지요다 구에는 '왕궁'과 국회의사당, 총리 관저, 최고재판소, 그리고 주요 중앙 부처 등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의 상징과 정치 권력이 핵심이 집결해 있어,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상부구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토 나리히코 교수(추도모임 제공)
3·1절을 나흘 앞둔 2월 25일, 지요다 구의 총리 관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본 주류사회를 불편하게 했던 일본인 학자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추도식이 열렸다.

2017년 11월 29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토 나리히코 일본 주오대 前 명예교수. 1973년 유신 독재정권 시절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규명 운동을 오랫동안 주도했다.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지식인의 양심에 이끌려 참여한 활동이었다.

한승헌 전 감사원장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를 방문한 이토 나리히코 교수(추도모임 제공)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과 특별한 친분이 없었지만, 일본내 지식인 등의 뜻을 모아 '김대중 납치 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모임'을 결성해 10년 이상 활동했다.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실제로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미국에서였다.

인권과 평화, 진정한 한일 연대를 위하여...

젊은 시절의 이토 교수(추도모임 제공)
이토 교수는 독일 문학·사상을 연구한 문학도였다. 특히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 겸 혁명가로 독일에서 활동한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했고, 국제적 연구모임을 만들어 활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의 관심사는 군축, 평화, 반핵, 평화헌법 옹호, 그리고 한일 연대와 상호 이해를 위한 활동 등 다양했다. 단체를 이끌지 않더라도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시민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이토 나리히코 선생의 뜻을 계승하는 모임(추도 모임)'의 오카모토 아쯔시 대표는 고인이 학창시절부터 임종 때까지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연구실이나 거리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을 모아 독서회를 만들고 평화운동을 조직했다고 한다.

1992년 당시 활동 사진(추도모임 제공)
일본내 양심적 지식인의 각성을 이끌다

한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활동에 앞장섰던 인권변호사, 한승헌 전 감사원장과도 교류하는 등 특히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2010년 도쿄 시내에서 '한일 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 공동선언 대회'가 열렸다. 강제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할 것과 강제징용자 및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해 사죄하고 보상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15개 시민단체와 시민, 한국 측 인사 등 천500여 명이 참여해,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했다. 당시 일본 측 실행위원회 공동대표가 이토 교수였다.

이들은 공동선언에서, 민주당 정권의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했지만 병합조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했다.

민감한 역사 문제에서 위축됐던 일본 내 지식인과 시민단체가 움직였다는 점에서 '선언'의 반향은 컸다. 일본의 역사적 잘못을 부인해온 극우단체들은 차량 10여 대를 몰고와 행사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 극렬하게 반발했다.

이토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도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했다. 2014년 5월,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려온 정례 수요집회에 참가했다. 이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과해 주목받았다.

그는 저서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를 통해, 일본 내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을 경고하는 등 평화운동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조용한 추도식 ... 한국 지식인·시민단체 애도 잇따라


이토 교수는 지난해 11월 서거했지만, 임종 소식은 뒤늦게 알려졌다. 일본 언론은 침묵했고, 극소수 지인들에게만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서거 100일 추도식'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행사 장소를 관할하는 관계자라고 신분을 밝힌 일본인이 이례적으로 KBS 촬영팀에게 구체적 장소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이토 교수는 사후에도 일본 사회에서 감당하기 쉽기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날 추도식에는 고인의 삶을 기억하는 한일 양국의 지식인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우리나라의 한승헌 변호사(前감사원장, 前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 대표)와 오재일 전남대 명예교수(前 5·18기념재단 이사장),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前 노동부 장관) 등도 먼길을 찾아와 추모의 뜻을 함께 했다.

추도사를 하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
또,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 이희호 여사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이희자 태평양 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그리고 황석영 작가 등은 미리 추도사를 보내왔다.

日우익 주류 사회의 거대한 편견에 도전한 삶

이희호 여사와 만난 이토 교수(추도모임 제공)
이희호 여사는 한승헌 변호사가 대신 읽은 추도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성원을 잊을 수 없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 운동이 양국 시민단체의 교류 와 연대로 발전해, 민주화와 인권문제 전반까지 분야를 넓혔다'고 평가했다.

특히 고인인 일본의 평화헌법 지키기에 앞장섰음을 상기시키며 이러한 노력이 면면히 계승되기를 기원했다.


불행하게도, 아베 총리가 이끄는 보수 우익정권은 이토 교수의 염원과는 반대되는 길로 치달아 왔다. 옛 군국주의 정권의 역사적 과오와 반인도적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 철저히 부정하면서, '전쟁 가능 국가'로의 공식 회귀를 위한 개헌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보수 우익세력이 날로 목소리를 높여가는 지금, 일본내 양심적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이토 나리히코 교수의 빈자리가 더욱 커보인다. 추도회에 참석한 동료와 후학들은 일본 주류사회의 거대한 편견에 맞서 이토 교수의 유지를 반드시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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