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미투의 심리학’…평생 가는 성폭력 고통 “망각도 없다”

입력 2018.03.07 (11:01) 수정 2018.03.0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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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10년 지나도 생생한 성폭력 고통…“진정한 용서는 징벌”

[취재후] 10년 지나도 생생한 성폭력 고통…“진정한 용서는 징벌”

사회 각계각층에서 성폭력 경험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봇물입니다. 가해자가 속칭 '거물급'이어서 큰 파장이 예상되는 경우는 직접 방송 출연을 하거나 기자회견도 열지만, 대부분 피해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긴 침묵을 깨고 고백에 나서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과거를 처음으로 털어놓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90년대 부산 ㄱ소극장..."
"10년도 전의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SNS에 올라오는 미투 관련 글을 보면 1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들도 제법 많이 보입니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장소와 상황에 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피해자들의 기억은 왜 이렇게 생생한 걸까요?

성폭력 관련된 '감정 기억'…. 평생 긴장과 불안 유발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의 기억은 크게 사건 기억과 감정 기억으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사건 기억은 말 그대로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됐다'와 같은 팩트에 관련된 기억입니다. 그런데 올림픽 탁구 종목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느꼈던 환호는 감정과 연관된 기억으로 우리 뇌에 저장되지요.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기억은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는 이렇게 사건 기억과 감정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덜 중요한 기억은 지워지게 됩니다. 컴퓨터 메모리가 꽉 찼을 때 용량 정리를 하듯 사건 기억은 시간의 역순으로 사라지게 되죠. 하지만 공포나 불안, 분노 같은 감정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장기 보존됩니다. 생존과 관련 있기 때문인데요. 특히 성폭력 경험은 자존감을 뒤흔들고 모멸감도 느끼게 하므로 뇌의 편도체에 남아 평생 긴장과 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은 연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미투 고백을 하는 분들을 보면 고백을 해야 할 만큼 오래도록 반복적으로 고통이 떠오르고 생생한 채 유지됐다"고 볼 수 있는데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그 기억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가해자는 쉽게 잊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미지 출처: Sara Wong / The Atlantic이미지 출처: Sara Wong / The Atlantic


소셜 미디어, 트라우마 폭로의 '플랫폼'으로

미투 운동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저희 같은 언론이 아니라 소셜 미디어였습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쏟아낼 수 있는 SNS를 통해 입을 열었습니다. 리트윗과 공유를 통해 엄청난 공감과 파문을 불러온 이후에 언론이 받아쓰는 형국이 됐습니다. 하지현 교수는 "SNS의 장점은 필터링 되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가 그대로 전달될 수 있고 공감과 공유를 통해 무한히 전파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얼굴을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 피해자들은 오프라인보다 용기를 낼 수 있었고요.

방송사에 제보했을 경우 어땠을까요? 1시간 넘게 인터뷰해도 뉴스에는 고작 10초 정도 나올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일부만 편집될 수 있고 왜곡이나 오해의 소지도 생길 수 있겠죠. 물론 안 그런 언론사도 있겠지만, 일반적일 때를 가정해보면 그렇습니다. 심지어 데스크가 갑자기 취재를 중단하라고 하거나 메인 뉴스에서 빠져버려 힘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SNS는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성폭력 폭로를 위한 '다이렉트 플랫폼'으로 떠올랐습니다. 이은 교수는 "평생 가슴에 묻고 산 이야기를 SNS에 털어놓고 공감을 경험하는 과정 자체에도 치유 효과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나만 피해자가 아니구나' '유명인사도 저런데 나도 용기 내보자!'라는 연쇄 고백을 불러오게 됐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경험 고백으로 국내에서도 미투 운동이 봇물을 이루게 됐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경험 고백으로 국내에서도 미투 운동이 봇물을 이루게 됐다.


"인제 와서 폭로라니, 꽃뱀 아니야?"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반응 중에는 인제 와서 왜 그러냐는 질문이 많습니다. 피해를 봤을 때 신고를 하건 형사 고발을 하건 했어야지 시간이 한참 지나 유명인이 된 가해자를 음해하려는 의도로 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난 전문의의 말은 달랐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처음부터 분노나 억울함을 느끼기보다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하는 혼란 감이 먼저 찾아왔어요. 길든 짧든 그 시간이 존재했고요. 이후에는 내가 그때 화를 냈어야 했는데, 항의해야 했는데…. 이런 자책감과 왜 그렇게 일을 처리했을까 하는 후회와 자학이 뒤따릅니다.

또 성폭력 문제로 끙끙 앓고 지내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상대에 대한 분노보다 먼저 피해자를 괴롭히게 되는데요. 가해자를 처벌하는 등 문제 해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찾아오더라고요. 성폭력 피해자 중에 처음부터 신속하게 이성적인 대응에 나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이은 교수는 인제 와서 폭로가 이뤄지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사회 분위기가 성희롱이나 추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했다면 어떨까요? 그러는 사이 상대를 처벌할 공소시효가 지나버리고 어렵게 고백을 해도 발뺌까지 하면 마음의 내상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일 수도 있고 정당한 처벌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치유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와 망각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폭력 기억은 사건 기억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지워지지 않고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 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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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미투의 심리학’…평생 가는 성폭력 고통 “망각도 없다”
    • 입력 2018-03-07 11:01:35
    • 수정2018-03-07 14:11:18
    취재후·사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성폭력 경험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봇물입니다. 가해자가 속칭 '거물급'이어서 큰 파장이 예상되는 경우는 직접 방송 출연을 하거나 기자회견도 열지만, 대부분 피해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긴 침묵을 깨고 고백에 나서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과거를 처음으로 털어놓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90년대 부산 ㄱ소극장..."
"10년도 전의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SNS에 올라오는 미투 관련 글을 보면 1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들도 제법 많이 보입니다.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장소와 상황에 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피해자들의 기억은 왜 이렇게 생생한 걸까요?

성폭력 관련된 '감정 기억'…. 평생 긴장과 불안 유발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의 기억은 크게 사건 기억과 감정 기억으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사건 기억은 말 그대로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됐다'와 같은 팩트에 관련된 기억입니다. 그런데 올림픽 탁구 종목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느꼈던 환호는 감정과 연관된 기억으로 우리 뇌에 저장되지요.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기억은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는 이렇게 사건 기억과 감정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덜 중요한 기억은 지워지게 됩니다. 컴퓨터 메모리가 꽉 찼을 때 용량 정리를 하듯 사건 기억은 시간의 역순으로 사라지게 되죠. 하지만 공포나 불안, 분노 같은 감정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장기 보존됩니다. 생존과 관련 있기 때문인데요. 특히 성폭력 경험은 자존감을 뒤흔들고 모멸감도 느끼게 하므로 뇌의 편도체에 남아 평생 긴장과 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은 연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미투 고백을 하는 분들을 보면 고백을 해야 할 만큼 오래도록 반복적으로 고통이 떠오르고 생생한 채 유지됐다"고 볼 수 있는데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그 기억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가해자는 쉽게 잊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미지 출처: Sara Wong / The Atlantic

소셜 미디어, 트라우마 폭로의 '플랫폼'으로

미투 운동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저희 같은 언론이 아니라 소셜 미디어였습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쏟아낼 수 있는 SNS를 통해 입을 열었습니다. 리트윗과 공유를 통해 엄청난 공감과 파문을 불러온 이후에 언론이 받아쓰는 형국이 됐습니다. 하지현 교수는 "SNS의 장점은 필터링 되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가 그대로 전달될 수 있고 공감과 공유를 통해 무한히 전파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얼굴을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 피해자들은 오프라인보다 용기를 낼 수 있었고요.

방송사에 제보했을 경우 어땠을까요? 1시간 넘게 인터뷰해도 뉴스에는 고작 10초 정도 나올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일부만 편집될 수 있고 왜곡이나 오해의 소지도 생길 수 있겠죠. 물론 안 그런 언론사도 있겠지만, 일반적일 때를 가정해보면 그렇습니다. 심지어 데스크가 갑자기 취재를 중단하라고 하거나 메인 뉴스에서 빠져버려 힘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SNS는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성폭력 폭로를 위한 '다이렉트 플랫폼'으로 떠올랐습니다. 이은 교수는 "평생 가슴에 묻고 산 이야기를 SNS에 털어놓고 공감을 경험하는 과정 자체에도 치유 효과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나만 피해자가 아니구나' '유명인사도 저런데 나도 용기 내보자!'라는 연쇄 고백을 불러오게 됐습니다.

서지현 검사의 성폭력 경험 고백으로 국내에서도 미투 운동이 봇물을 이루게 됐다.

"인제 와서 폭로라니, 꽃뱀 아니야?"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반응 중에는 인제 와서 왜 그러냐는 질문이 많습니다. 피해를 봤을 때 신고를 하건 형사 고발을 하건 했어야지 시간이 한참 지나 유명인이 된 가해자를 음해하려는 의도로 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난 전문의의 말은 달랐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처음부터 분노나 억울함을 느끼기보다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하는 혼란 감이 먼저 찾아왔어요. 길든 짧든 그 시간이 존재했고요. 이후에는 내가 그때 화를 냈어야 했는데, 항의해야 했는데…. 이런 자책감과 왜 그렇게 일을 처리했을까 하는 후회와 자학이 뒤따릅니다.

또 성폭력 문제로 끙끙 앓고 지내는 자신에 대한 분노가 상대에 대한 분노보다 먼저 피해자를 괴롭히게 되는데요. 가해자를 처벌하는 등 문제 해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찾아오더라고요. 성폭력 피해자 중에 처음부터 신속하게 이성적인 대응에 나서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이은 교수는 인제 와서 폭로가 이뤄지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사회 분위기가 성희롱이나 추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했다면 어떨까요? 그러는 사이 상대를 처벌할 공소시효가 지나버리고 어렵게 고백을 해도 발뺌까지 하면 마음의 내상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일 수도 있고 정당한 처벌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치유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와 망각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폭력 기억은 사건 기억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지워지지 않고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 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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