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1987’ 부산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들의 절규

입력 2018.04.17 (17:27) 수정 2018.04.1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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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1987’ 부산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들의 절규

‘또하나의 1987’ 부산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들의 절규

1960년대 문을 연 형제복지원은 문제가 불거진 1987년 3,164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불법감금과 강제노역 등으로 1987년까지 사망자는 513명에 달했다. 최악의 인권유린 사건으로 기록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최근 검찰 과거사위원회에서 진상 규명이 필요한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선정됐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은 수십년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의 악몽과 싸우며 진실 규명을 원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60여 일째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생존피해자 한종선(42), 최승우(49), 박순이(48) 씨를 만났다.


◆ 아버지 손에, 경찰 손에 끌려간 형제복지원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작은 누나랑 저랑 아버지가 (파출소에) 갔는데 아버지가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라 하면서 나갔는데, 파출소 앞으로 형제복지원 차가 왔죠. (복지원에 들어간 첫날) 소대장이 하는 말이 여기는 다 너 같은 아이들이 들어오는 데니까 너만 특별하다는 생각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다독여줬어요."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가방을 메고, 그때 당시에 개성중학교 모자 쓰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너 이 xx 이리 와봐. 담배 피우는 순경이.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불과 한 2~30분 지났을까. (부랑인들을 실어 가는) 냉동 탑차 형태의 차가 옵니다. 완장을 끼고 두 사람이 들어오고 파출소 그때 그 순경하고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장부에다가 뭔가 적더라고요. 제가 그 건장한 남자들 둘한테 끌려서 나갔죠. 동네 사람이라고, 이 근처 산다고, 집에 가는 길인데 왜 나를 잡아가느냐. 막 거기에서 울고불고 집에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죠."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어머니, 아버지가 장사하시니까 오빠 집에 가서 며칠 놀고 오라 해서 진주역에서 기차를 탔어요. 역 앞에 나와서 쪼그려 앉아있는데 순경 두 분이 와서 꼬마야 너 왜 거기 앉아 있느냐고 해서 오빠 기다린다고 했더니 오빠 자기들이 오면 데려다 줄 테니까 파출소, 그때는 지서라고 했죠, 지서로 가자는 한 거죠."

"파출소 앉아 있었는데 깜빡 졸았던가 봐요. 눈을 떴는데 옆에 사람들이 우글우글했어요. 한 열댓 명이 옆에 앉아 있는데 노숙자 같은 사람도 있고, 어린애도 있고. 사람이 많고 해서 너무 놀랐던 가봐요. 너 이름 뭐야 했는데, 그냥 얼떨결에 하안녕이에요. 그렇게 하안녕이라는 이름을 갖고 6년을 그 속에서 살았어요."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한종선 씨가 형제복지원 실상을 그린 그림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한종선 씨가 형제복지원 실상을 그린 그림

◆ '형기 없는 감옥' 형제복지원, 참혹한 그 실상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힘든 부분은 대부분이 구타나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조장이 오래간만에 비도 오는데 타작 한번 하자 이렇게 하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평소보다 더 많이 맞고, 평소보다 기합도 더 세고 그렇죠."

"한번은 (한겨울에) 세면장에 끌려가서 두들겨 맞다가 계속 울고불고하니까 손발 묶어놓고 찬물을 계속 끼얹는 거죠. 옷 다 벗겨 놓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 트라우마라서 그거는. 나도 찬물로 샤워하고 싶죠. 등목하고 싶죠. 근데 찬물이 몸에 딱 닿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은데요, 일단."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별명이 있었어요. 형제복지원 안에서 '통띠 1번'이 있었고, '2번'이 있었어요. 근데 통띠라는 게 뭐냐면 예쁘장해 놓으니까 소대장들한테 그냥 성폭행을 당하는, 동성 간 성폭행을 당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때 제 별명이 '통띠1번'이었고, 남자들한테 윤간을 당했어요, 수년 동안. 그니까 그만큼 제가 힘들었죠. 죽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을 보낸 거죠."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2층 침대 꼭대기에 발을 걸쳐서 한 다섯 시간 동안 거꾸로 매달렸어요. 그래서 거기서 떨어지면 이불 덮어서 밟아버리고, 왜 나중에 누가 때렸는지 알면 보복할까 봐 이불을 덮고 사람들이 밟는 거죠. 내가 잘해도 옆에 사람 잘못하면 또 두드려 맞고…. 엄마! 이렇게 어깨를 쳐도 민감해요. 살짝 부딪히는 것도. 그래서 엘리베이터 같은 것도 트라우마가 있죠. 누군가 부딪히면 아프진 않은데, 형제복지원 생각이 떠올라서…."


◆ 죽음을 각오하고 … 형제복지원에서 나오다!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6명이 결성해서 쇠톱을 구해서 창살 하나 끊는데 한 보름 걸렸어요. 서무를 하지 않으면 도망을 갈 수가 없어요. 서무가 철장 검사를 하거든요. 제가 서무를 할 때 도망치기로 한 거죠. 제가 제일 먼저 나가서 밑에서 밧줄처럼 만든 이불을 잡고 타고 다 내려왔어요. 근데 담에 유리가 박혀 있었는데, 손이 딱 걸렸어요. 쭉 밀리니까 피가 줄줄 나고…."

"도망쳐서 3일인가 진주로 갈 돈을 모았죠. 주방설거지 하는 사람 구하더라고요. 그 돈을 갖고 내려오게 된 거죠. 내려왔는데 아버지께서 그때 도토리묵 먹고 있다가 기절하셨어요. 3년 동안 찾다가 실종 신고한 딸이 살아 돌아왔으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87년도 때 형제복지원 본원이 엄청나게 시끄러웠어요. 박 원장 구속된다더라. 저는 수녀님을 따라가게 됐는데, 그때 수녀님한테 여기 아버지랑 누나도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지금 상황이 매우 급하니까 일단 너부터 일단 타라 아버지랑 누나는 나중에 찾자 된 거죠."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87년도 그때 사건이 터지고 나서 형제복지원에 있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나오게 됐죠. 그때 (집에 가니까) 할머니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데 라고 하면서 막 거기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할머니가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그 파출소 가서 실종 신고를 했는데 그 파출소에서 잡아놨으니 어떻게 실종 신고가 됐겠습니까."

◆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사회 나와서 이력서 내고 취직하기가 되게 어려워요. 기본적으로 힘은 있고 체력은 있고 하니까 무식하게 힘쓰는 일만 할 수밖에 없잖아요. 젊은 나이에 돈을 좀 더 주는 데라면 힘이라도 써야 하니까 그런 곳에서 일을 많이 했었죠. 한 번 해보자 하다가 허리를 다쳤죠.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땐 자살할 생각을 했었고, 근데 때마침 신문고에서 답변이 온 게 동사무소 가서 기초 생활 수급자 신청하라 해서 했죠."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사춘기 나이 때 사람 죽는 거 보고 그 폭행을 당하고 얼차려를 받고 이러다 보니까, 사회 적응이 안 됐다 보니까 계속 폭력적으로 살아지더라고요. 여자친구를 만나서 사귀고 있는 과정에서 그니까 장모님이죠, 어머님이 형제복지원 출신이라고 못 만나게 했었어요. 근데 여자친구를 데리고 가서 머리를 삭발시키고 저런 부랑인, 거지 같은 놈들하고 왜 사귀느냐고 하고 그 친구가 결국 죽었죠. 자살하게 됐어요."

"동생도 같이 귀가하고 나서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어요. '형,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 잘못 태어난 것 같아!' 그 말할 때 그때 정말 제가 죽을 만큼 힘들었죠. '그럼 우리 어떻게 할까. 대우야!' '어떻게 하기는! 나는 죽고 싶다.' 이야기를 했고, 그게 동생의 마지막 유언이었죠."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저녁만 되면 그때 악몽에 시달리니까 술 한 잔 먹고 자고 그니까 한 달에 20일은 술을 먹어요. 안 먹으면 잠을 못 자니까. 꿈을 안 꾸기 위해서, 그 대신 밖에서는 안 먹었어요. 그래도 꿈을 꾸면 고함 지르면서 일어나고. 벽을 보고 못 자요. 뒤에서 목덜미를 잡는 것 같아요."

◆ 30년이 더 지난 사건? 생존 피해자들에겐 삶이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아버지랑 누나가 정신병원에 있어요. 지금도. 매달 면회를 가고 있는데 저의 최종 목적지는 아버지랑 누나랑 지금이라도 한집에서 사는 게 저의 소망이에요. 어렸을 때 빼앗겼었던 거니까. 내 욕심을 위해서라도 살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최소한. 그리고 국가가 사회정화사업 한 부분에 대해서 인권유린을 한 책임을 지고 국가는 사과해야 한다는 거고요."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국가로 인해서 내 가족 모두가 풍비박산이 나 버렸는데, 내가 죽어버리면 그들한테 오히려 그냥 더 국가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그 아픈 과거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학생이었던 제가 (형제복지원에) 들어감으로 인해서 부랑인아가 되어버리고, 사회에 나가 부랑인아 같이 살아버렸잖아요. 누구도 손을 잡아주지 않아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국가는 진상규명을 하고 거기에 합당한 명예회복, 그리고 피해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아픔이 그대로 있고 항상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있는데 이게 공소시효가 필요한가요? 산 사람들이잖아요. 산 증인들이 있는데 어떻게 공소시효가 그렇게 중요해요? 그때 잡혀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지는 장담을 못 하겠지만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마쳤겠죠. 누군가에게 장문의 편지는 못 쓰더라도 우리 아이들한테 A, B, C, D 라도 알려줄 수 있는 수준은 됐겠죠."


한종선 씨는 2012년 광화문 1인 시위를 시작으로 현재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의사가 꿈이었던 최승우 씨는 현재 영어 공부 중이다. 국내외 많은 사람에게 형제복지원 사건과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는 꿈 때문이다. 박순이 씨는 최근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쳤다.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했다. 생존피해자로서 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30년 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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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하나의 1987’ 부산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들의 절규
    • 입력 2018-04-17 17:27:05
    • 수정2018-04-17 18:11:43
    취재K
1960년대 문을 연 형제복지원은 문제가 불거진 1987년 3,164명을 수용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불법감금과 강제노역 등으로 1987년까지 사망자는 513명에 달했다. 최악의 인권유린 사건으로 기록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최근 검찰 과거사위원회에서 진상 규명이 필요한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선정됐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은 수십년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의 악몽과 싸우며 진실 규명을 원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60여 일째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는 생존피해자 한종선(42), 최승우(49), 박순이(48) 씨를 만났다.


◆ 아버지 손에, 경찰 손에 끌려간 형제복지원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작은 누나랑 저랑 아버지가 (파출소에) 갔는데 아버지가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라 하면서 나갔는데, 파출소 앞으로 형제복지원 차가 왔죠. (복지원에 들어간 첫날) 소대장이 하는 말이 여기는 다 너 같은 아이들이 들어오는 데니까 너만 특별하다는 생각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다독여줬어요."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가방을 메고, 그때 당시에 개성중학교 모자 쓰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너 이 xx 이리 와봐. 담배 피우는 순경이.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불과 한 2~30분 지났을까. (부랑인들을 실어 가는) 냉동 탑차 형태의 차가 옵니다. 완장을 끼고 두 사람이 들어오고 파출소 그때 그 순경하고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장부에다가 뭔가 적더라고요. 제가 그 건장한 남자들 둘한테 끌려서 나갔죠. 동네 사람이라고, 이 근처 산다고, 집에 가는 길인데 왜 나를 잡아가느냐. 막 거기에서 울고불고 집에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죠."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어머니, 아버지가 장사하시니까 오빠 집에 가서 며칠 놀고 오라 해서 진주역에서 기차를 탔어요. 역 앞에 나와서 쪼그려 앉아있는데 순경 두 분이 와서 꼬마야 너 왜 거기 앉아 있느냐고 해서 오빠 기다린다고 했더니 오빠 자기들이 오면 데려다 줄 테니까 파출소, 그때는 지서라고 했죠, 지서로 가자는 한 거죠."

"파출소 앉아 있었는데 깜빡 졸았던가 봐요. 눈을 떴는데 옆에 사람들이 우글우글했어요. 한 열댓 명이 옆에 앉아 있는데 노숙자 같은 사람도 있고, 어린애도 있고. 사람이 많고 해서 너무 놀랐던 가봐요. 너 이름 뭐야 했는데, 그냥 얼떨결에 하안녕이에요. 그렇게 하안녕이라는 이름을 갖고 6년을 그 속에서 살았어요."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한종선 씨가 형제복지원 실상을 그린 그림
◆ '형기 없는 감옥' 형제복지원, 참혹한 그 실상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힘든 부분은 대부분이 구타나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조장이 오래간만에 비도 오는데 타작 한번 하자 이렇게 하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평소보다 더 많이 맞고, 평소보다 기합도 더 세고 그렇죠."

"한번은 (한겨울에) 세면장에 끌려가서 두들겨 맞다가 계속 울고불고하니까 손발 묶어놓고 찬물을 계속 끼얹는 거죠. 옷 다 벗겨 놓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 트라우마라서 그거는. 나도 찬물로 샤워하고 싶죠. 등목하고 싶죠. 근데 찬물이 몸에 딱 닿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은데요, 일단."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별명이 있었어요. 형제복지원 안에서 '통띠 1번'이 있었고, '2번'이 있었어요. 근데 통띠라는 게 뭐냐면 예쁘장해 놓으니까 소대장들한테 그냥 성폭행을 당하는, 동성 간 성폭행을 당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때 제 별명이 '통띠1번'이었고, 남자들한테 윤간을 당했어요, 수년 동안. 그니까 그만큼 제가 힘들었죠. 죽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을 보낸 거죠."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2층 침대 꼭대기에 발을 걸쳐서 한 다섯 시간 동안 거꾸로 매달렸어요. 그래서 거기서 떨어지면 이불 덮어서 밟아버리고, 왜 나중에 누가 때렸는지 알면 보복할까 봐 이불을 덮고 사람들이 밟는 거죠. 내가 잘해도 옆에 사람 잘못하면 또 두드려 맞고…. 엄마! 이렇게 어깨를 쳐도 민감해요. 살짝 부딪히는 것도. 그래서 엘리베이터 같은 것도 트라우마가 있죠. 누군가 부딪히면 아프진 않은데, 형제복지원 생각이 떠올라서…."


◆ 죽음을 각오하고 … 형제복지원에서 나오다!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6명이 결성해서 쇠톱을 구해서 창살 하나 끊는데 한 보름 걸렸어요. 서무를 하지 않으면 도망을 갈 수가 없어요. 서무가 철장 검사를 하거든요. 제가 서무를 할 때 도망치기로 한 거죠. 제가 제일 먼저 나가서 밑에서 밧줄처럼 만든 이불을 잡고 타고 다 내려왔어요. 근데 담에 유리가 박혀 있었는데, 손이 딱 걸렸어요. 쭉 밀리니까 피가 줄줄 나고…."

"도망쳐서 3일인가 진주로 갈 돈을 모았죠. 주방설거지 하는 사람 구하더라고요. 그 돈을 갖고 내려오게 된 거죠. 내려왔는데 아버지께서 그때 도토리묵 먹고 있다가 기절하셨어요. 3년 동안 찾다가 실종 신고한 딸이 살아 돌아왔으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87년도 때 형제복지원 본원이 엄청나게 시끄러웠어요. 박 원장 구속된다더라. 저는 수녀님을 따라가게 됐는데, 그때 수녀님한테 여기 아버지랑 누나도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지금 상황이 매우 급하니까 일단 너부터 일단 타라 아버지랑 누나는 나중에 찾자 된 거죠."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87년도 그때 사건이 터지고 나서 형제복지원에 있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나오게 됐죠. 그때 (집에 가니까) 할머니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데 라고 하면서 막 거기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할머니가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그 파출소 가서 실종 신고를 했는데 그 파출소에서 잡아놨으니 어떻게 실종 신고가 됐겠습니까."

◆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사회 나와서 이력서 내고 취직하기가 되게 어려워요. 기본적으로 힘은 있고 체력은 있고 하니까 무식하게 힘쓰는 일만 할 수밖에 없잖아요. 젊은 나이에 돈을 좀 더 주는 데라면 힘이라도 써야 하니까 그런 곳에서 일을 많이 했었죠. 한 번 해보자 하다가 허리를 다쳤죠.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땐 자살할 생각을 했었고, 근데 때마침 신문고에서 답변이 온 게 동사무소 가서 기초 생활 수급자 신청하라 해서 했죠."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사춘기 나이 때 사람 죽는 거 보고 그 폭행을 당하고 얼차려를 받고 이러다 보니까, 사회 적응이 안 됐다 보니까 계속 폭력적으로 살아지더라고요. 여자친구를 만나서 사귀고 있는 과정에서 그니까 장모님이죠, 어머님이 형제복지원 출신이라고 못 만나게 했었어요. 근데 여자친구를 데리고 가서 머리를 삭발시키고 저런 부랑인, 거지 같은 놈들하고 왜 사귀느냐고 하고 그 친구가 결국 죽었죠. 자살하게 됐어요."

"동생도 같이 귀가하고 나서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어요. '형,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 잘못 태어난 것 같아!' 그 말할 때 그때 정말 제가 죽을 만큼 힘들었죠. '그럼 우리 어떻게 할까. 대우야!' '어떻게 하기는! 나는 죽고 싶다.' 이야기를 했고, 그게 동생의 마지막 유언이었죠."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저녁만 되면 그때 악몽에 시달리니까 술 한 잔 먹고 자고 그니까 한 달에 20일은 술을 먹어요. 안 먹으면 잠을 못 자니까. 꿈을 안 꾸기 위해서, 그 대신 밖에서는 안 먹었어요. 그래도 꿈을 꾸면 고함 지르면서 일어나고. 벽을 보고 못 자요. 뒤에서 목덜미를 잡는 것 같아요."

◆ 30년이 더 지난 사건? 생존 피해자들에겐 삶이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아버지랑 누나가 정신병원에 있어요. 지금도. 매달 면회를 가고 있는데 저의 최종 목적지는 아버지랑 누나랑 지금이라도 한집에서 사는 게 저의 소망이에요. 어렸을 때 빼앗겼었던 거니까. 내 욕심을 위해서라도 살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최소한. 그리고 국가가 사회정화사업 한 부분에 대해서 인권유린을 한 책임을 지고 국가는 사과해야 한다는 거고요."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국가로 인해서 내 가족 모두가 풍비박산이 나 버렸는데, 내가 죽어버리면 그들한테 오히려 그냥 더 국가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그 아픈 과거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학생이었던 제가 (형제복지원에) 들어감으로 인해서 부랑인아가 되어버리고, 사회에 나가 부랑인아 같이 살아버렸잖아요. 누구도 손을 잡아주지 않아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국가는 진상규명을 하고 거기에 합당한 명예회복, 그리고 피해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박순이/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아픔이 그대로 있고 항상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있는데 이게 공소시효가 필요한가요? 산 사람들이잖아요. 산 증인들이 있는데 어떻게 공소시효가 그렇게 중요해요? 그때 잡혀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지는 장담을 못 하겠지만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마쳤겠죠. 누군가에게 장문의 편지는 못 쓰더라도 우리 아이들한테 A, B, C, D 라도 알려줄 수 있는 수준은 됐겠죠."


한종선 씨는 2012년 광화문 1인 시위를 시작으로 현재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의사가 꿈이었던 최승우 씨는 현재 영어 공부 중이다. 국내외 많은 사람에게 형제복지원 사건과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는 꿈 때문이다. 박순이 씨는 최근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쳤다.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했다. 생존피해자로서 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30년 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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