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남북·북미회담 앞둔 김정은의 ‘북중관계’ 활용법

입력 2018.04.18 (09:46) 수정 2018.04.1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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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관람하는 김정은 위원장과 쑹타오 중공 대외연락부장 (동평양대극장 4.16)중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관람하는 김정은 위원장과 쑹타오 중공 대외연락부장 (동평양대극장 4.16)

1. 지난해 만나주지도 않더니... 쑹타오에 극진한 접대


쑹타오((宋涛)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대표로 한 중국 예술단이 16일 북한 동평양 대극장에서 발레극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을 공연했다. 1930년대 중국내 여성 공산주의 운동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홍색낭자군'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선전성 짙은 공연이다. 이 자리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참석했다.

동평양 대극장은 4월 1일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 '봄이 온다'가 열린 바로 그 극장이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2층 객석에서 관람했지만, 이번 중국예술단 공연에는 1층 객석 맨 앞 줄에 앉아 바로 옆 쑹타오 부장과 얘기를 나누며 공연을 봤다. 김정은은 쑹타오 일행이 평양에 온 이튿날인 14일에도 접견을 했다.

쑹 부장은 현재 중국 공산당의 권력서열로 26위 ~ 204위권인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다. 지난해엔 시진핑 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19차 당대회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주의권 나라들을 순방하고 다녔다지만, 이번엔 특사 자격도 아니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쑹타오가 시 주석의 특사로 방문했음에도 만나주지 않더니, 지난달 북중정상회담 이후 태도가 180도로 바뀌었다. 이번 방북 기간에 사흘이나 만났다.

대접과 예우도 극진했다. 북한 노동당의 외교 담당 부위원장인 리수용이 14일 쑹 부장과 만나 회담을 했고,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열린 중국 예술단의 첫 공연에는 리설주와 최룡해, 김영철, 리수용 등 김정은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저녁엔 성대한 연회도 열어 예술단을 열렬히 환영했다.

사실 중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기념한 '제31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참가의 일환이었지만, 북한 '로동신문' 등 주요 매체에서 다른 나라의 예술단 공연 소식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직 중국 예술단 관련 소식 일색이다.

2. 냉탕과 온탕을 오간 북중관계

중국인 학자로서 몇 안 되는 북중관계 전문가인 션즈화(沈志華) 상하이 화동사범대 교수는 북중관계가 결코 '혈맹'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실상은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오갔고, 내부적으로 심각한 대립과 불화가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가령, 1956년 김일성이 북한내 친중 연안파를 숙청한 8월 종파사건 당시나,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76) 초기에 극좌적 외교노선을 걸으며 북한을 수정주의로 비판하던 시기도 그랬고, 심지어 6.25전쟁 때도 중공군이 북한군을 도왔지만, 북중 연합군 내부엔 지휘권이나 전쟁목표 등을 놓고 북중 군 지도부가 사사건건 충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북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손을 맞잡고 '전통우의'를 과시한다.

지난달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손을 맞잡았을 때도 그랬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를 위한 결의 2397호에 찬성표를 던지며, 북한의 생명줄로 통하는 원유공급 제한도 주저없이 밀어부치던 중국이었다.

'칼로 물베기'라는 부부싸움처럼, 서로 얼굴을 붉히며 대립각을 세우다가도 돌아서면 철썩 붙게 만드는 북중관계의 자력은 어디서 오는가?

3. 필요에 의한 '관계회복'

악화일로이던 북중관계가 하루 아침에 둘도 없는 단짝으로 변한 과거 사례 가운데, 대표적으로 마오쩌둥과 김일성 집권 시절인 1960년대 말의 상황을 보자.

북한은 이 해 특수부대를 투입해 서울의 청와대를 습격하고, 원산항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이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구축함을 출동시켰다. 이듬해인 1969년에도 북한은 미국의 전자정찰기 EC-121를 격추시켜 승무원 31명이 전원 사망했다. 미국은 대규모 해군 함대를 동해안으로 진입시켰고, 북한에 대해 전술 핵무기 사용계획까지 검토했다.

중국쪽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1969년 중소 국경인 진보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소련은 극동지역으로 대규모 군대를 이동시켰고, 중국도 전국에 '전투준비' 동원령을 내렸다.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는 극한 긴장상태로 치달았던 시기였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을 놓고, 북중 양국은 국가안보에 관한 공동의 수요에 의해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김일성은 1970년 10월 베이징을 비공식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났다. 6년 만이었다. 이후 중국은 7억 위안이 넘는 무상차관을 북한에 제공했고, 군사원조 협정도 맺었다. 몇 년간 서로에 관한 기사를 거의 싣지 않던 관영 매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우호적 보도를 쏟아냈다.

할아버지 김일성 때와 아버지 김정일 때의 북중관계 활용사를 모를 리 없는 김정은이 지금 취하고 있는 중국과의 연대는 다분히 '필요'에 의한 조치로 풀이된다. 외교적 고립으로 우군이 절실한 상황에서, 남측과 미국과의 '세기의 담판'을 앞둔 터에 중국만한 파트너는 없다.

다만, 이것으로 '피를 나눈 동맹'을 뜻하는 '혈맹'의 관계를 회복했다는 해석은 무리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중국은 이미 1954년부터 4년간 북한에 주둔중이던 100만 명 넘는 중국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실질적인 군사적 보장이 없이, 성대한 연회와 극진한 대접만으로 '혈맹'으로 부르긴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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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18 09:46:51
    • 수정2018-04-18 09: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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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관람하는 김정은 위원장과 쑹타오 중공 대외연락부장 (동평양대극장 4.16)
1. 지난해 만나주지도 않더니... 쑹타오에 극진한 접대


쑹타오((宋涛)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대표로 한 중국 예술단이 16일 북한 동평양 대극장에서 발레극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을 공연했다. 1930년대 중국내 여성 공산주의 운동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홍색낭자군'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선전성 짙은 공연이다. 이 자리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부인 리설주와 함께 참석했다.

동평양 대극장은 4월 1일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 '봄이 온다'가 열린 바로 그 극장이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2층 객석에서 관람했지만, 이번 중국예술단 공연에는 1층 객석 맨 앞 줄에 앉아 바로 옆 쑹타오 부장과 얘기를 나누며 공연을 봤다. 김정은은 쑹타오 일행이 평양에 온 이튿날인 14일에도 접견을 했다.

쑹 부장은 현재 중국 공산당의 권력서열로 26위 ~ 204위권인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다. 지난해엔 시진핑 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19차 당대회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주의권 나라들을 순방하고 다녔다지만, 이번엔 특사 자격도 아니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쑹타오가 시 주석의 특사로 방문했음에도 만나주지 않더니, 지난달 북중정상회담 이후 태도가 180도로 바뀌었다. 이번 방북 기간에 사흘이나 만났다.

대접과 예우도 극진했다. 북한 노동당의 외교 담당 부위원장인 리수용이 14일 쑹 부장과 만나 회담을 했고,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열린 중국 예술단의 첫 공연에는 리설주와 최룡해, 김영철, 리수용 등 김정은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저녁엔 성대한 연회도 열어 예술단을 열렬히 환영했다.

사실 중국 예술단의 평양 공연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기념한 '제31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참가의 일환이었지만, 북한 '로동신문' 등 주요 매체에서 다른 나라의 예술단 공연 소식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직 중국 예술단 관련 소식 일색이다.

2. 냉탕과 온탕을 오간 북중관계

중국인 학자로서 몇 안 되는 북중관계 전문가인 션즈화(沈志華) 상하이 화동사범대 교수는 북중관계가 결코 '혈맹'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실상은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오갔고, 내부적으로 심각한 대립과 불화가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가령, 1956년 김일성이 북한내 친중 연안파를 숙청한 8월 종파사건 당시나,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76) 초기에 극좌적 외교노선을 걸으며 북한을 수정주의로 비판하던 시기도 그랬고, 심지어 6.25전쟁 때도 중공군이 북한군을 도왔지만, 북중 연합군 내부엔 지휘권이나 전쟁목표 등을 놓고 북중 군 지도부가 사사건건 충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북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손을 맞잡고 '전통우의'를 과시한다.

지난달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손을 맞잡았을 때도 그랬다.

불과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를 위한 결의 2397호에 찬성표를 던지며, 북한의 생명줄로 통하는 원유공급 제한도 주저없이 밀어부치던 중국이었다.

'칼로 물베기'라는 부부싸움처럼, 서로 얼굴을 붉히며 대립각을 세우다가도 돌아서면 철썩 붙게 만드는 북중관계의 자력은 어디서 오는가?

3. 필요에 의한 '관계회복'

악화일로이던 북중관계가 하루 아침에 둘도 없는 단짝으로 변한 과거 사례 가운데, 대표적으로 마오쩌둥과 김일성 집권 시절인 1960년대 말의 상황을 보자.

북한은 이 해 특수부대를 투입해 서울의 청와대를 습격하고, 원산항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이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구축함을 출동시켰다. 이듬해인 1969년에도 북한은 미국의 전자정찰기 EC-121를 격추시켜 승무원 31명이 전원 사망했다. 미국은 대규모 해군 함대를 동해안으로 진입시켰고, 북한에 대해 전술 핵무기 사용계획까지 검토했다.

중국쪽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1969년 중소 국경인 진보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소련은 극동지역으로 대규모 군대를 이동시켰고, 중국도 전국에 '전투준비' 동원령을 내렸다.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는 극한 긴장상태로 치달았던 시기였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을 놓고, 북중 양국은 국가안보에 관한 공동의 수요에 의해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김일성은 1970년 10월 베이징을 비공식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났다. 6년 만이었다. 이후 중국은 7억 위안이 넘는 무상차관을 북한에 제공했고, 군사원조 협정도 맺었다. 몇 년간 서로에 관한 기사를 거의 싣지 않던 관영 매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우호적 보도를 쏟아냈다.

할아버지 김일성 때와 아버지 김정일 때의 북중관계 활용사를 모를 리 없는 김정은이 지금 취하고 있는 중국과의 연대는 다분히 '필요'에 의한 조치로 풀이된다. 외교적 고립으로 우군이 절실한 상황에서, 남측과 미국과의 '세기의 담판'을 앞둔 터에 중국만한 파트너는 없다.

다만, 이것으로 '피를 나눈 동맹'을 뜻하는 '혈맹'의 관계를 회복했다는 해석은 무리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중국은 이미 1954년부터 4년간 북한에 주둔중이던 100만 명 넘는 중국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실질적인 군사적 보장이 없이, 성대한 연회와 극진한 대접만으로 '혈맹'으로 부르긴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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