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세월호 블랙박스① 사고 전 선체는 기울고 있었다

입력 2018.04.18 (16:39) 수정 2018.04.18 (20:2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블랙박스가 단서될 것"

지난 1월 파업 중이던 기자들이 모여 꾸려진 KBS 세월호 특별취재팀에게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관계자가 던진 말입니다. 사고 당시의 장면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니 거기에 단서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선조위도 당시 한창 분석 중이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미 다른 언론을 통해 일부 공개되기도 했지만, 더욱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연관기사][취재후] 세월호 블랙박스② 사고 직후 17초간 알 수 없는 ‘선내 방송’

■모두 제각각인 표시시각을 맞춰라

KBS는 지난 2월 19일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실을 통해서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두 건의 블랙박스까지 입수하면서 본격적인 분석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기존의 보도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 보다 정확한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세월호 2층 C데크에서 복원된 영상들은 선수와 선체 가운데, 선미와 트윈데크까지, 화물칸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복원된 블랙박스 7개 가운데 4개는 후방 카메라도 있어서 모두 11개의 영상이 C데크의 상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시작은 제각각인 블랙박스의 시점을 하나로 묶는, 이른바 동기화 작업이었습니다.


동기화의 첫 번째 기준은 움직임이었습니다. 같은 대상의 같은 움직임을 기준으로 줄을 맞춰 세웠습니다. 별개의 블랙박스에 빨간색 특수 중장비의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고, 화면 구석에 같은 차량의 움직임이 아주 조금 잡히기도 했습니다. 7대의 차량은 움직임을 통해서 조각조각으로 뭉쳤습니다.


움직임으로 묶이지 않는 영상들은 소리를 활용했습니다. KBS의 음향장비를 활용해 분리돼 있던 동기화 그룹 속 영상들에서 같은 소리를 찾아냈습니다. 음역과 소리의 길이,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격 등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영상이 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데 묶인 영상의 시간을 확정하는 작업만 남았습니다. 단서는 사고 전날 오전 인천항으로 향하던 경차의 블랙박스 영상에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라디오 시각고지 멘트였습니다. KBS 라디오의 시각고지 멘트가 나오고 정시를 알리는 알림이 울리는 시점의 화면 표시시각은 10시 11분 3초. 시간 오차는 -11분 3초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이 영상의 표시시간 오차를 바로잡으면서 한데 묶인 나머지 영상들의 잘못된 시간들도 표준시각으로 묶어낼 수 있었습니다.
(동기화, 표준시각화 기법은 선체조사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모두 선조위에 전달됐고, 기존에 선조위가 했던 동기화 오류도 대부분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쇠사슬 영상'의 비밀...급격히 기울었다

동기화 자료를 토대로 2차 분석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영상 속 사소한 움직임에서 선체의 상태를 확인할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단서는 이른바 '쇠사슬 영상'에 있었습니다. 2층 화물칸 앞쪽에 주차된 수입 SUV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 나온 선체 천장에 붙은 쇠사슬이 바로 그겁니다.


사고 전날 찍힌 영상에선 쇠사슬이 수직으로 바닥을 향하는데, 사고 직전 영상에서는 이미 왼쪽으로 기울었던 상태였습니다. 쇠사슬이 기운만큼 배도 기울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영상을 전문 감정 업체에 맡겨 분석해 봤습니다. 분석 결과 영상이 시작되는 오전 8시 49분 35초의 쇠사슬 각도는 18도. 5초 정도 이 각도를 유지하던 쇠사슬은 8시 49분 40초부터 시작해 단 8초 만에 50도까지 꺾였습니다. 선체도 그만큼 빨리 기울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람이 튕겨 나갔다'는 당시 생존자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고 전, 이미 선체는 기울고 있었다

영상들을 정밀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상한 움직임도 발견됐습니다. 바로 트윈데크에 있던 경차 블랙박스의 영상이었습니다.

차량이 급격히 쏠리는 시점으로부터 50초쯤 전인 8시 48분 50초. 언뜻 보기엔 미동조차 없어 보이지만, 영상의 재생 속도를 인위적으로 높여봤더니 차들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인 겁니다. 이 역시 기울기 변화를 들여다봤습니다. 다만, 차량 서스펜션의 영향을 감안해 기울기의 추이만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분석 결과 화면이 미세하게 기울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더니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왼쪽으로 쏠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상적으로 운항하는 상황이었다면 배가 다시 중심을 잡았어야 할 시점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겁니다. 세월호는 직접 사고 시점에 앞서 50초 동안이나 계속해서 기울고 있었다는 게 새롭게 밝혀진 순간입니다.


복수의 전문가에게 자문했더니 배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답변을 돌아왔습니다. 조타기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돌고 있었는데도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거나, 기계 자체에 결함으로 방향타가 계속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기울기가 회복되는 걸 방해하는 어떤 힘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 대해서 정밀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겁니다.

공은 다시 넘어갔다

블랙박스 기계가 회수됐을 때, 선조위 내부에선 복원 시도를 할지 말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유가족 중 한 분은 "억만금을 줘도 그때로 돌아갈 순 없지만, 블랙박스 영상이 복원되면서 그게 가능해졌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중요한 자료가 자칫 빛을 보지 못 할 뻔했던 겁니다.

선체조사위원회가 조만간 이 영상들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분석을 해 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궁금증을 품고 4년째 세월호만 바라보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머지않아 속 시원한 답이 들리길 기대합니다.

[연관기사][뉴스9] 블랙박스에 찍힌 세월호 사고 순간…침몰 직전 무슨 일 있었나?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취재후] 세월호 블랙박스① 사고 전 선체는 기울고 있었다
    • 입력 2018-04-18 16:39:07
    • 수정2018-04-18 20:24:15
    취재후·사건후
"블랙박스가 단서될 것"

지난 1월 파업 중이던 기자들이 모여 꾸려진 KBS 세월호 특별취재팀에게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관계자가 던진 말입니다. 사고 당시의 장면을 담은 유일한 기록이니 거기에 단서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선조위도 당시 한창 분석 중이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미 다른 언론을 통해 일부 공개되기도 했지만, 더욱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연관기사][취재후] 세월호 블랙박스② 사고 직후 17초간 알 수 없는 ‘선내 방송’

■모두 제각각인 표시시각을 맞춰라

KBS는 지난 2월 19일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실을 통해서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두 건의 블랙박스까지 입수하면서 본격적인 분석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기존의 보도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 보다 정확한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세월호 2층 C데크에서 복원된 영상들은 선수와 선체 가운데, 선미와 트윈데크까지, 화물칸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복원된 블랙박스 7개 가운데 4개는 후방 카메라도 있어서 모두 11개의 영상이 C데크의 상황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시작은 제각각인 블랙박스의 시점을 하나로 묶는, 이른바 동기화 작업이었습니다.


동기화의 첫 번째 기준은 움직임이었습니다. 같은 대상의 같은 움직임을 기준으로 줄을 맞춰 세웠습니다. 별개의 블랙박스에 빨간색 특수 중장비의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고, 화면 구석에 같은 차량의 움직임이 아주 조금 잡히기도 했습니다. 7대의 차량은 움직임을 통해서 조각조각으로 뭉쳤습니다.


움직임으로 묶이지 않는 영상들은 소리를 활용했습니다. KBS의 음향장비를 활용해 분리돼 있던 동기화 그룹 속 영상들에서 같은 소리를 찾아냈습니다. 음역과 소리의 길이,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격 등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영상이 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데 묶인 영상의 시간을 확정하는 작업만 남았습니다. 단서는 사고 전날 오전 인천항으로 향하던 경차의 블랙박스 영상에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라디오 시각고지 멘트였습니다. KBS 라디오의 시각고지 멘트가 나오고 정시를 알리는 알림이 울리는 시점의 화면 표시시각은 10시 11분 3초. 시간 오차는 -11분 3초라는 답이 나왔습니다. 이 영상의 표시시간 오차를 바로잡으면서 한데 묶인 나머지 영상들의 잘못된 시간들도 표준시각으로 묶어낼 수 있었습니다.
(동기화, 표준시각화 기법은 선체조사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모두 선조위에 전달됐고, 기존에 선조위가 했던 동기화 오류도 대부분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쇠사슬 영상'의 비밀...급격히 기울었다

동기화 자료를 토대로 2차 분석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영상 속 사소한 움직임에서 선체의 상태를 확인할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단서는 이른바 '쇠사슬 영상'에 있었습니다. 2층 화물칸 앞쪽에 주차된 수입 SUV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 나온 선체 천장에 붙은 쇠사슬이 바로 그겁니다.


사고 전날 찍힌 영상에선 쇠사슬이 수직으로 바닥을 향하는데, 사고 직전 영상에서는 이미 왼쪽으로 기울었던 상태였습니다. 쇠사슬이 기운만큼 배도 기울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영상을 전문 감정 업체에 맡겨 분석해 봤습니다. 분석 결과 영상이 시작되는 오전 8시 49분 35초의 쇠사슬 각도는 18도. 5초 정도 이 각도를 유지하던 쇠사슬은 8시 49분 40초부터 시작해 단 8초 만에 50도까지 꺾였습니다. 선체도 그만큼 빨리 기울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람이 튕겨 나갔다'는 당시 생존자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고 전, 이미 선체는 기울고 있었다

영상들을 정밀 분석하는 과정에서 수상한 움직임도 발견됐습니다. 바로 트윈데크에 있던 경차 블랙박스의 영상이었습니다.

차량이 급격히 쏠리는 시점으로부터 50초쯤 전인 8시 48분 50초. 언뜻 보기엔 미동조차 없어 보이지만, 영상의 재생 속도를 인위적으로 높여봤더니 차들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인 겁니다. 이 역시 기울기 변화를 들여다봤습니다. 다만, 차량 서스펜션의 영향을 감안해 기울기의 추이만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분석 결과 화면이 미세하게 기울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더니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왼쪽으로 쏠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상적으로 운항하는 상황이었다면 배가 다시 중심을 잡았어야 할 시점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겁니다. 세월호는 직접 사고 시점에 앞서 50초 동안이나 계속해서 기울고 있었다는 게 새롭게 밝혀진 순간입니다.


복수의 전문가에게 자문했더니 배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답변을 돌아왔습니다. 조타기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돌고 있었는데도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거나, 기계 자체에 결함으로 방향타가 계속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기울기가 회복되는 걸 방해하는 어떤 힘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 대해서 정밀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겁니다.

공은 다시 넘어갔다

블랙박스 기계가 회수됐을 때, 선조위 내부에선 복원 시도를 할지 말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유가족 중 한 분은 "억만금을 줘도 그때로 돌아갈 순 없지만, 블랙박스 영상이 복원되면서 그게 가능해졌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중요한 자료가 자칫 빛을 보지 못 할 뻔했던 겁니다.

선체조사위원회가 조만간 이 영상들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분석을 해 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궁금증을 품고 4년째 세월호만 바라보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머지않아 속 시원한 답이 들리길 기대합니다.

[연관기사][뉴스9] 블랙박스에 찍힌 세월호 사고 순간…침몰 직전 무슨 일 있었나?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