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한 대에 100만원”…‘맷값폭행’ 피해자, 8년 지나도 고통은 진행형

입력 2018.05.02 (08:01) 수정 2018.05.0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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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한 대에 100만 원이니까 스무 대만 맞아라"

2015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은 안하무인 재벌 2세 조태오(유아인)의 '망나니' 연기로 흥행 돌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베테랑>이 전국민적 인기를 끈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른바 '맷값 폭행' 사건이라 불리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입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이자, 물류회사 M&M 대표였던 최철원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시위를 하던 화물차량 기사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빠따'로 폭행한 뒤 맷값을 건넨 사건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8년이 지난 지금, '맷값 폭행'의 피해자 유홍준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KBS 취재진은 "이제는 그 일을 잊고 살고 싶다"는 유홍준 씨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 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털어놨습니다.

 유홍준 씨 유홍준 씨

"화물연대 탈퇴하면 고용 승계"

사건의 시작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9년 7월, M&M은 동서상운(주)을 인수합병합니다. 화물차 운전자인 유 씨가 계약돼 있던 회사입니다. M&M은 운수 노동자들에게 화물연대를 탈퇴하고 앞으로 노조에 가입하지 말 것을 고용승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화물연대 지회장이었던 유 씨는 계약 체결이 거절됐습니다. 유 씨는 이듬해인 2010년 1월부터 SK 본사 앞에 자신의 화물 차량을 세워 둔 채 1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따라 몸수색을 하더라고요. 원래는 대회의실에서 만났는데, 그때는 소회의실로 들어갔어요. 대회의실에는 CCTV가 있는데, 소회의실에는 CCTV가 없어요."

2010년 10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 씨는 사측으로부터 5천만 원에 차량을 인수해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냅니다. 유 씨는 인감을 챙겨 서울 용산에 있는 M&M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1인 시위를 벌인 지 10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회의실에 들어선 유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청바지를 입은 채 야구방망이를 든 최철원 M&M 전 대표였습니다. 최 전 대표 주변에는 M&M 간부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최 전 대표는 유 씨를 무릎 꿇게 했습니다.

최철원 전 M&M 대표최철원 전 M&M 대표

"살려달라" 말하자... "그럼 지금부터는 한 대에 300만 원씩"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아는 영화 <베테랑>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최 전 대표는 유 씨에게 "합의금이 2천만 원이니까 한 대에 100만 원이라 치고 스무 대만 맞아라"며 야구방망이로 유 씨를 폭행했습니다. 열 대를 맞고 '살려달라'고 비는 유 씨에게 최 전 대표는 "그럼 지금부터는 한 대에 300만 원씩이다"라며 세 대를 더 때립니다. 그리고는 화장지를 둘둘 말아 유 씨의 입안에 밀어넣고는 얼굴에 마지막 한 방을 날렸습니다. 피범벅이 된 유 씨의 얼굴을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닦아내자, 최 전 대표는 1천만 원짜리 수표 2장을 최 씨에게 던졌습니다. 그러고는 합의서 2장을 꺼내며 "읽을 필요 없으니 서명만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충격적인 그날의 사건은 유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일에 대해 유 씨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정도"라고 털어놨습니다. 유 씨는 작은 언론사부터 국민권익위, 인권위 등 이곳저곳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재벌이 얽힌 폭행 사건에 선뜻 나서는 곳은 드물었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유 씨는 극적으로 한 변호사와 연결됐고, 언론 매체를 통해 세상에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방송이 나가자 전국민이 분노로 들끓었습니다. 다음 아고라에서는 최 전 대표의 구속과 처벌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고, 최 전 대표는 구속기소됩니다.

"사실은 2000만 원어치도 안 맞았어요. 제가 볼 때는"
"군대에서 '빠따' 정도로 생각하고... 훈육 개념으로 때렸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 <베테랑>의 결말처럼 통쾌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게 더 '현실적인' 결말일지도 모릅니다. 경찰에 출석하면서 "사회적으로 시끄러워져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던 최철원 전 대표는 단 한 차례도 유 씨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M&M의 한 간부는 "유 씨가 돈을 더 받기 위해 자기가 맞은 부분이 있어요. '파이트 머니'라고 할까요? 쉽게 말해서."라며, "사실은 2000만 원어치도 안 맞았어요, 제가 볼 때는." 라고 발언했습니다. 법정에 선 최철원 씨는 "군대에서 맞는 '빠따' 정도로 생각하고 '훈육' 개념으로 때렸다"는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검찰은 유 씨를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재벌 2세...피해자 고통은 현재진행형

1심에서 최 전 대표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는 피고인보다 나이가 11살이나 많고, 피고인으로부터 훈육을 받을 지위에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적절하지 아니하다 할 것"이라며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2심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최 씨에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습니다.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을 인정하면서 깊이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했다는 겁니다. 결국 사람을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고 맷값을 뿌린 재벌 2세는 감옥에도 가지 않고 합의금 몇 푼으로 대가를 치룬 셈이 됐습니다.

고통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무뎌지지 않습니다. 유 씨는 인터뷰 도중 결국 눈물을 쏟았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피해자의 마음은 이렇게 미어지는데, 돈과 법은 그걸 무시한다." 유전무죄, 법은 언제나 가해자의 편이었습니다.

취재 말미에 조심스럽게 "영화 <베테랑>을 보셨냐"고 물었습니다. 유 씨는 "가족들과 함께 봤다.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유 씨에게 더이상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합니다. 고통스러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 씨는 "대기업이더라도 국민을 너무 무시하고 얕보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며 "나 한 사람이 희생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괜찮다"고 말하는 유 씨의 표정에서 씁쓸함이 묻어났습니다.

어제는 노동절이었습니다. 사람을 때리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던 재벌들, 8년 뒤인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우리 사회에 더이상 유 씨 같은 '갑질'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폭로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연관 기사][뉴스9] ‘재벌 갑질’ 어떤 처벌 받았나?…피해자 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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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한 대에 100만원”…‘맷값폭행’ 피해자, 8년 지나도 고통은 진행형
    • 입력 2018-05-02 08:01:33
    • 수정2018-05-02 10:16:38
    취재후·사건후
"매 한 대에 100만 원이니까 스무 대만 맞아라"

2015년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은 안하무인 재벌 2세 조태오(유아인)의 '망나니' 연기로 흥행 돌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베테랑>이 전국민적 인기를 끈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른바 '맷값 폭행' 사건이라 불리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입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이자, 물류회사 M&M 대표였던 최철원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시위를 하던 화물차량 기사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빠따'로 폭행한 뒤 맷값을 건넨 사건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8년이 지난 지금, '맷값 폭행'의 피해자 유홍준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KBS 취재진은 "이제는 그 일을 잊고 살고 싶다"는 유홍준 씨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 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당시 상황을 털어놨습니다.

 유홍준 씨
"화물연대 탈퇴하면 고용 승계"

사건의 시작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9년 7월, M&M은 동서상운(주)을 인수합병합니다. 화물차 운전자인 유 씨가 계약돼 있던 회사입니다. M&M은 운수 노동자들에게 화물연대를 탈퇴하고 앞으로 노조에 가입하지 말 것을 고용승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화물연대 지회장이었던 유 씨는 계약 체결이 거절됐습니다. 유 씨는 이듬해인 2010년 1월부터 SK 본사 앞에 자신의 화물 차량을 세워 둔 채 1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따라 몸수색을 하더라고요. 원래는 대회의실에서 만났는데, 그때는 소회의실로 들어갔어요. 대회의실에는 CCTV가 있는데, 소회의실에는 CCTV가 없어요."

2010년 10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유 씨는 사측으로부터 5천만 원에 차량을 인수해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냅니다. 유 씨는 인감을 챙겨 서울 용산에 있는 M&M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1인 시위를 벌인 지 10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회의실에 들어선 유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청바지를 입은 채 야구방망이를 든 최철원 M&M 전 대표였습니다. 최 전 대표 주변에는 M&M 간부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최 전 대표는 유 씨를 무릎 꿇게 했습니다.

최철원 전 M&M 대표
"살려달라" 말하자... "그럼 지금부터는 한 대에 300만 원씩"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아는 영화 <베테랑>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최 전 대표는 유 씨에게 "합의금이 2천만 원이니까 한 대에 100만 원이라 치고 스무 대만 맞아라"며 야구방망이로 유 씨를 폭행했습니다. 열 대를 맞고 '살려달라'고 비는 유 씨에게 최 전 대표는 "그럼 지금부터는 한 대에 300만 원씩이다"라며 세 대를 더 때립니다. 그리고는 화장지를 둘둘 말아 유 씨의 입안에 밀어넣고는 얼굴에 마지막 한 방을 날렸습니다. 피범벅이 된 유 씨의 얼굴을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닦아내자, 최 전 대표는 1천만 원짜리 수표 2장을 최 씨에게 던졌습니다. 그러고는 합의서 2장을 꺼내며 "읽을 필요 없으니 서명만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충격적인 그날의 사건은 유 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일에 대해 유 씨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정도"라고 털어놨습니다. 유 씨는 작은 언론사부터 국민권익위, 인권위 등 이곳저곳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재벌이 얽힌 폭행 사건에 선뜻 나서는 곳은 드물었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유 씨는 극적으로 한 변호사와 연결됐고, 언론 매체를 통해 세상에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방송이 나가자 전국민이 분노로 들끓었습니다. 다음 아고라에서는 최 전 대표의 구속과 처벌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고, 최 전 대표는 구속기소됩니다.

"사실은 2000만 원어치도 안 맞았어요. 제가 볼 때는"
"군대에서 '빠따' 정도로 생각하고... 훈육 개념으로 때렸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 <베테랑>의 결말처럼 통쾌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게 더 '현실적인' 결말일지도 모릅니다. 경찰에 출석하면서 "사회적으로 시끄러워져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던 최철원 전 대표는 단 한 차례도 유 씨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M&M의 한 간부는 "유 씨가 돈을 더 받기 위해 자기가 맞은 부분이 있어요. '파이트 머니'라고 할까요? 쉽게 말해서."라며, "사실은 2000만 원어치도 안 맞았어요, 제가 볼 때는." 라고 발언했습니다. 법정에 선 최철원 씨는 "군대에서 맞는 '빠따' 정도로 생각하고 '훈육' 개념으로 때렸다"는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검찰은 유 씨를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재벌 2세...피해자 고통은 현재진행형

1심에서 최 전 대표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는 피고인보다 나이가 11살이나 많고, 피고인으로부터 훈육을 받을 지위에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적절하지 아니하다 할 것"이라며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2심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최 씨에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습니다.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을 인정하면서 깊이 반성하고 있고,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했다는 겁니다. 결국 사람을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고 맷값을 뿌린 재벌 2세는 감옥에도 가지 않고 합의금 몇 푼으로 대가를 치룬 셈이 됐습니다.

고통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무뎌지지 않습니다. 유 씨는 인터뷰 도중 결국 눈물을 쏟았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피해자의 마음은 이렇게 미어지는데, 돈과 법은 그걸 무시한다." 유전무죄, 법은 언제나 가해자의 편이었습니다.

취재 말미에 조심스럽게 "영화 <베테랑>을 보셨냐"고 물었습니다. 유 씨는 "가족들과 함께 봤다.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들은 이제 유 씨에게 더이상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합니다. 고통스러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 씨는 "대기업이더라도 국민을 너무 무시하고 얕보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며 "나 한 사람이 희생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변화가 오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괜찮다"고 말하는 유 씨의 표정에서 씁쓸함이 묻어났습니다.

어제는 노동절이었습니다. 사람을 때리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던 재벌들, 8년 뒤인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우리 사회에 더이상 유 씨 같은 '갑질'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폭로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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