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말 바뀐 아베, 이제야 ‘공기’ 읽었나?

입력 2018.05.03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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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읽다(空気を読む)"라는 일본어 표현이 있다. 한국말로 바꾸면 "분위기를 파악하다"쯤 된다.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고 맞춰서 행동하다는 의미인데, 집단적 조직 사회의 성향이 강한 일본에서는 꼭 요구(?)되는 사회인의 기본자세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해가기 시작한 듯한 일본의 '아베 총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 트럼프 만나 미국 입장 확인…."北에 최대한의 압력" 사라진 아베 총리

지난 17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는 자리. 아베 총리는 연신 북에 대한 압박을 강조했다.

"북한에 의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법에 의한 북한의 핵·미사일 폐기를 실현하기 위해 최대한 압력을 유지한다는 점도 확인하고 싶다."

북한에 압력을 가해, 결과를 받아내야 한다는 그동안의 일본의 외교 노선에서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는, 늘 해오던 수사다.

그리고 지난 27일 남북 정상 회담이 끝난 뒤에 나온 아베 총리의 말.

"오늘의 회담 결과를 받아들여 북한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강하게 기대하고, 앞으로 북한의 동향을 주시할 것"이다.

늘 강조해오던 '압력'이라는 말이 빠졌다. 29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 후에도 역시 '압력'이라는 말은 없었다.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수사의 변화는 이미 지난 21일 북한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뒤에도 보였었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다양한 북한의 변화와 대응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협의가 끝났다." "이러한 기본 방침에 따라 미국·일본, 그리고 한국·미국·일본 차원에서 대응해 가겠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미·일 협의'.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미·일 정상회담 뒤부터 '북한에 대한 압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10시간 넘게 트럼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아베 총리, 그제서야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읽을 수 있었고 '압력'이라는 단어 사용을자제하면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미국 의존도가 심한 일본의 외교 정책을 볼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만한 사정 변화다.

실제 마이니치 신문은 총리 주변에서 "압력을 가하자고 말하는 국면은 미·일 정상회담에서 끝났다. 문제를 어떻게 최종 목표지점을 향하게 할 것인가 하는 단계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드디어 분위기를 파악한 아베 총리다.

■ 문 대통령을 통해 엿보인 일본의 속마음, "과거 청산"과 "국교 정상화"

사진출처 : 연합뉴스사진출처 : 연합뉴스

그럼 일본은 북한과 어떤 과정을 통해 문제를 풀고 싶을까? 하나의 실마리는 29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전화 통화에서 나왔다.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의 통화에서 "일본이 '과거사 청산'에 바탕을 둔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김 위원장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일본 신문에서는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도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고, 특히 '과거 역사 청산'에 바탕을 둔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이야기한 '과거사 청산'이라는 대목은 한일 양측이 모두 공개한 내용인 만큼 일본 측과의 사전 조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일본 측의 이해가 없었을 경우 우익 신문 등을 중심으로 '과거사 청산'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알레르기를 보였을 텐데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다.

■ 그림 그리는 아베...'과거 청산', '경제 협력' 지렛대 삼아 '국교 정상화', '납치 문제 해결'.

북일 관계에서 현재 가장 큰 걸림돌은 '납치자 문제'이다. 이 문제에 진전이 없고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더라도 일본 국내에서 큰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일본은 납치 피해자 17명 가운데 5명이 2002년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귀국했고, 12명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며 '생사 확인 및 귀국'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12명 중 8명은 숨졌고, 4명은 북에 없다며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특히 북한에서 유골을 보내온 '메구미'에 대해서는 일본 측이 본인 유골임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해 간극이 큰 상태다.

김 위원장이 "일본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부분은 공개됐지만,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자 문제에 대해 문 대통령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미뤄 북한이 이에 대한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경제적 원조를 내걸고는 북에 대가를 지불하고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는 모양새로 흘러간다면 아베 총리로서도 정치적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국면에서 등장한 것이 '과거 청산'이다. 즉 과거 한일 수교 때처럼 일본이 과거에 대한 배상 차원에서 경제 협력을 약속할 경우 이를 계기로 '국교 정상화'를 진행할 수 있고, 최종 단계에서 국교 정상화를 위해 아베 총리가 북에 간 뒤 '납치자 문제 해결'이라는 전리품을 들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시나리오다.

'과거사 청산과 경제협력, 국교정상화'를 지렛대로 사용해, 아베 총리는 일본 국내 정치에서 가장 휘발성이 큰 '납치자 문제를 해결한 총리'라는 타이틀을 가져갈 수 있는 그림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에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는 아베 총리로서는 외교적 성과로 남을 수 있는 건 '납치자 문제 해결'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아사히 신문은 일본이 스웨덴과 몽골 채널을 통해 북한과 이야기를 진행 중이라고 30일 전했다. 일본이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과의 대화 채널 2곳이 스웨덴과 몽골 쪽인지는 불확실하나, 미일 정상회담 뒤 북한에 대한 접근법을 바꾸기 시작힌 일본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활발하게 모든 사안을 올려놓고 북한과 물밑 논의를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일본 외교가의 공통된 시각이다.

[대문사진 출처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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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말 바뀐 아베, 이제야 ‘공기’ 읽었나?
    • 입력 2018-05-03 07:01:57
    특파원 리포트
"공기를 읽다(空気を読む)"라는 일본어 표현이 있다. 한국말로 바꾸면 "분위기를 파악하다"쯤 된다.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고 맞춰서 행동하다는 의미인데, 집단적 조직 사회의 성향이 강한 일본에서는 꼭 요구(?)되는 사회인의 기본자세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해가기 시작한 듯한 일본의 '아베 총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 트럼프 만나 미국 입장 확인…."北에 최대한의 압력" 사라진 아베 총리

지난 17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는 자리. 아베 총리는 연신 북에 대한 압박을 강조했다.

"북한에 의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법에 의한 북한의 핵·미사일 폐기를 실현하기 위해 최대한 압력을 유지한다는 점도 확인하고 싶다."

북한에 압력을 가해, 결과를 받아내야 한다는 그동안의 일본의 외교 노선에서 변화가 없음을 보여주는, 늘 해오던 수사다.

그리고 지난 27일 남북 정상 회담이 끝난 뒤에 나온 아베 총리의 말.

"오늘의 회담 결과를 받아들여 북한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강하게 기대하고, 앞으로 북한의 동향을 주시할 것"이다.

늘 강조해오던 '압력'이라는 말이 빠졌다. 29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 후에도 역시 '압력'이라는 말은 없었다.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수사의 변화는 이미 지난 21일 북한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뒤에도 보였었다.

"미·일 정상회담에서 다양한 북한의 변화와 대응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협의가 끝났다." "이러한 기본 방침에 따라 미국·일본, 그리고 한국·미국·일본 차원에서 대응해 가겠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미·일 협의'.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미·일 정상회담 뒤부터 '북한에 대한 압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10시간 넘게 트럼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아베 총리, 그제서야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읽을 수 있었고 '압력'이라는 단어 사용을자제하면서 미국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미국 의존도가 심한 일본의 외교 정책을 볼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만한 사정 변화다.

실제 마이니치 신문은 총리 주변에서 "압력을 가하자고 말하는 국면은 미·일 정상회담에서 끝났다. 문제를 어떻게 최종 목표지점을 향하게 할 것인가 하는 단계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드디어 분위기를 파악한 아베 총리다.

■ 문 대통령을 통해 엿보인 일본의 속마음, "과거 청산"과 "국교 정상화"

사진출처 : 연합뉴스
그럼 일본은 북한과 어떤 과정을 통해 문제를 풀고 싶을까? 하나의 실마리는 29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전화 통화에서 나왔다.

문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의 통화에서 "일본이 '과거사 청산'에 바탕을 둔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김 위원장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일본 신문에서는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도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고, 특히 '과거 역사 청산'에 바탕을 둔 북일 국교 정상화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고 보도했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이야기한 '과거사 청산'이라는 대목은 한일 양측이 모두 공개한 내용인 만큼 일본 측과의 사전 조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일본 측의 이해가 없었을 경우 우익 신문 등을 중심으로 '과거사 청산'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알레르기를 보였을 텐데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다.

■ 그림 그리는 아베...'과거 청산', '경제 협력' 지렛대 삼아 '국교 정상화', '납치 문제 해결'.

북일 관계에서 현재 가장 큰 걸림돌은 '납치자 문제'이다. 이 문제에 진전이 없고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더라도 일본 국내에서 큰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일본은 납치 피해자 17명 가운데 5명이 2002년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귀국했고, 12명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며 '생사 확인 및 귀국'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12명 중 8명은 숨졌고, 4명은 북에 없다며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특히 북한에서 유골을 보내온 '메구미'에 대해서는 일본 측이 본인 유골임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해 간극이 큰 상태다.

김 위원장이 "일본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부분은 공개됐지만,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자 문제에 대해 문 대통령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미뤄 북한이 이에 대한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경제적 원조를 내걸고는 북에 대가를 지불하고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는 모양새로 흘러간다면 아베 총리로서도 정치적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국면에서 등장한 것이 '과거 청산'이다. 즉 과거 한일 수교 때처럼 일본이 과거에 대한 배상 차원에서 경제 협력을 약속할 경우 이를 계기로 '국교 정상화'를 진행할 수 있고, 최종 단계에서 국교 정상화를 위해 아베 총리가 북에 간 뒤 '납치자 문제 해결'이라는 전리품을 들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시나리오다.

'과거사 청산과 경제협력, 국교정상화'를 지렛대로 사용해, 아베 총리는 일본 국내 정치에서 가장 휘발성이 큰 '납치자 문제를 해결한 총리'라는 타이틀을 가져갈 수 있는 그림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에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는 아베 총리로서는 외교적 성과로 남을 수 있는 건 '납치자 문제 해결'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아사히 신문은 일본이 스웨덴과 몽골 채널을 통해 북한과 이야기를 진행 중이라고 30일 전했다. 일본이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과의 대화 채널 2곳이 스웨덴과 몽골 쪽인지는 불확실하나, 미일 정상회담 뒤 북한에 대한 접근법을 바꾸기 시작힌 일본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활발하게 모든 사안을 올려놓고 북한과 물밑 논의를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일본 외교가의 공통된 시각이다.

[대문사진 출처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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