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공사기한보다 가벼운 하청 노동자의 목숨”-하청 노동자 형제의 이야기
입력 2018.05.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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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인터뷰를 잘 안 해 드려요. 인터뷰할 때마다 칼이 꽂히는 것 같아서 집안에서 반대도 하고 그런데,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난해 5월 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노동자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쳤다. 800톤 골리앗 크레인이 32톤 지브형 크레인을 밀어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사고당시 현장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로 일했던 박철희 씨는 그날 함께 일하던 동생 박성우 씨를 잃었다. 자신도 철제 와이어에 맞아 왼쪽 팔과 다리를 다쳤다. 지금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다.
사고 1주년을 불과 며칠 앞두고 박 씨를 만났다. 동생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함께 갔다. 이제 동생을 기억할 수 있는 건 사진 몇 장과 동생이 평소에는 아끼느라 자주 매지 못했던 시계뿐이다. 그래서 종종 동생이 생각날 때마다 그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조선소에 만연했던 문제점을 털어놨다.
건설중인 ‘마틴 린지’
박 씨 등이 건설에 참여했던 시설은 원유플랜트 '마틴 린지'였다. 발주처는 프랑스 정유회사인 토탈의 노르웨이 자회사였다. 2016년 인도 예정이었지만, 지연된 상태였다. 이러다 보니 공사기한을 맞추기 위한 압박이 발주처에서 원청, 하청, 물량팀이라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통해 노동자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현장의 안전의식은 낮았고, 위험한 혼재 작업도 횡행했다고 증언했다.
"공기를 못 맞추는 것보다 사람이 1명 희생되면 그게 더 그러니까 저렴하다는 그런 말들이 팽배했을 정도로 그만큼 안전의식이 없고, 도장이나 화기 작업을 같이 하는 경우에는 화재위험이 있기 때문에 금기시하는데 그때는 혼재 작업도 좀 만연했었고, 작업환경 자체가 굉장히 열악하고, 또 저희한테 힘들었고 위험한 요소들도 굉장히 많았죠."
물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대부분 자원했지만, 노동자들은 긴 시간동안 힘든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게다가 공사 후반부로 갈수록 작업장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했다. 쇠로 된 구조물은 한낮의 열기를 머금어 더위를 피할 데가 없었다. 통로는 점점 좁아지고 낮아져 나중에는 무릎으로 기어 다녀야 했다. 조선소에서 오래 일한 사람의 무릎에 굳은살이 박히는 이유다.
건물 10층 높이 작업장에 인간의 생리현상을 해결할 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정수기가 하나둘 빠지기 시작해 물 한 잔 먹으려 해도 몇 분을 걸어 내려와야 했다. 오전과 오후에 10분씩 주어지는 휴게시간에는 화장실과 휴게실 앞에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사고도 휴게시간을 앞두고 일어났다.
"(휴게시간) 10분 전에는 모든 크레인이 작업을 멈춰야 하거든요. 근데 이제 저희가 사고 날 당시에 크레인이 그러니까 작업하는 게 있어서 그걸 마무리하려고 그랬는지 시간이 넘었는데 움직이고 있었고요. 그 와중에 2대가 같이 부딪혔죠."
크레인을 사용할 때는 사고예방을 위해 신호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신호수가 있는 층으로만 한 번에 하나씩 물건을 옮겼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사고를 막지 못한 이유다.
"보통은 한 층에서 한 층만 올리는데 그날따라 2개 층을 올리더라고요. (급했던 건가요?) 그렇겠죠. 쉬는 시간이 이제 멈춰야 하는 시간인데 그거는 올려야 하는 그런 상황이라 좀 급하셨는지 그렇게 2개 층 것을 한꺼번에 옮기셨죠."
박 씨는 사고 뒤 부상자 응급처치와 후송에서도 문제가 많았다고 증언했다. 삼성중공업 자체구조단이 있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환자를 옮기는 과정도 상당히 지연됐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자체도 그 건물 자체로 크레인 본체가 넘어진 상황이라 잘못하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부상자들을 내리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그 사고를 냈던 골리앗을 이용해서 부상자들을 다 내렸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저희 동생 같은 경우는 후송시간이 굉장히 늦어진 거죠. 그래서 사고 나고 구급차를 타게 된 게 거의 1시간 만에 타게 됐어요."
사고 이후 작업자들은 업무상 과실로, 관리자들은 안전조치 의무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그러나 중대재해가 일어나고, 대응이 미숙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한 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도 없었다. 박철희 씨는 그래서 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해달라고 했다. 많은 언론과 인터뷰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밝혔다.
취재진은 피해자 인터뷰와 함께 삼성중공업에도 사고 이후 현장 개선사항에 대한 취재를 요청했다. 삼성중공업은 현장공개 요청을 거부했고, 서면으로만 사실관계에 대한 입장을 보내왔다.
사고의 원인은 원청에서 하청, 다시 물량팀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아니고, 현장 커뮤니케이션 부재라고 밝혔다. 휴게 시간 문제는 오전과 오후에 각 20분씩 휴식할 수 있게 했고, 화장실은 휴게시간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했다고 답했다. 페인트칠 같은 도장작업과 용접 같은 화기 작업을 동시에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사고 크레인으로 환자를 내린 사실은 없고, 비상매뉴얼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안전하고 신속하게 수송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사고 당시 크레인으로 사망자를 옮기는 영상을 보여주자 입장을 바꿨다. 크레인과 엘리베이터를 혼용했고, 사고를 낸 크레인은 아니었다고 수정했다.
사고 이후 삼성중공업은 물론 한국 조선산업 전체의 신뢰도는 추락했다. 조선업체들은 해외 수주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기를 맞추기 위한 무리한 작업과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위험관리가 안 된 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원청인 대기업이 현장의 문제점과 위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밑바닥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중대재해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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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05-03 18:10:25
"제가 인터뷰를 잘 안 해 드려요. 인터뷰할 때마다 칼이 꽂히는 것 같아서 집안에서 반대도 하고 그런데,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난해 5월 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노동자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쳤다. 800톤 골리앗 크레인이 32톤 지브형 크레인을 밀어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사고당시 현장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로 일했던 박철희 씨는 그날 함께 일하던 동생 박성우 씨를 잃었다. 자신도 철제 와이어에 맞아 왼쪽 팔과 다리를 다쳤다. 지금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다.
사고 1주년을 불과 며칠 앞두고 박 씨를 만났다. 동생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함께 갔다. 이제 동생을 기억할 수 있는 건 사진 몇 장과 동생이 평소에는 아끼느라 자주 매지 못했던 시계뿐이다. 그래서 종종 동생이 생각날 때마다 그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조선소에 만연했던 문제점을 털어놨다.
박 씨 등이 건설에 참여했던 시설은 원유플랜트 '마틴 린지'였다. 발주처는 프랑스 정유회사인 토탈의 노르웨이 자회사였다. 2016년 인도 예정이었지만, 지연된 상태였다. 이러다 보니 공사기한을 맞추기 위한 압박이 발주처에서 원청, 하청, 물량팀이라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통해 노동자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현장의 안전의식은 낮았고, 위험한 혼재 작업도 횡행했다고 증언했다.
"공기를 못 맞추는 것보다 사람이 1명 희생되면 그게 더 그러니까 저렴하다는 그런 말들이 팽배했을 정도로 그만큼 안전의식이 없고, 도장이나 화기 작업을 같이 하는 경우에는 화재위험이 있기 때문에 금기시하는데 그때는 혼재 작업도 좀 만연했었고, 작업환경 자체가 굉장히 열악하고, 또 저희한테 힘들었고 위험한 요소들도 굉장히 많았죠."
물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대부분 자원했지만, 노동자들은 긴 시간동안 힘든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게다가 공사 후반부로 갈수록 작업장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했다. 쇠로 된 구조물은 한낮의 열기를 머금어 더위를 피할 데가 없었다. 통로는 점점 좁아지고 낮아져 나중에는 무릎으로 기어 다녀야 했다. 조선소에서 오래 일한 사람의 무릎에 굳은살이 박히는 이유다.
건물 10층 높이 작업장에 인간의 생리현상을 해결할 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정수기가 하나둘 빠지기 시작해 물 한 잔 먹으려 해도 몇 분을 걸어 내려와야 했다. 오전과 오후에 10분씩 주어지는 휴게시간에는 화장실과 휴게실 앞에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사고도 휴게시간을 앞두고 일어났다.
"(휴게시간) 10분 전에는 모든 크레인이 작업을 멈춰야 하거든요. 근데 이제 저희가 사고 날 당시에 크레인이 그러니까 작업하는 게 있어서 그걸 마무리하려고 그랬는지 시간이 넘었는데 움직이고 있었고요. 그 와중에 2대가 같이 부딪혔죠."
크레인을 사용할 때는 사고예방을 위해 신호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신호수가 있는 층으로만 한 번에 하나씩 물건을 옮겼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사고를 막지 못한 이유다.
"보통은 한 층에서 한 층만 올리는데 그날따라 2개 층을 올리더라고요. (급했던 건가요?) 그렇겠죠. 쉬는 시간이 이제 멈춰야 하는 시간인데 그거는 올려야 하는 그런 상황이라 좀 급하셨는지 그렇게 2개 층 것을 한꺼번에 옮기셨죠."
박 씨는 사고 뒤 부상자 응급처치와 후송에서도 문제가 많았다고 증언했다. 삼성중공업 자체구조단이 있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환자를 옮기는 과정도 상당히 지연됐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자체도 그 건물 자체로 크레인 본체가 넘어진 상황이라 잘못하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부상자들을 내리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그 사고를 냈던 골리앗을 이용해서 부상자들을 다 내렸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저희 동생 같은 경우는 후송시간이 굉장히 늦어진 거죠. 그래서 사고 나고 구급차를 타게 된 게 거의 1시간 만에 타게 됐어요."
사고 이후 작업자들은 업무상 과실로, 관리자들은 안전조치 의무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그러나 중대재해가 일어나고, 대응이 미숙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한 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도 없었다. 박철희 씨는 그래서 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달해달라고 했다. 많은 언론과 인터뷰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밝혔다.
취재진은 피해자 인터뷰와 함께 삼성중공업에도 사고 이후 현장 개선사항에 대한 취재를 요청했다. 삼성중공업은 현장공개 요청을 거부했고, 서면으로만 사실관계에 대한 입장을 보내왔다.
사고의 원인은 원청에서 하청, 다시 물량팀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아니고, 현장 커뮤니케이션 부재라고 밝혔다. 휴게 시간 문제는 오전과 오후에 각 20분씩 휴식할 수 있게 했고, 화장실은 휴게시간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했다고 답했다. 페인트칠 같은 도장작업과 용접 같은 화기 작업을 동시에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사고 크레인으로 환자를 내린 사실은 없고, 비상매뉴얼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안전하고 신속하게 수송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사고 당시 크레인으로 사망자를 옮기는 영상을 보여주자 입장을 바꿨다. 크레인과 엘리베이터를 혼용했고, 사고를 낸 크레인은 아니었다고 수정했다.
사고 이후 삼성중공업은 물론 한국 조선산업 전체의 신뢰도는 추락했다. 조선업체들은 해외 수주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기를 맞추기 위한 무리한 작업과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 위험관리가 안 된 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원청인 대기업이 현장의 문제점과 위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밑바닥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면, 중대재해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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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기자 bullsey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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