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판문점 선언문 논란 된 ‘해방’과 ‘합의’의 한 끗 차이

입력 2018.05.03 (22:01) 수정 2018.05.0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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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있은 지 이틀 뒤 보수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는 "남북 정상이 발표한 판문점 선언문에서 이상한 단어가 발견됐다"는 내용의 영상 콘텐츠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회담일 당시 기자들에게 사전 배포한 선언문에는 '(남과 북이)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해방들을 철저히 행한다'는 표현이 담겼다가 이후 최종 버전에서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행한다'로 바뀌어 배포된 게 수상하다는 내용이다.

해당 영상을 제작·게시한 인터넷 매체는 '해방'이란 단어가 북한의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이런 실수를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증 결과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실수했다는 이들이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려웠다.

☞ 해당 기사 보기 : [팩트체크] “청와대, 판문점 선언문에 ‘해방’ 넣었다 의도적으로 고쳤다?”

다만 선언문 속기록 과정에서 '합의'라는 원래 표현 대신 '해방'이라는 상호 연관성이 없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 점은 의문으로 남았다. 청와대도 어쩌다 그런 단어가 들어가게 됐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표했다.

기사에도 '아무리 그래도 해방이란 단어가 합의 대신 들어가게 된 경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댓글이 다수 달렸다.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해방이란 표현을 쓴 게 확실하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10년 차 속기사의 제보로 풀린 의문

기자는 팩트체크 기사가 나간 뒤 10년 차 속기사가 보낸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속기사들이 사용하는 약어(준말) 체계를 고려하면 '합의'라는 단어가 '해방'으로 충분히 잘못 표기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던 오타 경위를 밝힐만한 내용이어서 솔깃했다.

속기에 사용되는 약어가 오타의 주범?

속기사는 기본적으로 여러 키를 조합해서 누르면 지정된 단어가 나오는 3벌식 자판을 사용한다. 여기에 상용어를 줄인 약어를 이용해 더 빠르게 작업한다. 특수용어나 신조어가 아닌 일반 약어는 기본적으로 자판에 입력돼 있어서 해당 체계대로 입력하면 빠르게 문장을 쓸 수 있다. 바로 그 약어 체계에 오타의 비밀이 있다는 설명이다.

속기용 자판은 크게 '소리자바'와 'CAS(Computer Aided Steno-machine)' 방식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건 CAS 방식이다.

CAS 방식으로 '해방'이란 단어를 약어로 치려면 왼손으로 자판 'ㅎ'을, 오른손으로 'ㅂ'과 'ㅇ'을 동시에 누르면 된다.

약어 ‘합의’의 운지법약어 ‘합의’의 운지법

그런데 약어 '합의'의 운지법도 비슷하다. '해방'에 모음 'ㅏ'(왼손)를 더한 것이다. 이 같은 약어체계는 복수의 속기사들의 설명과도 일치했다.

약어 ‘해방’의 운지법 / 이미지 제공 : 한국스마트속기협회약어 ‘해방’의 운지법 / 이미지 제공 : 한국스마트속기협회

판문점 선언문을 받아적던 속기사가 당시 모음 'ㅏ'를 빠뜨리면서 원래 표현인 '합의'가 '해방'으로 바뀐 것으로 볼수 있는 대목이다.

정상회담의 속기록 업무를 관장한 청와대 춘추관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당시 속기록을 담당한 속기사도 CAS 방식을 사용했고 위 방식대로 약어를 입력했다.

권혁기 청와대 춘추관장은 "당시 속기사가 동시에 자판을 누르다 왼손의 'ㅏ'가 약하게 눌려 합의가 아닌 해방으로 입력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복수의 현직 속기사들은 "속기 자판이 예민하다 보니 자판을 덜 누르거나 다른 걸 살짝만 누를 경우 전혀 다른 단어가 튀어나온다"면서 "바쁘게 작업을 하다 보면 오타가 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대개 작업 후 퇴고를 통해 오타를 잡아내지만, 이번 경우처럼 잘못된 표기가 아닌 다른 의미의 단어를 쓴 경우라면 발언자의 음성을 다시 들으며 대조해봐야 오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정상회담 당시 의미가 다른 단어가 들어갔지만 선언문을 급히 작업해 배포하는 과정에서 오타 체크가 되지 않은 것이다. 청와대는 이후 기사화할 수 있는 최종 버전을 수정해 배포했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해보면 "속기사의 실수로 잠시 잘못된 표현이 선언문에 들어갔다"는 청와대의 해명에 납득이 간다. '해방'과 '합의' 두 단어의 약어 운지법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속기경력 10년 차인 조용호 씨는 "속기사가 보면 단순한 실수에 불과한 일이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걸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면서 "올바른 판단을 돕기 위해 관련 내용을 제보했다"고 말했다.

발음상으로 보나 의미상으로 보나 상호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였던 '해방'과 '합의' 두 단어가 속기의 약어체계에선 말 그대로 '한 끗 차이'의 관계였던 셈이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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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판문점 선언문 논란 된 ‘해방’과 ‘합의’의 한 끗 차이
    • 입력 2018-05-03 22:01:24
    • 수정2018-05-04 16:14:52
    취재후·사건후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있은 지 이틀 뒤 보수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는 "남북 정상이 발표한 판문점 선언문에서 이상한 단어가 발견됐다"는 내용의 영상 콘텐츠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회담일 당시 기자들에게 사전 배포한 선언문에는 '(남과 북이)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해방들을 철저히 행한다'는 표현이 담겼다가 이후 최종 버전에서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행한다'로 바뀌어 배포된 게 수상하다는 내용이다.

해당 영상을 제작·게시한 인터넷 매체는 '해방'이란 단어가 북한의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서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이런 실수를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증 결과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실수했다는 이들이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려웠다.

☞ 해당 기사 보기 : [팩트체크] “청와대, 판문점 선언문에 ‘해방’ 넣었다 의도적으로 고쳤다?”

다만 선언문 속기록 과정에서 '합의'라는 원래 표현 대신 '해방'이라는 상호 연관성이 없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 점은 의문으로 남았다. 청와대도 어쩌다 그런 단어가 들어가게 됐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표했다.

기사에도 '아무리 그래도 해방이란 단어가 합의 대신 들어가게 된 경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댓글이 다수 달렸다.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해방이란 표현을 쓴 게 확실하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10년 차 속기사의 제보로 풀린 의문

기자는 팩트체크 기사가 나간 뒤 10년 차 속기사가 보낸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속기사들이 사용하는 약어(준말) 체계를 고려하면 '합의'라는 단어가 '해방'으로 충분히 잘못 표기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던 오타 경위를 밝힐만한 내용이어서 솔깃했다.

속기에 사용되는 약어가 오타의 주범?

속기사는 기본적으로 여러 키를 조합해서 누르면 지정된 단어가 나오는 3벌식 자판을 사용한다. 여기에 상용어를 줄인 약어를 이용해 더 빠르게 작업한다. 특수용어나 신조어가 아닌 일반 약어는 기본적으로 자판에 입력돼 있어서 해당 체계대로 입력하면 빠르게 문장을 쓸 수 있다. 바로 그 약어 체계에 오타의 비밀이 있다는 설명이다.

속기용 자판은 크게 '소리자바'와 'CAS(Computer Aided Steno-machine)' 방식으로 나뉘는데, 대부분의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건 CAS 방식이다.

CAS 방식으로 '해방'이란 단어를 약어로 치려면 왼손으로 자판 'ㅎ'을, 오른손으로 'ㅂ'과 'ㅇ'을 동시에 누르면 된다.

약어 ‘합의’의 운지법
그런데 약어 '합의'의 운지법도 비슷하다. '해방'에 모음 'ㅏ'(왼손)를 더한 것이다. 이 같은 약어체계는 복수의 속기사들의 설명과도 일치했다.

약어 ‘해방’의 운지법 / 이미지 제공 : 한국스마트속기협회
판문점 선언문을 받아적던 속기사가 당시 모음 'ㅏ'를 빠뜨리면서 원래 표현인 '합의'가 '해방'으로 바뀐 것으로 볼수 있는 대목이다.

정상회담의 속기록 업무를 관장한 청와대 춘추관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당시 속기록을 담당한 속기사도 CAS 방식을 사용했고 위 방식대로 약어를 입력했다.

권혁기 청와대 춘추관장은 "당시 속기사가 동시에 자판을 누르다 왼손의 'ㅏ'가 약하게 눌려 합의가 아닌 해방으로 입력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복수의 현직 속기사들은 "속기 자판이 예민하다 보니 자판을 덜 누르거나 다른 걸 살짝만 누를 경우 전혀 다른 단어가 튀어나온다"면서 "바쁘게 작업을 하다 보면 오타가 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대개 작업 후 퇴고를 통해 오타를 잡아내지만, 이번 경우처럼 잘못된 표기가 아닌 다른 의미의 단어를 쓴 경우라면 발언자의 음성을 다시 들으며 대조해봐야 오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정상회담 당시 의미가 다른 단어가 들어갔지만 선언문을 급히 작업해 배포하는 과정에서 오타 체크가 되지 않은 것이다. 청와대는 이후 기사화할 수 있는 최종 버전을 수정해 배포했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해보면 "속기사의 실수로 잠시 잘못된 표현이 선언문에 들어갔다"는 청와대의 해명에 납득이 간다. '해방'과 '합의' 두 단어의 약어 운지법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속기경력 10년 차인 조용호 씨는 "속기사가 보면 단순한 실수에 불과한 일이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걸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면서 "올바른 판단을 돕기 위해 관련 내용을 제보했다"고 말했다.

발음상으로 보나 의미상으로 보나 상호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였던 '해방'과 '합의' 두 단어가 속기의 약어체계에선 말 그대로 '한 끗 차이'의 관계였던 셈이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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