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마주하게 된 북미 정상

입력 2018.05.06 (15:43) 수정 2018.05.0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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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북핵위기

정전 후, '원수지간'이던 미국과 북한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외교사에 등장하는 장면은 1994년 6월 당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동부터다. 앞서 1993년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 영변핵시설 폭격설을 거론했다. 북한은 '서울 불바다'로 답했다. 말폭탄이 오갔다. 얼마 전 한반도 정세와 겹쳐보인다.

카터와 만난 김일성 주석은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해주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한 달 뒤 김일성 주석은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제네바 공식 회담에서 북·미 합의로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마무리됐다.

숨가빴던 2000년 남북미


미북, 북미 회담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2000년 들어서다. 숨가쁘게 이뤄졌다. 1998년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다. 핵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을 게임판에 내놓았다.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진행됐다. 7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백남순 북한 외무상이 외교장관 회담을 열었다. 10월에는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조명록의 손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친서가 쥐어졌다. 워싱턴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친서를 받은 클린턴 대통령은 조명록과 북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은 "1993년 6월 체결된 '조미공동성명'과 1994년 10월 '합의서'를 이어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자주권에 대한 상호 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기초해 쌍무적 다무적 공간을 통한 외교적 접촉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미사일 문제의 해결이 북미 관계의 근본적 개선과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북한은 새로운 관계 구축을 위한 노력으로 미사일 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기"로 했다.

북미 정상회담 '문턱'까지 갔으나...

출처: MADAM SECRETARY, 2003출처: MADAM SECRETARY, 2003

이 합의사항에 따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한다. 같은 해 10월 22일부터 3박 4일 간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장관은 조명록과 김정일 위원장을 차례로 만났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미사일 개발'을 둘러싸고 담판을 벌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권유로 '5.1 경기장'에 가게 된 올브라이트 장관은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장면을 아날로그식의 카드 섹션으로 보게 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발사"(That was our first missile launch-and our last.)"라고 말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그 말이 지켜지길 바랐다. 주한미군에 대해 문답도 오갔다. 김정일 위원장은 "미군이 안정된 역할(stabilizing role)을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이어 "북한에서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찬반이 50대 50'이라고 덧붙였다. 주한미군이 떠나야한다는 사람도 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달려있다고 말했다.(Kim said the solution rested with the normalization of relations.)"

뒤늦게 만난 두 사람 클린턴·김정일…'엇갈린 기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위한 사전준비까지 끝마쳤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12월 방북을 앞두고 방북을 포기했다. 당시 막바지 단계였던 중동평화 협상에 더 우선 순위를 두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와 중동의 분쟁과 갈등을 어떻게 어떤 순위로 다룰 것이냐는 미국 외교안보의 오래되고 중요한 과제였다. 또 선거에서 공화당 아들 부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미국과 북한간 분위기는 다시 냉각되기 시작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김정일 위원장과 마주앉았다. 북한은 클린턴이 오바마 대통령의 뜻을 '구두 메시지'로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무부는 '개인 자격'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와 해석이 달랐다. 클린턴은 5개월간 억류하던 미국인 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와 함께 돌아왔다.

'2020년' 안에 열매 맺기를 고대하는 이유...

이제 북미· 미북간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만남은 이렇다할 약속을 못한 채 흐지부지돼왔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또 클린턴 대통령의 퇴임으로… 이렇게 양국의 리더십이 교체되면서 정상회담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등을 고려해 2020년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자고 소매를 걷어붙이는 이유다.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 국무위원장의 '오늘의 만남'이 역사 속에서 어떤 장면으로 기억될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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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고 돌아…마주하게 된 북미 정상
    • 입력 2018-05-06 15:43:44
    • 수정2018-05-06 16:52:53
    취재K
1차 북핵위기

정전 후, '원수지간'이던 미국과 북한의 접촉이 본격적으로 외교사에 등장하는 장면은 1994년 6월 당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동부터다. 앞서 1993년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 영변핵시설 폭격설을 거론했다. 북한은 '서울 불바다'로 답했다. 말폭탄이 오갔다. 얼마 전 한반도 정세와 겹쳐보인다.

카터와 만난 김일성 주석은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해주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한 달 뒤 김일성 주석은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제네바 공식 회담에서 북·미 합의로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마무리됐다.

숨가빴던 2000년 남북미


미북, 북미 회담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2000년 들어서다. 숨가쁘게 이뤄졌다. 1998년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다. 핵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을 게임판에 내놓았다. 2000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진행됐다. 7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백남순 북한 외무상이 외교장관 회담을 열었다. 10월에는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조명록의 손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친서가 쥐어졌다. 워싱턴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친서를 받은 클린턴 대통령은 조명록과 북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은 "1993년 6월 체결된 '조미공동성명'과 1994년 10월 '합의서'를 이어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자주권에 대한 상호 존중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기초해 쌍무적 다무적 공간을 통한 외교적 접촉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미사일 문제의 해결이 북미 관계의 근본적 개선과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북한은 새로운 관계 구축을 위한 노력으로 미사일 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기"로 했다.

북미 정상회담 '문턱'까지 갔으나...

출처: MADAM SECRETARY, 2003
이 합의사항에 따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한다. 같은 해 10월 22일부터 3박 4일 간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장관은 조명록과 김정일 위원장을 차례로 만났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미사일 개발'을 둘러싸고 담판을 벌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권유로 '5.1 경기장'에 가게 된 올브라이트 장관은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장면을 아날로그식의 카드 섹션으로 보게 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발사"(That was our first missile launch-and our last.)"라고 말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그 말이 지켜지길 바랐다. 주한미군에 대해 문답도 오갔다. 김정일 위원장은 "미군이 안정된 역할(stabilizing role)을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이어 "북한에서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찬반이 50대 50'이라고 덧붙였다. 주한미군이 떠나야한다는 사람도 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달려있다고 말했다.(Kim said the solution rested with the normalization of relations.)"

뒤늦게 만난 두 사람 클린턴·김정일…'엇갈린 기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위한 사전준비까지 끝마쳤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12월 방북을 앞두고 방북을 포기했다. 당시 막바지 단계였던 중동평화 협상에 더 우선 순위를 두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와 중동의 분쟁과 갈등을 어떻게 어떤 순위로 다룰 것이냐는 미국 외교안보의 오래되고 중요한 과제였다. 또 선거에서 공화당 아들 부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미국과 북한간 분위기는 다시 냉각되기 시작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김정일 위원장과 마주앉았다. 북한은 클린턴이 오바마 대통령의 뜻을 '구두 메시지'로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무부는 '개인 자격'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와 해석이 달랐다. 클린턴은 5개월간 억류하던 미국인 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와 함께 돌아왔다.

'2020년' 안에 열매 맺기를 고대하는 이유...

이제 북미· 미북간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만남은 이렇다할 약속을 못한 채 흐지부지돼왔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또 클린턴 대통령의 퇴임으로… 이렇게 양국의 리더십이 교체되면서 정상회담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와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등을 고려해 2020년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자고 소매를 걷어붙이는 이유다.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 국무위원장의 '오늘의 만남'이 역사 속에서 어떤 장면으로 기억될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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