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130년 전 한국 최초의 미국 보고서

입력 2018.05.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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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속습유(美俗拾遺). '미국의 풍속을 익혀 후세에 전한다'는 뜻이다. 구한말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1841~1905)은 자신이 쓴 미국 견문기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미속습유】는 조선인 최초의 서양견문기로 알려진【서유견문(유길준)】보다 1년 앞선 1888년에 탈고 됐지만 책으로 발간되지는 못 했다. 고종과 신하들이 미국의 실정을 이해하고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내부 자료로만 활용됐다. 지금으로 치면 대외비로 취급되는 외교부 고위 공무원의 해외 출장 보고서쯤 되겠다.

【미속습유】가 13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동국대학교 한철호 역사교육과 교수와 함께 한글로 번역·해제해 단행본으로 냈다.


박정양은 1888년 1월 미국에 도착해 11개월 동안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신(新)제도와 문물을 총 44개 항목으로 나눠 정리했다. 체계적이고 꼼꼼한 내용을 봤을 때 박정양이 요즘 몇몇 국회의원들처럼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고종은 박정양을 미국으로 보내며 "견문을 넓히되 우리나라 사정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를 올리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평양을 건너는 조선의 개혁파 관리는 외세에 치여 쇠락해 가는 조국의 사정에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미속습유 원본(1888). [출처 : 국외소재문화재재단]미속습유 원본(1888). [출처 :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 나라는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해 만든 나라로 권리가 주인인 백성에게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보잘 것 없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아 마음과 몸을 다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 또 친구를 사귀는 도리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여서 귀천의 구별이 없다.」 145쪽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출신 박정양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온 박정양에게 미국은 만인에게 권리가 있는 생경한 나라였다. 그러나 박정양은 미국의 삼권분립제도와 민주공화제도를 정확히 인식했다. 또 대통령제 세습을 거부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사례를 비중있게 언급하면서 '선거'라는 제도가 미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한철호 교수는 "박정양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며 "현실적으로 정당정치가 조선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파를 조성해 군주권에 혼란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음식은 달고 짠 것을 좋아하는데, 쌀은 거의 먹지 않고 오로지 밀가루빵과 생선, 고기, 과일, 채소를 좋아한다.」 143쪽

「남자는 어릴 때부터 머리카락을 잘라서 길게 기르지 않고, 여인은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자르지 않으며 정수리에 둥글게 묶는다.」 144쪽

풍속을 묘사한 부분도 흥미롭다. 박정양은 미국 육군 대장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는 등 미국인들의 관혼상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여기서 【미속습유】에는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위트니(William C, Whitney) 해군 장관 부인이 베푼 만찬에 초대된 박정양은 어깨와 목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여인들을 보게 됐다. 당황한 박정양은 가이드 역할을 해주던 미국인 선교사 앨런에게 "미국 기생을 그냥 쳐다봐도 괜찮으냐"고 질문했다. 기생이 아니고 저명인사 부인이나 딸이라는 답변을 들은 박정양은 "옷을 벗은 여자들을 여러 사람 앞에 내보낸단 말인가"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1888년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한 박정양이 워싱턴 D.C. 인근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1888년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한 박정양이 워싱턴 D.C. 인근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신문은 정부로부터 그 자유권을 허락받아서 비록 전·현직 대통령의 좋은 말이나 나쁜 행동일지라도 구애받지 않고 싣는다. 일이 있으면 바로 쓰고 들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적어내어 조금이라도 숨기거나 포용해주는 사사로움이 없다 … 대개 신문사의 규정이 매우 엄숙해서 감히 근거 없는 허망한 말을 신문에 실을 수 없다. 각 지방과 각국에 널리 조사하는 사람(기자)를 보내는데, 무릇 듣고 본 바가 확실하고 근거 있는 것은 가까우면 달려가서 알리고, 조금 멀면 글로 통보하거나 또 전보로 보내서 근거로 삼는다.」138쪽

미국 언론의 자유로운 정부 비판을 설명한 부분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정양의 날카로운 시각은 언론사의 팩트 체크(Fact-check)를 다룬 부분에서도 두드러진다. 박정양은 미국 신문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미국 신문 기자와 직접 만나 대화하기도 하고, 미국 기자의 비자 발급을 의뢰한 미국 국무부의 요청을 당시 외교부 격이었던 외아문(外衙門)에 전달하기도 했다.

조선 초대 공사로서 미국 외교 무대에 뛰어든 박정양은 불과 1년 만에 귀국하고 만다. 독자 외교를 허용하지 않는 청나라의 견제 때문이다. 박정양은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의회 설립 운동에도 관여했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병으로 세상을 떴다.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던 박정양의 포부는 끝내 좌절됐다. 하지만 개혁 정신과 혁신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겠다던 '미속습유(美俗拾遺)'의 뜻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속습유】지은이 박정양, 옮긴이 한철호, 출판사 푸른역사,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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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130년 전 한국 최초의 미국 보고서
    • 입력 2018-05-13 08:00:15
    여의도책방
미속습유(美俗拾遺). '미국의 풍속을 익혀 후세에 전한다'는 뜻이다. 구한말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1841~1905)은 자신이 쓴 미국 견문기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미속습유】는 조선인 최초의 서양견문기로 알려진【서유견문(유길준)】보다 1년 앞선 1888년에 탈고 됐지만 책으로 발간되지는 못 했다. 고종과 신하들이 미국의 실정을 이해하고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내부 자료로만 활용됐다. 지금으로 치면 대외비로 취급되는 외교부 고위 공무원의 해외 출장 보고서쯤 되겠다.

【미속습유】가 13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동국대학교 한철호 역사교육과 교수와 함께 한글로 번역·해제해 단행본으로 냈다.


박정양은 1888년 1월 미국에 도착해 11개월 동안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신(新)제도와 문물을 총 44개 항목으로 나눠 정리했다. 체계적이고 꼼꼼한 내용을 봤을 때 박정양이 요즘 몇몇 국회의원들처럼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고종은 박정양을 미국으로 보내며 "견문을 넓히되 우리나라 사정에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를 올리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평양을 건너는 조선의 개혁파 관리는 외세에 치여 쇠락해 가는 조국의 사정에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미속습유 원본(1888). [출처 :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 나라는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해 만든 나라로 권리가 주인인 백성에게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보잘 것 없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아 마음과 몸을 다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 또 친구를 사귀는 도리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여서 귀천의 구별이 없다.」 145쪽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출신 박정양에게 미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온 박정양에게 미국은 만인에게 권리가 있는 생경한 나라였다. 그러나 박정양은 미국의 삼권분립제도와 민주공화제도를 정확히 인식했다. 또 대통령제 세습을 거부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사례를 비중있게 언급하면서 '선거'라는 제도가 미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한철호 교수는 "박정양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며 "현실적으로 정당정치가 조선에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파를 조성해 군주권에 혼란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음식은 달고 짠 것을 좋아하는데, 쌀은 거의 먹지 않고 오로지 밀가루빵과 생선, 고기, 과일, 채소를 좋아한다.」 143쪽

「남자는 어릴 때부터 머리카락을 잘라서 길게 기르지 않고, 여인은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자르지 않으며 정수리에 둥글게 묶는다.」 144쪽

풍속을 묘사한 부분도 흥미롭다. 박정양은 미국 육군 대장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는 등 미국인들의 관혼상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여기서 【미속습유】에는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위트니(William C, Whitney) 해군 장관 부인이 베푼 만찬에 초대된 박정양은 어깨와 목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여인들을 보게 됐다. 당황한 박정양은 가이드 역할을 해주던 미국인 선교사 앨런에게 "미국 기생을 그냥 쳐다봐도 괜찮으냐"고 질문했다. 기생이 아니고 저명인사 부인이나 딸이라는 답변을 들은 박정양은 "옷을 벗은 여자들을 여러 사람 앞에 내보낸단 말인가"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1888년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한 박정양이 워싱턴 D.C. 인근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신문은 정부로부터 그 자유권을 허락받아서 비록 전·현직 대통령의 좋은 말이나 나쁜 행동일지라도 구애받지 않고 싣는다. 일이 있으면 바로 쓰고 들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적어내어 조금이라도 숨기거나 포용해주는 사사로움이 없다 … 대개 신문사의 규정이 매우 엄숙해서 감히 근거 없는 허망한 말을 신문에 실을 수 없다. 각 지방과 각국에 널리 조사하는 사람(기자)를 보내는데, 무릇 듣고 본 바가 확실하고 근거 있는 것은 가까우면 달려가서 알리고, 조금 멀면 글로 통보하거나 또 전보로 보내서 근거로 삼는다.」138쪽

미국 언론의 자유로운 정부 비판을 설명한 부분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정양의 날카로운 시각은 언론사의 팩트 체크(Fact-check)를 다룬 부분에서도 두드러진다. 박정양은 미국 신문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미국 신문 기자와 직접 만나 대화하기도 하고, 미국 기자의 비자 발급을 의뢰한 미국 국무부의 요청을 당시 외교부 격이었던 외아문(外衙門)에 전달하기도 했다.

조선 초대 공사로서 미국 외교 무대에 뛰어든 박정양은 불과 1년 만에 귀국하고 만다. 독자 외교를 허용하지 않는 청나라의 견제 때문이다. 박정양은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의회 설립 운동에도 관여했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병으로 세상을 떴다.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던 박정양의 포부는 끝내 좌절됐다. 하지만 개혁 정신과 혁신의 가치를 후세에 전하겠다던 '미속습유(美俗拾遺)'의 뜻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속습유】지은이 박정양, 옮긴이 한철호, 출판사 푸른역사,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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