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다”…어민의 역사

입력 2018.05.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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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나향욱 전 교육부 국장이 신문 기자에게 한 말입니다.

비슷한 말을 한 일본 학자가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 역사학자 히라이즈미 기요시는 하층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겠다는 학생에게 "돼지에게도 역사가 있습니까?"라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 학계에도 이런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관을 반성하는 학자들이 나타납니다. 민중의 역사를 새로 연구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1949년부터 5년간 일본학자들은 각지의 어촌에서 고문서 100만 점 이상을 수집합니다. 공식 역사서에 없는 어민들의 진짜 역사를 연구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젊은 학자들의 배신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역량이 없었던 젊은 학자들은, 문서를 빌리는 데만 열중하고 해독과 자료 연구는 제때 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100만 점 이상의 고문서는 30년 가까이 방치됐습니다.

어민을 재조명하겠다며 한 일이 오히려 수백 년간 고문서를 소중히 간직해오던 어민들에게 큰 상처를 준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생을 "고문서 반납"에

20대의 젊은 나이에 각지의 어촌에서 문서를 빌렸던 이 책의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저명한 학자가 된 50살에 큰 결단을 내립니다. 규모가 작은 학교로 직장을 옮겨서 빌려왔던 고문서를 반납하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죠. 그 일에 남은 삶 대부분을 보냅니다. 이 책은 그 반납의 여로에서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고문서를 돌려받은 어민들은 기뻐하며 새로운 고문서를 제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흔했던 창호 문에 바르는 종이를 '맹장지'라고 하는데, 많은 고문서는 재활용돼 그런 맹장지로 쓰였습니다.

어민들의 제보로 알게 된 맹장지를 뜯어서 들여다보는 등 다양한 고문헌을 조사하면서 저자는 새로운 발견을 해냅니다.

일본식 창호문 종이로 쓰인 고문서를 조사 중인 아미노 요시히코.일본식 창호문 종이로 쓰인 고문서를 조사 중인 아미노 요시히코.

어민은 "돼지"가 아니라 도시인

전근대 사회는 농경사회로만 알려졌었습니다. 그래서 농경지가 없는 어민, 이 책에서는 해민(海民, 바다 백성)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굶주렸을 거라는 게 주류 역사학의 인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문서를 통해 재구성해 본 해민의 삶은 그와 다릅니다. 조직적인 어업으로 큰 수입을 올리고, 1,000㎞ 거리를 항해하며 무역 거래를 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동네의 모습도 어업과 무역으로 번 돈으로 곡식을 거래하는 근대 도시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제도권 역사가 기록한 농경이나 토지 조세와는 동떨어진 분야라 국가나 학자에 의한 기록은 드물었습니다. 문헌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어촌도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잊혀졌던 것이죠.

수백 년 전 이미 '어족자원 보호'까지

어민들은 수백 년 전 이미 '환경보호'운동까지 했습니다. 가스미가우라 호수 주변 어민들은 자치조직을 만들고 1년에 한 번 모여서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서 어구를 제한하는 일을 했던 것이죠. 지금도 일본 어촌의 바다는 상당히 깨끗한 곳이 많은데 아마도 이런 역사 전통의 영향일 것입니다.

왕과 지배계층 중심의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제도권 밖의 어업과 해상 교역은 당대에는 고도로 정교화됐고 번영했습니다.

한국의 "바다 백성"은?

이 책의 저자 등의 연구로 일본에서 "바다 백성"의 역사는 상당히 복원됐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 책에 등장하는 고문서에는 대마도 어민이 제주도에서 전복을 사서 도쿄로 진상했다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중세시대 활발한 바다의 네트워크가 존재했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한반도 해안과 제주에서 서로는 중국, 동으로는 일본과 사할린을 왕래했을 "바다 백성" 선조들의 모습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요?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던 조선 시대 어부 안용복이나 오키나와, 필리핀에 표류한 기록을 남긴 조선 시대 어물장수 문순득은 역동적이고 다채로웠을 "바다 백성"의 삶 중 일부였을 겁니다. 하지만 우연히 기록에 남은 몇몇 선조의 삶의 조각에 대해서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한일 교류사에 관심 많은 문헌학자 김시덕 씨가 번역했습니다.

번역자인 문헌학자 김시덕 씨번역자인 문헌학자 김시덕 씨

고문서 반납 여행 아미노 요시히코 씀, 김시덕 옮김, 출판사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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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다”…어민의 역사
    • 입력 2018-05-17 08:30:28
    여의도책방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나향욱 전 교육부 국장이 신문 기자에게 한 말입니다.

비슷한 말을 한 일본 학자가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 역사학자 히라이즈미 기요시는 하층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겠다는 학생에게 "돼지에게도 역사가 있습니까?"라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 학계에도 이런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관을 반성하는 학자들이 나타납니다. 민중의 역사를 새로 연구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1949년부터 5년간 일본학자들은 각지의 어촌에서 고문서 100만 점 이상을 수집합니다. 공식 역사서에 없는 어민들의 진짜 역사를 연구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젊은 학자들의 배신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역량이 없었던 젊은 학자들은, 문서를 빌리는 데만 열중하고 해독과 자료 연구는 제때 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100만 점 이상의 고문서는 30년 가까이 방치됐습니다.

어민을 재조명하겠다며 한 일이 오히려 수백 년간 고문서를 소중히 간직해오던 어민들에게 큰 상처를 준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생을 "고문서 반납"에

20대의 젊은 나이에 각지의 어촌에서 문서를 빌렸던 이 책의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저명한 학자가 된 50살에 큰 결단을 내립니다. 규모가 작은 학교로 직장을 옮겨서 빌려왔던 고문서를 반납하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죠. 그 일에 남은 삶 대부분을 보냅니다. 이 책은 그 반납의 여로에서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고문서를 돌려받은 어민들은 기뻐하며 새로운 고문서를 제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흔했던 창호 문에 바르는 종이를 '맹장지'라고 하는데, 많은 고문서는 재활용돼 그런 맹장지로 쓰였습니다.

어민들의 제보로 알게 된 맹장지를 뜯어서 들여다보는 등 다양한 고문헌을 조사하면서 저자는 새로운 발견을 해냅니다.

일본식 창호문 종이로 쓰인 고문서를 조사 중인 아미노 요시히코.
어민은 "돼지"가 아니라 도시인

전근대 사회는 농경사회로만 알려졌었습니다. 그래서 농경지가 없는 어민, 이 책에서는 해민(海民, 바다 백성)은 기본적으로 가난하고 굶주렸을 거라는 게 주류 역사학의 인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문서를 통해 재구성해 본 해민의 삶은 그와 다릅니다. 조직적인 어업으로 큰 수입을 올리고, 1,000㎞ 거리를 항해하며 무역 거래를 해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동네의 모습도 어업과 무역으로 번 돈으로 곡식을 거래하는 근대 도시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제도권 역사가 기록한 농경이나 토지 조세와는 동떨어진 분야라 국가나 학자에 의한 기록은 드물었습니다. 문헌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어촌도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잊혀졌던 것이죠.

수백 년 전 이미 '어족자원 보호'까지

어민들은 수백 년 전 이미 '환경보호'운동까지 했습니다. 가스미가우라 호수 주변 어민들은 자치조직을 만들고 1년에 한 번 모여서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서 어구를 제한하는 일을 했던 것이죠. 지금도 일본 어촌의 바다는 상당히 깨끗한 곳이 많은데 아마도 이런 역사 전통의 영향일 것입니다.

왕과 지배계층 중심의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제도권 밖의 어업과 해상 교역은 당대에는 고도로 정교화됐고 번영했습니다.

한국의 "바다 백성"은?

이 책의 저자 등의 연구로 일본에서 "바다 백성"의 역사는 상당히 복원됐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 책에 등장하는 고문서에는 대마도 어민이 제주도에서 전복을 사서 도쿄로 진상했다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중세시대 활발한 바다의 네트워크가 존재했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한반도 해안과 제주에서 서로는 중국, 동으로는 일본과 사할린을 왕래했을 "바다 백성" 선조들의 모습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로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요?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던 조선 시대 어부 안용복이나 오키나와, 필리핀에 표류한 기록을 남긴 조선 시대 어물장수 문순득은 역동적이고 다채로웠을 "바다 백성"의 삶 중 일부였을 겁니다. 하지만 우연히 기록에 남은 몇몇 선조의 삶의 조각에 대해서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한일 교류사에 관심 많은 문헌학자 김시덕 씨가 번역했습니다.

번역자인 문헌학자 김시덕 씨
고문서 반납 여행 아미노 요시히코 씀, 김시덕 옮김, 출판사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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