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 “다 괜찮아”

입력 2018.05.20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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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생이 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 하고…. 마치 숙제처럼 던져지는 '인생의 관문'들은 그쯤 하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취직을 하면 사귀는 사람은 있느냐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꼬치꼬치 묻더니만, 그예 결혼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애는 언제 낳을 거냐는 질문이 쫓아다닌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서서 인생을 사는 걸까? 1번 문을 통과하면 2번 문이 열리는 그런 세계인 걸까? 결혼을 하든 말든, 애를 낳든 말든, 제발 가만히 좀 놔두면 안 되는 걸까?


표지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책은 내내 전투적이다. "그 부부는 왜 애를 안 낳아요?" 하고 불쑥불쑥 물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화난 여성들의 음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애가 없을 때는 그 부부의 선택일 수도 있고, 가슴 아픈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가족이든 친구든 동네 사람이든 생각 없이 말을 툭툭 던진다. "누가 문제에요? 용한 한의원 좀 소개해줘요?" "너는 좋겠다, 애도 없으니 여유 있겠네." 세상에는 왜 이리 '오지라퍼'들이 많은지…. 말하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말이겠지만, 이런 말들이 와 닿으면 말에서 가시가 돋아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댄다.

심지어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난생처음 본 면접관마저 상대가 '애 없는 기혼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장연설을 해댄다. "어허, 애국하려면 애를 낳아야지. 젊은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나!" 혹시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일을 쉬거나 회사 그만둘까 봐 여성을 뽑을까 말까 걱정하면서, 애 없는 여자에게는 왜 애를 안 낳느냐고 추궁이라니! 회사에서 왜 남의 사생활을 그리 따진단 말인가. 면접 자리에서도 나이 든 여성은 까닭 없이 죄지은 사람이 되기 일쑤인데, 훈화 말씀을 잔뜩 하고도 뽑아주지는 않는다. 화가 안 날 재간이 없다.

가족 모임에서 아이는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어느 모임에 나가도 '애가 몇 살이에요?'로 대동단결하는 사회. 그러다 보면 '애 없는 며느리'는 온갖 궂은일을 독차지하게 되고, '너희는 애가 없어 돈 들 곳이 없으니 더 부담하라'며 막무가내로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고, 심지어 조카 학비까지 떠맡기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카가 애 없는 삼촌 부부의 노후를 보장해주나? 턱도 없는 소리다.

「무자녀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동정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이 없는 상대를 깎아내리면서 노후에 자기가 더 살 만할 거라 합리화하다가도, 육아 때문에 자신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초라함을 느끼면 갑자기 상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비난하는 애어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본문 80쪽


'무자녀 여성'에 대해 쏟아지는 이런 모순적인 감정과 편견에 찬 태도를 보면 우리가 그동안 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해왔나, 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일하면서 애 낳아 키우느라 나름 종종거리며 살아왔던 게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즉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는 여성이 겪는 일들이 이렇게 터무니없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만큼 그녀들의 분노가 깜짝 놀랄 만큼 뜨겁고 맹렬하게 다가온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러나 모든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아니다. 위대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짐승만도 못한 어미도 존재한다.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몹쓸 짓을 서슴지 않는 부모가 종종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여성은 이러한 '모든 어머니'보다 아래 등급으로 인식되곤 한다. '엄마가 되지 않은 여자' '엄마의 길을 거부한 여자'를 보는 또래 여성들의 반응은 차갑다. "애도 안 낳아 본 여자가 뭘 알겠어" (중략) 출산을 경쟁으로 인식하고, 아이가 있고 없음으로 상하 구도를 만들려 한다.」본문 93쪽

무자녀 여성을 참지 못하는 적대적인 태도는 '정상적인 삶'이라고 믿어온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참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와 연결돼 있다. 너는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 왜 평범하게 살지 않느냐, 는 인식에서 나오는 편협한 사고방식에 다름 아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거나 포용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사회. 그리하여 '애 없는 기혼 여성'의 분노는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난 이들'에 대한 편견 가득한 시선에 대한 분노와 닿아있다.

「적당한 나이에 취직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적당한 나이에 아이를 낳고, 적당한 나이에 둘째를 낳는다…. 그런 적당한 삶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본문 166쪽


우리는 언제쯤 '나와 다른' 사람을 '틀리다'라고 손가락질하지 않고, 조금 더 너른 마음으로 인정하게 될까. 그것은 내가 다른 약자를 포용하는 '관대함'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더 갖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마주한 '나와는 다른'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만, 인생의 다른 어떤 장면에서 '남들과 다른 존재'가 돼 있을 지도 모를 나의 모습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당신은 당신으로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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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 “다 괜찮아”
    • 입력 2018-05-20 07:04:12
    여의도책방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생이 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 하고…. 마치 숙제처럼 던져지는 '인생의 관문'들은 그쯤 하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취직을 하면 사귀는 사람은 있느냐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꼬치꼬치 묻더니만, 그예 결혼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애는 언제 낳을 거냐는 질문이 쫓아다닌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서서 인생을 사는 걸까? 1번 문을 통과하면 2번 문이 열리는 그런 세계인 걸까? 결혼을 하든 말든, 애를 낳든 말든, 제발 가만히 좀 놔두면 안 되는 걸까?


표지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책은 내내 전투적이다. "그 부부는 왜 애를 안 낳아요?" 하고 불쑥불쑥 물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화난 여성들의 음성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부부가 애가 없을 때는 그 부부의 선택일 수도 있고, 가슴 아픈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가족이든 친구든 동네 사람이든 생각 없이 말을 툭툭 던진다. "누가 문제에요? 용한 한의원 좀 소개해줘요?" "너는 좋겠다, 애도 없으니 여유 있겠네." 세상에는 왜 이리 '오지라퍼'들이 많은지…. 말하는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말이겠지만, 이런 말들이 와 닿으면 말에서 가시가 돋아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댄다.

심지어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난생처음 본 면접관마저 상대가 '애 없는 기혼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장연설을 해댄다. "어허, 애국하려면 애를 낳아야지. 젊은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나!" 혹시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일을 쉬거나 회사 그만둘까 봐 여성을 뽑을까 말까 걱정하면서, 애 없는 여자에게는 왜 애를 안 낳느냐고 추궁이라니! 회사에서 왜 남의 사생활을 그리 따진단 말인가. 면접 자리에서도 나이 든 여성은 까닭 없이 죄지은 사람이 되기 일쑤인데, 훈화 말씀을 잔뜩 하고도 뽑아주지는 않는다. 화가 안 날 재간이 없다.

가족 모임에서 아이는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어느 모임에 나가도 '애가 몇 살이에요?'로 대동단결하는 사회. 그러다 보면 '애 없는 며느리'는 온갖 궂은일을 독차지하게 되고, '너희는 애가 없어 돈 들 곳이 없으니 더 부담하라'며 막무가내로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고, 심지어 조카 학비까지 떠맡기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카가 애 없는 삼촌 부부의 노후를 보장해주나? 턱도 없는 소리다.

「무자녀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동정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이 없는 상대를 깎아내리면서 노후에 자기가 더 살 만할 거라 합리화하다가도, 육아 때문에 자신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초라함을 느끼면 갑자기 상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비난하는 애어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본문 80쪽


'무자녀 여성'에 대해 쏟아지는 이런 모순적인 감정과 편견에 찬 태도를 보면 우리가 그동안 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해왔나, 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일하면서 애 낳아 키우느라 나름 종종거리며 살아왔던 게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즉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는 여성이 겪는 일들이 이렇게 터무니없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만큼 그녀들의 분노가 깜짝 놀랄 만큼 뜨겁고 맹렬하게 다가온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러나 모든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아니다. 위대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짐승만도 못한 어미도 존재한다.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몹쓸 짓을 서슴지 않는 부모가 종종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여성은 이러한 '모든 어머니'보다 아래 등급으로 인식되곤 한다. '엄마가 되지 않은 여자' '엄마의 길을 거부한 여자'를 보는 또래 여성들의 반응은 차갑다. "애도 안 낳아 본 여자가 뭘 알겠어" (중략) 출산을 경쟁으로 인식하고, 아이가 있고 없음으로 상하 구도를 만들려 한다.」본문 93쪽

무자녀 여성을 참지 못하는 적대적인 태도는 '정상적인 삶'이라고 믿어온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참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와 연결돼 있다. 너는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 왜 평범하게 살지 않느냐, 는 인식에서 나오는 편협한 사고방식에 다름 아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거나 포용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사회. 그리하여 '애 없는 기혼 여성'의 분노는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난 이들'에 대한 편견 가득한 시선에 대한 분노와 닿아있다.

「적당한 나이에 취직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적당한 나이에 아이를 낳고, 적당한 나이에 둘째를 낳는다…. 그런 적당한 삶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믿는 이들은 그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을 견디지 못한다.」 본문 166쪽


우리는 언제쯤 '나와 다른' 사람을 '틀리다'라고 손가락질하지 않고, 조금 더 너른 마음으로 인정하게 될까. 그것은 내가 다른 약자를 포용하는 '관대함'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더 갖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마주한 '나와는 다른'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만, 인생의 다른 어떤 장면에서 '남들과 다른 존재'가 돼 있을 지도 모를 나의 모습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당신은 당신으로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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