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사랑의 예술사’ 삶과 함께 걷는 사랑

입력 2018.05.22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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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도 결국 나온 대사다. '버닝'에서 등장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빈촌인 남산 아래와 부촌인 반포 거리만큼, 가깝고도 멀게 떨어져 있다. 중요한 건 사랑일까 삶일까 아니면 돈일까. '사회·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태초에 사랑이 ‘선험적’으로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시대에 따라 사랑의 정의가 바뀌며, 이를 그려내는 예술은 또한 그와 같은 걸음걸이로 변해간다. 예술사회학 분야에서 꾸준히 저서를 선보이고 있는 이미혜 교수가 새로 내놓은 책 사랑의 예술사의 시선이기도 하다.

사랑의 순간은 어떻게 시작될까(p.233)

낭만적 사랑이라는 신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의 질문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청초한 로테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는 마법이다. 저자는 근대라는 시대가 낳은 사랑의 모습이 낭만이라고 설명한다. 낭만은 계급적, 신분적 차이를 무너뜨리려 한다. 18세기의 중산층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유로운 선택과 사랑으로 결혼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언약으로 서로를 선택하는 것이 낭만이라면 가문 간의 약속은 부딪혀 무너뜨려야 할 벽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각성의 이유는 낭만적이지 않다. 새롭게 돈은 벌었지만, 권위를 상징하는 핏줄은 약했던 것이 근저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사랑을 근대라는 시대가 끌어내렸다.

결혼이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은 전에 없던 유형, 즉 결혼을 망설이는 여성을 만들어 냈다.(p.262)

제인 오스틴 Jane Austin의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사랑 없이는 결혼 없다'는 근대 낭만주의는 남녀의 성평등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오만과 편견’에서 여성들은 노래, 피아노, 자수 등으로 ‘단련’하며 남성의 고백을 기다렸다. 여전히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는 분업은, 자본주의 분업과도 잘 통했다.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진 것도 로테가 동생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모습, 즉 어머니로서의 품성이었다. 이러한 낭만적 사랑의 신화는 페미니즘이 등장하는 1960년대에 가서야 흔들리기 시작한다.

19세기의 중산층 젊은이들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집에서 교제했지만 (20세기 초) 노동자 계층은 그럴만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밖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p.359)

바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남녀가 만나는 ‘데이트’가 탄생하는 지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1927년 유성영화가 등장한 이후,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탄생한 신중산층은 '영화'를 환영했다. 저자는 경제적 토대를 꼼꼼히 살핀다. 중산층은 영화관을 지저분하고 풍기문란한 곳으로 생각했으나, 얇은 지갑으로 즐길 거리를 찾던 신중산층에게(p.361) 영화만큼 적합한 문화 양식도, 영화관만 한 데이트 장소도 없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까지 굳건했던 가부장제와 그 대척점인 수동적인 여성상은 1973년까지 이어진 경제 호황과 함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차츰 그 지루함을 벗어 던진다. 이 과정은 현실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저자가 예를 든 애디스 보니것 Edith Vonnegut의 Hot!!! ‘핫’이라는 그림은 가정에 얶매인 여성을 풍자한다. 사회는 주부가 가정을 다스리는 여신이라고 추켜올리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보상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 허드렛일에 불과했다(p.395)는 저자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진 출처 : www.edithvonnegut.com][사진 출처 : www.edithvonnegut.com]


1975년 이후 기혼 여성의 취업 증가로 여성의 경제력이 강화되면서 반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강한 남성성이다. '말보로 맨', 영화 '람보' 등 대중문화 곳곳에서 나타났던 이런 현상은 오히려 그 시대에 느꼈던 남성의 '위기'와 '불안'을 반영한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했다.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역사서이지만 쉽게 책장이 넘어간다. 저자는 사실상 인류사 전체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뚫고 나간다. 약탈적 사랑이라고 명명한 고대를 시작으로, 궁정식 사랑으로 집약되는 중세, 충동적 사랑의 시대였던 르네상스를 지나, 퇴폐적 사랑 - 바로크 시대를 넘어, 낭만적 때론 일탈적 사랑을 보여줬던 근대로 나아가 마지막으로 해방된 그러나 불안한 사랑의 시대인 현대를 관통하며 사랑에 대한 에피스테메(episteme) 즉 인식의 틀을 풀어낸다.

책의 부제는 문학·미술·영화에 나타난 사랑과 에로티시즘이다. 신화와 미술, 소설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예술의 거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는 데서 오는 디테일의 풍성함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해의 깊이를 더해주고, 저자의 나름의 시각으로 골라낸 도록을 보고 있으면, 마음 가볍게 미술관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저자가 머리말에도 썼듯, 이 책은 그림으로 읽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일러두기. 진한 글씨는 저자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랑의 예술사] 이미혜 지음, 경북대학교출판부,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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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사랑의 예술사’ 삶과 함께 걷는 사랑
    • 입력 2018-05-22 07:07:28
    여의도책방
"사랑해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도 결국 나온 대사다. '버닝'에서 등장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빈촌인 남산 아래와 부촌인 반포 거리만큼, 가깝고도 멀게 떨어져 있다. 중요한 건 사랑일까 삶일까 아니면 돈일까. '사회·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태초에 사랑이 ‘선험적’으로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시대에 따라 사랑의 정의가 바뀌며, 이를 그려내는 예술은 또한 그와 같은 걸음걸이로 변해간다. 예술사회학 분야에서 꾸준히 저서를 선보이고 있는 이미혜 교수가 새로 내놓은 책 사랑의 예술사의 시선이기도 하다.

사랑의 순간은 어떻게 시작될까(p.233)

낭만적 사랑이라는 신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의 질문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가 청초한 로테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는 마법이다. 저자는 근대라는 시대가 낳은 사랑의 모습이 낭만이라고 설명한다. 낭만은 계급적, 신분적 차이를 무너뜨리려 한다. 18세기의 중산층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유로운 선택과 사랑으로 결혼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언약으로 서로를 선택하는 것이 낭만이라면 가문 간의 약속은 부딪혀 무너뜨려야 할 벽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각성의 이유는 낭만적이지 않다. 새롭게 돈은 벌었지만, 권위를 상징하는 핏줄은 약했던 것이 근저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사랑을 근대라는 시대가 끌어내렸다.

결혼이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은 전에 없던 유형, 즉 결혼을 망설이는 여성을 만들어 냈다.(p.262)

제인 오스틴 Jane Austin의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사랑 없이는 결혼 없다'는 근대 낭만주의는 남녀의 성평등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오만과 편견’에서 여성들은 노래, 피아노, 자수 등으로 ‘단련’하며 남성의 고백을 기다렸다. 여전히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는 분업은, 자본주의 분업과도 잘 통했다.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진 것도 로테가 동생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모습, 즉 어머니로서의 품성이었다. 이러한 낭만적 사랑의 신화는 페미니즘이 등장하는 1960년대에 가서야 흔들리기 시작한다.

19세기의 중산층 젊은이들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집에서 교제했지만 (20세기 초) 노동자 계층은 그럴만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밖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p.359)

바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남녀가 만나는 ‘데이트’가 탄생하는 지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1927년 유성영화가 등장한 이후,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탄생한 신중산층은 '영화'를 환영했다. 저자는 경제적 토대를 꼼꼼히 살핀다. 중산층은 영화관을 지저분하고 풍기문란한 곳으로 생각했으나, 얇은 지갑으로 즐길 거리를 찾던 신중산층에게(p.361) 영화만큼 적합한 문화 양식도, 영화관만 한 데이트 장소도 없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까지 굳건했던 가부장제와 그 대척점인 수동적인 여성상은 1973년까지 이어진 경제 호황과 함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차츰 그 지루함을 벗어 던진다. 이 과정은 현실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저자가 예를 든 애디스 보니것 Edith Vonnegut의 Hot!!! ‘핫’이라는 그림은 가정에 얶매인 여성을 풍자한다. 사회는 주부가 가정을 다스리는 여신이라고 추켜올리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보상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 허드렛일에 불과했다(p.395)는 저자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진 출처 : www.edithvonnegut.com]

1975년 이후 기혼 여성의 취업 증가로 여성의 경제력이 강화되면서 반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강한 남성성이다. '말보로 맨', 영화 '람보' 등 대중문화 곳곳에서 나타났던 이런 현상은 오히려 그 시대에 느꼈던 남성의 '위기'와 '불안'을 반영한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했다.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역사서이지만 쉽게 책장이 넘어간다. 저자는 사실상 인류사 전체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뚫고 나간다. 약탈적 사랑이라고 명명한 고대를 시작으로, 궁정식 사랑으로 집약되는 중세, 충동적 사랑의 시대였던 르네상스를 지나, 퇴폐적 사랑 - 바로크 시대를 넘어, 낭만적 때론 일탈적 사랑을 보여줬던 근대로 나아가 마지막으로 해방된 그러나 불안한 사랑의 시대인 현대를 관통하며 사랑에 대한 에피스테메(episteme) 즉 인식의 틀을 풀어낸다.

책의 부제는 문학·미술·영화에 나타난 사랑과 에로티시즘이다. 신화와 미술, 소설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예술의 거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는 데서 오는 디테일의 풍성함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이해의 깊이를 더해주고, 저자의 나름의 시각으로 골라낸 도록을 보고 있으면, 마음 가볍게 미술관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저자가 머리말에도 썼듯, 이 책은 그림으로 읽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일러두기. 진한 글씨는 저자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랑의 예술사] 이미혜 지음, 경북대학교출판부,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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