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등급’만 빠진 점수제…장애인 복지는 어디로?

입력 2018.05.24 (19:43) 수정 2018.05.2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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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추경진 씨의 방에는 일과와 챙겨 먹을 약을 적어둔 메모지가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아침 아홉 시면 찾아오는 활동보조인을 위해서입니다. 29살 때 사고로 전신이 마비됐고, 그 뒤 15년을 장애시설에서 보내다 2년 전 '탈시설'에 성공했습니다.

시설은 나왔지만, 대부분의 활동에 도움이 필요한 추 씨에게 활동보조인은 필수적입니다. 올해부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싶지만, 교과서 한 장을 넘기는 것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추 씨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한 달 630시간을 넘지 못합니다. 밤 10시, 보조인이 돌아가고 나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는 장애인 대부분이 겪는 고민입니다.


그나마 추 씨는 많이 지원을 받는 편입니다. 조사원이 최대 470점까지 부여하는 '활동지원 인정 점수'가 쓸 수 있는 시간을 결정합니다. 1급부터 6급까지 있는 장애 등급 가운데 4급부터는 신청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등급을 결정하는 기준은 물론, 활동 지원 인정 점수를 매기는 기준이 획일적이고 일방적이라는 겁니다. 기존 등급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평가도구를 만들겠다고 밝힌 현 정부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기준을 추진하고 있는 건 마찬가집니다.

다음 달 공개 예정인 새 평가표를 먼저 입수해 살펴봤더니, 의학적 기준으로 장애인의 복지 필요도를 재단한다는 비판을 받아 온 활동 지원 인정 조사표와 배점만 다를 뿐 대부분 항목이 겹칩니다.


'걷기'를 '실내 보행'과 '실외 이동'으로 나누고, '잠자리에서 자세 바꾸기'를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로 바꾸는 등 표현만 달라졌습니다. 발달장애와 시각장애인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수용해 해당 항목은 추가됐지만, 그동안 추가 급여를 받던 1인 독거/취약 계층 장애인의 혜택은 상대적으로 축소됐습니다.

예를 들어 새 평가표에서 혼자 사는 장애인은 36점을 받습니다. 하지만 주위에 돌보는 사람이 1명만 있으면 점수는 12점으로 크게 떨어집니다.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사회생활을 하는 경우에도 점수는 12점에 그칩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가족이 과연 장애인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까요? '장애인 가족을 둔 사람은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거냐' 같은 비판에 귀 기울여, 국가가 장애인 부양책임을 나눠서 지겠다는 게 개정 취지였던 만큼 쉽게 이해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행정 편의적인 기준도 있습니다. 똑같이 승강기가 없는 집에 살고 이동에 제한이 있더라도 지하에 살면 2점이고 2층에 살면 4점을 받습니다. 지체 장애인 입장에서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내려가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요? 혼자 식사할 수 없으면 60점이지만, 공격·돌발행동과 자해처럼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 특성에는 최대 6점밖에 부여하지 않은 것도 의문을 남깁니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대해 기능 제한에 초점을 뒀다고 설명했습니다. '기능 제한', 곧 '신체 기능 제한'을 말합니다. 독거/취약 계층 등에 대한 고려가 줄어든 점도 인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생활 환경이 안 좋은 장애인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앞으로 기능 제한 정도에 따라 고르게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조정했다는 겁니다. 또 기자가 입수한 새 평가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내용이라며, 논의에 따라 세부 사항은 조정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한 포털 사이트에만 1,200개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장애인 구역에 주차하는 사람 치고 장애인 없더라'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역시 많이 달린 댓글 중 하나였던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도움을 주자'는 주장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런데 일견 문제 될 것 없어 보이는 이 문장에는 함정이 두 개나 숨어있습니다. '꼭'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필요'는 어떻게 판단할지 생각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심장·신장 등 내부기관 장애가 있는 경우 등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거동 불편, 신체 자유도에만 중점을 둔 조사표를 따르면 낙제점입니다.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신장 투석을 마친 뒤나 복수에 물이 찼을 때 등 하루 몇 시간이라도 활동 보조가 필요하고, 원하는 공부나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에 맞는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지 필요도를 측정하는 질문을 수십, 수백 가지로 늘리면 해결될까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일하는 양유진 활동가는 그런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질문을 많이 만들면 장애인의 욕구가 입체적으로 반영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측정 장치가 많아질수록 행정 현장에서는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겁니다. 'A 항목을 선택 안 했으니까 삭감', 'B 기준에 모자라니까 또 그만큼 삭감'….

영국은 2008년부터 '개인 예산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직접 예산 계획을 짜고, 원하는 서비스를 고르는 등 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합니다. '뭐가 필요한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는 원칙을 따랐더니, 예산의 효율이 높아져 오히려 전보다 비용이 절감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참고 :이용자 선택권 향상을 위한 장애인복지서비스 유연화 방안 연구)

문재인 정부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정부 출범 1년 성과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장애인의 다양한 욕구를 종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겠다는 취지는 장애계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취재하며 만난 장애인 단체는 등급에서 점수제로 바뀌는 것뿐 아니냐며 우려했습니다. 다음 달 발표를 앞둔 새 평가표도 우려를 뒷받침합니다. 정책을 추진하다 보면 처음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달라진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책 이용자의 공감 없이 '성과'를 뽐내는 건 자화자찬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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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등급’만 빠진 점수제…장애인 복지는 어디로?
    • 입력 2018-05-24 19:43:15
    • 수정2018-05-24 19:45:08
    취재후·사건후

쉰 살 추경진 씨의 방에는 일과와 챙겨 먹을 약을 적어둔 메모지가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아침 아홉 시면 찾아오는 활동보조인을 위해서입니다. 29살 때 사고로 전신이 마비됐고, 그 뒤 15년을 장애시설에서 보내다 2년 전 '탈시설'에 성공했습니다.

시설은 나왔지만, 대부분의 활동에 도움이 필요한 추 씨에게 활동보조인은 필수적입니다. 올해부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싶지만, 교과서 한 장을 넘기는 것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추 씨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은 한 달 630시간을 넘지 못합니다. 밤 10시, 보조인이 돌아가고 나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는 장애인 대부분이 겪는 고민입니다.


그나마 추 씨는 많이 지원을 받는 편입니다. 조사원이 최대 470점까지 부여하는 '활동지원 인정 점수'가 쓸 수 있는 시간을 결정합니다. 1급부터 6급까지 있는 장애 등급 가운데 4급부터는 신청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등급을 결정하는 기준은 물론, 활동 지원 인정 점수를 매기는 기준이 획일적이고 일방적이라는 겁니다. 기존 등급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평가도구를 만들겠다고 밝힌 현 정부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기준을 추진하고 있는 건 마찬가집니다.

다음 달 공개 예정인 새 평가표를 먼저 입수해 살펴봤더니, 의학적 기준으로 장애인의 복지 필요도를 재단한다는 비판을 받아 온 활동 지원 인정 조사표와 배점만 다를 뿐 대부분 항목이 겹칩니다.


'걷기'를 '실내 보행'과 '실외 이동'으로 나누고, '잠자리에서 자세 바꾸기'를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로 바꾸는 등 표현만 달라졌습니다. 발달장애와 시각장애인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수용해 해당 항목은 추가됐지만, 그동안 추가 급여를 받던 1인 독거/취약 계층 장애인의 혜택은 상대적으로 축소됐습니다.

예를 들어 새 평가표에서 혼자 사는 장애인은 36점을 받습니다. 하지만 주위에 돌보는 사람이 1명만 있으면 점수는 12점으로 크게 떨어집니다.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사회생활을 하는 경우에도 점수는 12점에 그칩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가족이 과연 장애인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까요? '장애인 가족을 둔 사람은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거냐' 같은 비판에 귀 기울여, 국가가 장애인 부양책임을 나눠서 지겠다는 게 개정 취지였던 만큼 쉽게 이해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행정 편의적인 기준도 있습니다. 똑같이 승강기가 없는 집에 살고 이동에 제한이 있더라도 지하에 살면 2점이고 2층에 살면 4점을 받습니다. 지체 장애인 입장에서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내려가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요? 혼자 식사할 수 없으면 60점이지만, 공격·돌발행동과 자해처럼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 특성에는 최대 6점밖에 부여하지 않은 것도 의문을 남깁니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대해 기능 제한에 초점을 뒀다고 설명했습니다. '기능 제한', 곧 '신체 기능 제한'을 말합니다. 독거/취약 계층 등에 대한 고려가 줄어든 점도 인정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생활 환경이 안 좋은 장애인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앞으로 기능 제한 정도에 따라 고르게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조정했다는 겁니다. 또 기자가 입수한 새 평가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내용이라며, 논의에 따라 세부 사항은 조정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한 포털 사이트에만 1,200개 넘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장애인 구역에 주차하는 사람 치고 장애인 없더라'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역시 많이 달린 댓글 중 하나였던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도움을 주자'는 주장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런데 일견 문제 될 것 없어 보이는 이 문장에는 함정이 두 개나 숨어있습니다. '꼭'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필요'는 어떻게 판단할지 생각하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심장·신장 등 내부기관 장애가 있는 경우 등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거동 불편, 신체 자유도에만 중점을 둔 조사표를 따르면 낙제점입니다. 그렇다고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신장 투석을 마친 뒤나 복수에 물이 찼을 때 등 하루 몇 시간이라도 활동 보조가 필요하고, 원하는 공부나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에 맞는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지 필요도를 측정하는 질문을 수십, 수백 가지로 늘리면 해결될까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일하는 양유진 활동가는 그런 방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질문을 많이 만들면 장애인의 욕구가 입체적으로 반영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측정 장치가 많아질수록 행정 현장에서는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겁니다. 'A 항목을 선택 안 했으니까 삭감', 'B 기준에 모자라니까 또 그만큼 삭감'….

영국은 2008년부터 '개인 예산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직접 예산 계획을 짜고, 원하는 서비스를 고르는 등 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합니다. '뭐가 필요한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안다'는 원칙을 따랐더니, 예산의 효율이 높아져 오히려 전보다 비용이 절감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참고 :이용자 선택권 향상을 위한 장애인복지서비스 유연화 방안 연구)

문재인 정부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정부 출범 1년 성과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장애인의 다양한 욕구를 종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겠다는 취지는 장애계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취재하며 만난 장애인 단체는 등급에서 점수제로 바뀌는 것뿐 아니냐며 우려했습니다. 다음 달 발표를 앞둔 새 평가표도 우려를 뒷받침합니다. 정책을 추진하다 보면 처음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달라진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책 이용자의 공감 없이 '성과'를 뽐내는 건 자화자찬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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