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미술이야기꾼’의 리더십 강의

입력 2018.05.2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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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꾼'. 학고재 갤러리와 서울미술관장을 지냈던 이주헌 씨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말이 있을까. 한겨레 문화부의 미술 담당 기자였던 시절부터 이주헌 씨의 글을 즐겨 보았던 나로서는 이주헌 씨의 새 책이 반가우면서도, 미술이야기꾼의 '리더의 명화수업'이라니, 조금은 의아했다.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의일까? 리더를 키워낸 명화 이야기일까?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 책을 손에 든 순간 한 번에 읽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미술이야기꾼이 강의실로 돌아왔다.

책은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을 풀어가면서, '리더의 눈, 귀, 가슴'으로 나눠 얘기를 끌어간다. '공포에 저항하고 공포를 다스리라'는 항목에 앙리 드 그루의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1898)」작품을 소개하는 식이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독일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 판결을 받았을 때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기고한 에밀 졸라. 그는 프랑스 양심에 불을 댕겼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듬해 중상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갖가지 협박에 시달리며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드레퓌스는 체포된 지 10년이 되는 1904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에밀 졸라는 1902년 일산화탄소중독으로 사망해 반유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앙리 드 그루의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 본문 311쪽앙리 드 그루의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 본문 311쪽

얼굴도 확인할 수 없는 군중이 달려들며 비난과 증오를 쏟아낸다.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용기 있는 지식인을 대하는 대중의 분노는 이런 것이다. '불의에 맞서 양심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에밀 졸라'에 대한 긴 설명보다 한 장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용기를 되새기게 하는 힘이 있다. '시각적인 상'이 가지는 강력한 환기력이다. 명화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보며 리더의 소양을 짚어보다 보면 어느새 '미술이야기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경청하는 리더'로는 조지 피터 알렉산더 힐리의 「에이브러햄 링컨(1869)」이 등장한다.

「반듯하게 다문 입술과 안정감 있게 턱을 받친 손도 링컨의 성품을 잘 드러내 준다. 이런 자세는 말하기에 편한 자세는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포즈를 취한 것은 '나는 말할 의사가 없다, 나에게는 당신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본문 147쪽

그림이 담고 있는 링컨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배경, 백악관에 그림이 걸렸다가 내려졌던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실력은 역사 속에 손꼽히는 리더였던 잔 다르크나 나폴레옹, 알렉산드로스 대왕 등을 섭렵하며 재미나게 이어진다. 어떤 작품은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어떤 작품은 익숙하지 않지만 '리더'라는 한 쾌로 연결되어 책장 넘어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앙투안 장 그로의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1804)’앙투안 장 그로의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1804)’

1799년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 군대는 시리아의 자파에서 흑사병이라는 장애에 부닥친다. 당시 임시 병원을 찾은 나폴레옹은 맨손으로 환자를 만지며 병세를 걱정하고, 이 모습은 나병 환자의 몸을 만지는 예수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저자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부하들의 고통과 두려움에 동참하는' 나폴레옹의 공감 능력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읽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자파에서 철수할 때 나폴레옹이 병자들을 독살했다는 비난이 퍼지자, 자신이 병든 군인들을 얼마나 염려했는지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제작을 지시한 그림이었다. 말하자면 그 시대의 '정정보도'였달까. 저자는 '프랑스 내에서는 곧 이 그림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나폴레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예술가는 이렇게 역사 속 영웅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대신 전달하기도 하고, 각 시대가 요구한 영웅상을 시각화해서 대중에게 널리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예술가 자체가 사회를 혁신으로 이끄는 또 다른 의미의 리더라는 것이다. 리더의 덕목으로 예술가의 상징이라고 할만한 상상력과 창의력, 전체를 통찰하는 시각 등을 꼽는 저자에게서 예술가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

「예술가는 특정한 조직의 책임과 권한을 떠맡아 그 구성원이 주어진 목표나 방향으로 나가도록 이끄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사회와 시대를 통찰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그들이 부단한 상상과 창의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돕는다. 사람들을 상황의 노예가 아니라 상황의 주도자가 되도록 감화하고 격려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의 상상력은 사회 전체의 상상력을 고무하고 확장하는 중요한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다.」본문 83쪽

대통령 탄핵과 '갑질' 논란을 겪으면서 우리 시대의 리더는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이 커지고 있는 시기. 미술이야기꾼의 손에 이끌려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고, 명화 속을 산책하는 기분을 내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웁다.

【리더의 명화수업;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타인의 삶을 이끄는 사람이 되는 법】이주헌 지음, 출판사 아트북스,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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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미술이야기꾼’의 리더십 강의
    • 입력 2018-05-26 07:06:48
    여의도책방
'미술이야기꾼'. 학고재 갤러리와 서울미술관장을 지냈던 이주헌 씨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말이 있을까. 한겨레 문화부의 미술 담당 기자였던 시절부터 이주헌 씨의 글을 즐겨 보았던 나로서는 이주헌 씨의 새 책이 반가우면서도, 미술이야기꾼의 '리더의 명화수업'이라니, 조금은 의아했다.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의일까? 리더를 키워낸 명화 이야기일까? 하지만 의아함도 잠시. 책을 손에 든 순간 한 번에 읽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미술이야기꾼이 강의실로 돌아왔다.

책은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을 풀어가면서, '리더의 눈, 귀, 가슴'으로 나눠 얘기를 끌어간다. '공포에 저항하고 공포를 다스리라'는 항목에 앙리 드 그루의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1898)」작품을 소개하는 식이다.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독일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 판결을 받았을 때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기고한 에밀 졸라. 그는 프랑스 양심에 불을 댕겼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듬해 중상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갖가지 협박에 시달리며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드레퓌스는 체포된 지 10년이 되는 1904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에밀 졸라는 1902년 일산화탄소중독으로 사망해 반유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앙리 드 그루의 ‘모욕당하는 에밀 졸라’ 본문 311쪽
얼굴도 확인할 수 없는 군중이 달려들며 비난과 증오를 쏟아낸다.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용기 있는 지식인을 대하는 대중의 분노는 이런 것이다. '불의에 맞서 양심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에밀 졸라'에 대한 긴 설명보다 한 장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용기를 되새기게 하는 힘이 있다. '시각적인 상'이 가지는 강력한 환기력이다. 명화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보며 리더의 소양을 짚어보다 보면 어느새 '미술이야기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경청하는 리더'로는 조지 피터 알렉산더 힐리의 「에이브러햄 링컨(1869)」이 등장한다.

「반듯하게 다문 입술과 안정감 있게 턱을 받친 손도 링컨의 성품을 잘 드러내 준다. 이런 자세는 말하기에 편한 자세는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포즈를 취한 것은 '나는 말할 의사가 없다, 나에게는 당신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본문 147쪽

그림이 담고 있는 링컨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배경, 백악관에 그림이 걸렸다가 내려졌던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실력은 역사 속에 손꼽히는 리더였던 잔 다르크나 나폴레옹, 알렉산드로스 대왕 등을 섭렵하며 재미나게 이어진다. 어떤 작품은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어떤 작품은 익숙하지 않지만 '리더'라는 한 쾌로 연결되어 책장 넘어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앙투안 장 그로의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1804)’
1799년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 군대는 시리아의 자파에서 흑사병이라는 장애에 부닥친다. 당시 임시 병원을 찾은 나폴레옹은 맨손으로 환자를 만지며 병세를 걱정하고, 이 모습은 나병 환자의 몸을 만지는 예수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저자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부하들의 고통과 두려움에 동참하는' 나폴레옹의 공감 능력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읽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자파에서 철수할 때 나폴레옹이 병자들을 독살했다는 비난이 퍼지자, 자신이 병든 군인들을 얼마나 염려했는지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제작을 지시한 그림이었다. 말하자면 그 시대의 '정정보도'였달까. 저자는 '프랑스 내에서는 곧 이 그림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나폴레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예술가는 이렇게 역사 속 영웅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대신 전달하기도 하고, 각 시대가 요구한 영웅상을 시각화해서 대중에게 널리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예술가 자체가 사회를 혁신으로 이끄는 또 다른 의미의 리더라는 것이다. 리더의 덕목으로 예술가의 상징이라고 할만한 상상력과 창의력, 전체를 통찰하는 시각 등을 꼽는 저자에게서 예술가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
「예술가는 특정한 조직의 책임과 권한을 떠맡아 그 구성원이 주어진 목표나 방향으로 나가도록 이끄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사회와 시대를 통찰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그들이 부단한 상상과 창의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도록 돕는다. 사람들을 상황의 노예가 아니라 상황의 주도자가 되도록 감화하고 격려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들의 상상력은 사회 전체의 상상력을 고무하고 확장하는 중요한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다.」본문 83쪽

대통령 탄핵과 '갑질' 논란을 겪으면서 우리 시대의 리더는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이 커지고 있는 시기. 미술이야기꾼의 손에 이끌려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고, 명화 속을 산책하는 기분을 내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웁다.

【리더의 명화수업;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타인의 삶을 이끄는 사람이 되는 법】이주헌 지음, 출판사 아트북스,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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