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무지개처럼 사라진 작가 ‘봄봄’ 김유정

입력 2018.05.2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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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 [금따는 콩밭]의 김유정은 만 스물아홉에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기고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무지개처럼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사라졌다'고 하는 작가, 김유정의 손을 거치면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빛을 낸다'고 했다. 마름의 딸인 점순이가 하릴없이 수탉들을 드잡이시켜 순박한 소년을 바짝 약 올리고, 성례를 안 시켜준다며 장인과 대판 싸우기도 하는,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애틋한 정이 가는 서민들이다. 알싸한 동백꽃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김유정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 배경이 너무나 순박하고 해학적이어서 김유정 본인의 비극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김유정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고 말을 더듬었으며, 청년이 되어서는 빈곤에 시달리며 지독한 고통을 동반한 병을 안고 살았다.

"그 편지를 안 썼더라면 작품 하나를 더 갖게 되었을지도…."

김유정이 글을 쓰게 된 것은 명창으로 소문난 박록주에 대한 연애편지를 쓰면서부터다. 박록주에 대한 김유정의 연애편지 공세는 당대의 문단에서는 유명한 일이었다. 김유정의 연서는 나이 어린 가난한 학생이 유명 가수에게 보내는 치기 어린 애정의 수준을 넘어서서 스토커에 가까울 만큼 집요한 부분이 있었다. 이미 머리를 올려준 남편이 있던 기생 박록주가 또 다른 연인을 만나는 것을 눈치챈 김유정은 박록주를 쫓아다니며 편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김유정은 김유정대로 협박 조의 편지를 보내오며 쉬임없이 쫓아다녔다. "어제저녁에 네가 천향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 만일 그때에 만났으면 너를 죽였을 것이다." 김유정은 이런 내용의 혈서를 서슴없이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그때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아 한참을 떨곤 했다.」박록주[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 274쪽

「나는 당신을 진실로 모릅니다. 그러기에 일면식도 없는 당신에게, 내가 대담히 편지를 하였고 매일과 가치 그 회답이 오기를 충성으로 기다렸든 것입니다. 나의 편지가 당신에게 가서 얼만한 대접을 받는다, 얼마큼 이해될 수 있는가, 거기 관하야 일절 괘념하야 본 일이 없었읍니다.(생략) 만일 그때 그 편지를 안 썼드라면 혹은 작품 하나를 더 갖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김유정[병상의 생각] 337쪽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타인이 필요한가!

[유정의 사랑]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김유정의 주변 인물들이 각종 문학지나 잡지에 투고한 글과 증언, 남아 있는 자료들을 통해 김유정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1990년대 배경의 하리와 유정, 두 남녀의 이야기가 이중주처럼 흐른다. 작가 전상국은 '전기, 혹은 평전의 상투적 일대기 기술이 아닌 좀 독특한 구조의 소설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젊은 두 주인공의 현실적인 고민과 김유정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날줄과 씨줄로 서로 엇갈리며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탐험한다.

「나는 그 3년 정도의 시간을 죽음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무기력이었다. 무기력이 심해지면 무감각해진다. 나는 의사한테 말했다. 손가락이 부러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아요.」364쪽

「신을 가진 자는 살 수 있다. 우상을 가진 자도 살 수 있다. 적을 가진 자도 살 수 있다. 벗을 가진 자도 살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없어도 관객을 가진 자는 살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신뢰하고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타인이 필요한가!」368쪽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김유정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글을 쓴 것은, 글 쓰는 일이 김유정에게는 유일한 신명 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몇몇 단편이 유명 신문에 입상하게 되면서 김유정은 봄날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됐다. 김유정은 글을 써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병을 고치면 더 좋은 날들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같은 폐결핵을 앓고 있던 동료 작가, [날개]를 쓴 이상이 보기에 김유정의 상태는 자신만큼 희망이 없어 보였다. 김유정이라면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에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김유정에게 찾아와 함께 자살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김유정은 살고 싶었다.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 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십칠 세를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생략) "이것 좀 보십시오."하고 풀어헤치는 유정의 젖가슴은 초롱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단말마의 호흡이 서글프다.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유정은 운다. 울 수 있는 외의 그는 온갖 표정을 다 망각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 [실화] 397쪽


이 책을 다시 만난 건 꼬박 25년 만이다. [유정의 사랑]은 김유정 탄생 110주년에 즈음해 다시 출간됐다.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그 당시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독자들을 가르치려 하는 지적인 허세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인간 군상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감춰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작가 김유정의 현실은 '염인증'에 걸렸다며 사람들을 혐오하고, 무슨 일이든 햇볕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 싫다며 이불 속에서만 지내려 했었다고 한다. 비극적이고 우울한 삶 속에서도 이렇게 찬란한 작품들이 나온다. [봄봄] [금따는 콩밭] 등 김유정의 소설을 아끼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한 번쯤 그 아이러니를 탐구하기를 권한다.

【유정의 사랑】 전상국 장편소설, 새움출판사,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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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무지개처럼 사라진 작가 ‘봄봄’ 김유정
    • 입력 2018-05-27 07:05:05
    여의도책방
[봄봄] [금따는 콩밭]의 김유정은 만 스물아홉에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기고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무지개처럼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사라졌다'고 하는 작가, 김유정의 손을 거치면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빛을 낸다'고 했다. 마름의 딸인 점순이가 하릴없이 수탉들을 드잡이시켜 순박한 소년을 바짝 약 올리고, 성례를 안 시켜준다며 장인과 대판 싸우기도 하는,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애틋한 정이 가는 서민들이다. 알싸한 동백꽃 향기가 나는 것 같은 김유정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 배경이 너무나 순박하고 해학적이어서 김유정 본인의 비극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김유정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고 말을 더듬었으며, 청년이 되어서는 빈곤에 시달리며 지독한 고통을 동반한 병을 안고 살았다.

"그 편지를 안 썼더라면 작품 하나를 더 갖게 되었을지도…."

김유정이 글을 쓰게 된 것은 명창으로 소문난 박록주에 대한 연애편지를 쓰면서부터다. 박록주에 대한 김유정의 연애편지 공세는 당대의 문단에서는 유명한 일이었다. 김유정의 연서는 나이 어린 가난한 학생이 유명 가수에게 보내는 치기 어린 애정의 수준을 넘어서서 스토커에 가까울 만큼 집요한 부분이 있었다. 이미 머리를 올려준 남편이 있던 기생 박록주가 또 다른 연인을 만나는 것을 눈치챈 김유정은 박록주를 쫓아다니며 편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김유정은 김유정대로 협박 조의 편지를 보내오며 쉬임없이 쫓아다녔다. "어제저녁에 네가 천향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 만일 그때에 만났으면 너를 죽였을 것이다." 김유정은 이런 내용의 혈서를 서슴없이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그때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아 한참을 떨곤 했다.」박록주[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 274쪽

「나는 당신을 진실로 모릅니다. 그러기에 일면식도 없는 당신에게, 내가 대담히 편지를 하였고 매일과 가치 그 회답이 오기를 충성으로 기다렸든 것입니다. 나의 편지가 당신에게 가서 얼만한 대접을 받는다, 얼마큼 이해될 수 있는가, 거기 관하야 일절 괘념하야 본 일이 없었읍니다.(생략) 만일 그때 그 편지를 안 썼드라면 혹은 작품 하나를 더 갖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김유정[병상의 생각] 337쪽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타인이 필요한가!

[유정의 사랑]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김유정의 주변 인물들이 각종 문학지나 잡지에 투고한 글과 증언, 남아 있는 자료들을 통해 김유정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1990년대 배경의 하리와 유정, 두 남녀의 이야기가 이중주처럼 흐른다. 작가 전상국은 '전기, 혹은 평전의 상투적 일대기 기술이 아닌 좀 독특한 구조의 소설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젊은 두 주인공의 현실적인 고민과 김유정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날줄과 씨줄로 서로 엇갈리며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탐험한다.

「나는 그 3년 정도의 시간을 죽음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무기력이었다. 무기력이 심해지면 무감각해진다. 나는 의사한테 말했다. 손가락이 부러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아요.」364쪽

「신을 가진 자는 살 수 있다. 우상을 가진 자도 살 수 있다. 적을 가진 자도 살 수 있다. 벗을 가진 자도 살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없어도 관객을 가진 자는 살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신뢰하고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타인이 필요한가!」368쪽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김유정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글을 쓴 것은, 글 쓰는 일이 김유정에게는 유일한 신명 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몇몇 단편이 유명 신문에 입상하게 되면서 김유정은 봄날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됐다. 김유정은 글을 써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병을 고치면 더 좋은 날들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같은 폐결핵을 앓고 있던 동료 작가, [날개]를 쓴 이상이 보기에 김유정의 상태는 자신만큼 희망이 없어 보였다. 김유정이라면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에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김유정에게 찾아와 함께 자살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김유정은 살고 싶었다.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 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십칠 세를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생략) "이것 좀 보십시오."하고 풀어헤치는 유정의 젖가슴은 초롱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단말마의 호흡이 서글프다.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유정은 운다. 울 수 있는 외의 그는 온갖 표정을 다 망각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 [실화] 397쪽


이 책을 다시 만난 건 꼬박 25년 만이다. [유정의 사랑]은 김유정 탄생 110주년에 즈음해 다시 출간됐다.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그 당시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독자들을 가르치려 하는 지적인 허세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인간 군상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감춰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작가 김유정의 현실은 '염인증'에 걸렸다며 사람들을 혐오하고, 무슨 일이든 햇볕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 싫다며 이불 속에서만 지내려 했었다고 한다. 비극적이고 우울한 삶 속에서도 이렇게 찬란한 작품들이 나온다. [봄봄] [금따는 콩밭] 등 김유정의 소설을 아끼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한 번쯤 그 아이러니를 탐구하기를 권한다.

【유정의 사랑】 전상국 장편소설, 새움출판사,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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