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가습기 살균제부터 생리대까지…화학물질, 비밀은 위험하다

입력 2018.06.04 (07:0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난에 맞서고 싶었다.
그래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노동운동까지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속마음은 무서웠던 거였다. 마흔 중반이 된 지금의 나는
내가 겁이 아주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비겁해질 상황을 만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

출처: 녹색당 출처: 녹색당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적었지만 사실 노동자들의 발암물질 피해를 조사하고 화학물질 관련 안전기준과 정책을 만드는 일에 헌신해왔다. 1970~80년대 원진레이온 직업병과 수은 중독 사망 사건 등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이슈들과 함께했고 2016년에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1970년대 원진레이온은 양복 안감에 사용되는 부드러운 레이온 실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었고 직원이 3000명 정도에 달했다. 경기도에서 가장 좋은 회사 다닌다는 자부심이 컸지만 작업 과정에서 이황화탄소에 노출된 노동자들은 중추신경장애에 시달려야 했다.

충북 태안이 고향인 15살 송면이는 직장에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며 꿈을 펼칠 수 있다는 말에 상경해 온도계와 압력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1987년 12월이었다. 밀폐된 작업실에서 액체 상태의 수은이 바닥에 깔렸고 일한 지 2개월도 안돼 송면이는 쓰러졌다. 그리고 이듬해 7월 2일 "선생님, 송면이가 죽었어요."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1988년 원진 레이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800명이 독가스에 중독됐다. 출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1988년 원진 레이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800명이 독가스에 중독됐다. 출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유해물질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작업장에 서야 했던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 투병하는 동안 산재 신청도 할 수 없었고 직업병으로 인정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한 명, 한 명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저자와 같은 활동가들의 끈질긴 투쟁과 노력으로 발암물질 목록이 만들어지고 노출에 대한 기준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는 '송면이'의 희생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화학물질을 생산한 업체(SK케미칼)와 독성을 확인하지 않고 제품에 사용한 옥시 등 기업, 여기에 무분별하게 PB제품을 카피해 판매한 유통업체들까지 가담한 총체적 참사였다. 1994년 처음 개발돼 2011년 판매가 중지될 때까지 17년간 24개 제품, 719만개가 판매됐다. 사용자는 천만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1300명을 넘어섰다. 특히 산모와 아이들의 피해가 컸다.

저자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각인된 상처'처럼 우리의 마음에 남았다고 말한다. 살균제에 사용된 화학물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옥시라는 기업의 민낯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안전하다는 광고를 할 때도 정부의 규제는 전혀 없었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에는 수많은 화학물질이 들어있고 성분을 일일이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정부와 기업이 어느 정도 관리를 해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런데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통해 정부와 기업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을 집단적으로 내리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화학물질 자체보다는 안전한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여기에 정부와 기업이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불신도 더해졌다.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 건 의심쟁이로 취급받고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학물질에 대한 감시가 개개인의 참여에서 시작돼 궁극적으로는 안전을 입증할 책임을 기업에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습기 살균제에 이어 살충제 계란, 생리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학물질에 대한 안전망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습기 살균제 사건부터 불산 누출 사고, 생리대, 라돈 침대까지 최근 잇따른 화학물질 관련 사건을 얼마나 끈질기게 보도했는지 반성이 떠나질 않았다. 기자로서 나는 비겁해질 상황을 만나지 않기 위해 급급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여의도 책방] 가습기 살균제부터 생리대까지…화학물질, 비밀은 위험하다
    • 입력 2018-06-04 07:07:17
    여의도책방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난에 맞서고 싶었다.
그래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노동운동까지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속마음은 무서웠던 거였다. 마흔 중반이 된 지금의 나는
내가 겁이 아주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비겁해질 상황을 만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

출처: 녹색당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적었지만 사실 노동자들의 발암물질 피해를 조사하고 화학물질 관련 안전기준과 정책을 만드는 일에 헌신해왔다. 1970~80년대 원진레이온 직업병과 수은 중독 사망 사건 등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이슈들과 함께했고 2016년에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1970년대 원진레이온은 양복 안감에 사용되는 부드러운 레이온 실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었고 직원이 3000명 정도에 달했다. 경기도에서 가장 좋은 회사 다닌다는 자부심이 컸지만 작업 과정에서 이황화탄소에 노출된 노동자들은 중추신경장애에 시달려야 했다.

충북 태안이 고향인 15살 송면이는 직장에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며 꿈을 펼칠 수 있다는 말에 상경해 온도계와 압력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1987년 12월이었다. 밀폐된 작업실에서 액체 상태의 수은이 바닥에 깔렸고 일한 지 2개월도 안돼 송면이는 쓰러졌다. 그리고 이듬해 7월 2일 "선생님, 송면이가 죽었어요."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1988년 원진 레이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800명이 독가스에 중독됐다. 출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유해물질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작업장에 서야 했던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 투병하는 동안 산재 신청도 할 수 없었고 직업병으로 인정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한 명, 한 명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고 저자와 같은 활동가들의 끈질긴 투쟁과 노력으로 발암물질 목록이 만들어지고 노출에 대한 기준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는 '송면이'의 희생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화학물질을 생산한 업체(SK케미칼)와 독성을 확인하지 않고 제품에 사용한 옥시 등 기업, 여기에 무분별하게 PB제품을 카피해 판매한 유통업체들까지 가담한 총체적 참사였다. 1994년 처음 개발돼 2011년 판매가 중지될 때까지 17년간 24개 제품, 719만개가 판매됐다. 사용자는 천만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1300명을 넘어섰다. 특히 산모와 아이들의 피해가 컸다.

저자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각인된 상처'처럼 우리의 마음에 남았다고 말한다. 살균제에 사용된 화학물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옥시라는 기업의 민낯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안전하다는 광고를 할 때도 정부의 규제는 전혀 없었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에는 수많은 화학물질이 들어있고 성분을 일일이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정부와 기업이 어느 정도 관리를 해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런데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통해 정부와 기업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을 집단적으로 내리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화학물질 자체보다는 안전한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여기에 정부와 기업이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불신도 더해졌다.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 건 의심쟁이로 취급받고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학물질에 대한 감시가 개개인의 참여에서 시작돼 궁극적으로는 안전을 입증할 책임을 기업에 요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습기 살균제에 이어 살충제 계란, 생리대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학물질에 대한 안전망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습기 살균제 사건부터 불산 누출 사고, 생리대, 라돈 침대까지 최근 잇따른 화학물질 관련 사건을 얼마나 끈질기게 보도했는지 반성이 떠나질 않았다. 기자로서 나는 비겁해질 상황을 만나지 않기 위해 급급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