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재앙은 반복되는가?…“그대로 있으라(stay put)”

입력 2018.06.1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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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은 그렌펠 타워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렌펠 타워 참사는 런던의 한 공공 임대아파트에서 발생한 후진국형 화재 사고로 7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영국 BBC 등 주요 언론들은 참사 1주년을 맞아 이 화재 참사를 깊이 있게 조망하고 있다.

2017년 6월 14일, 화염에 휩싸인 24층짜리 런던 공공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2017년 6월 14일, 화염에 휩싸인 24층짜리 런던 공공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

"그대로 있으라 (Stay put)"

최근 그렌펠 타워 참사에 대한 공공조사(the public inquiry)에서 "화재 당시 입주민들이 안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재빨리 밖으로 대피했어야 했다"라는 지적이 나왔다.

영국 소방당국은 통상 아파트 등 고층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그대로 있으라(stay put)'라는 지침을 기본으로 택한다.

특히 발화 지점이 한 군데일 경우 대부분 이 같은 지침 아래 진화와 구조 활동에 나선다.

콘크리트가 불이 퍼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인데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올 경우 오히려 소방관들의 접근만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렌펠 타워의 경우는 달랐다.

개·보수 공사를 하면서 콘크리트 외벽에 단열 효과가 좋은 가연성 외장 마감재(cladding)를 붙였는데 이게 문제였다. 사용된 마감재가 불에 너무 취약했기 때문이다.

4층에서 발생한 불은 마감재를 타고 삽시간에 아파트 전체를 삼켰다.

이런 이유로 '그대로 있으라(Stay put)'라는 규칙은 그렌펠 타워의 경우 재앙이었다.

소방당국이 그런 사정을 알고 대피 명령을 내린 것은 1시간 20분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 때 이후 대피한 사람은 36명에 불과했다. 탈출 기회를 놓친 것이다.

2014년 세월호가 기울어져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데도 선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던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렌펠 타워’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렌펠 타워’

'돈'과 '안전'을 맞바꾸다

이 같은 참사는 단지 한 가지 이유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안전보다는 비용을 절감하려는 건물주의 안전 불감증도 크게 작용했다.

그렌펠 타워는 1974년에 지워진 24층짜리 임대아파트로 건물 노후화에 따라 냉난방에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단열 시스템이 필요했는데 외벽에 단열 마감재를 붙이고 이중창을 설치하는 계획안이 마련됐다.

이 과정에서 비용 문제가 발생했는데 돈을 아끼기 위해 단열효과가 뛰어나면서도 값이 싼 가연성 마감재가 선택됐다.

이 가연성 마감재가 화재 당시 불쏘시개로 작용하면서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그렌펠 타워의 개보수 작업은 세입자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의도였지만 그와는 달리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이와 함께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잉글랜드는 2007년 30미터 이상의 신축 건물에는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했다. 하지만 소급 적용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74년에 지어진 그렌펠 타워 등 기존 고층 아파트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그렌펠 타워의 화재 진압을 지휘한 런던소방대 데니 코튼 대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스프링클러의 설치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 그저 있으면 좋은 것일 수 없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72명의 희생자를 낸 ‘그렌펠 타워’ 참사72명의 희생자를 낸 ‘그렌펠 타워’ 참사

'규제 완화'가 능사?

그렌펠 타워 참사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친기업적 규제 완화' 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시민 안전 분야에까지 규제 완화를 지고한 가치로 내세운 정치권이 뒤에 있었던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기업 친화적 정치인들이 내린 결정들로 인해 그렌펠 타워 같은 주거 건물들이 가연성 외장재를 두르게 됐고 시장은 그런 외장재를 공급하기 바빴다"고 지적했다.

인디펜던트도 "보건과 안전에 관한 규제가 종종 조롱당하지만 사실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했고, 더 컨버세이션은 "더 이상 규제라는 말이 더러운 단어인 것처럼 취급당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2014년 멜버른 화재, 2015년 두바이 초고층 건물 화재 등을 통해 가연성 외장재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잇따랐음에도 영국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며 "건설업계의 로비가 안전업계의 로비보다 훨씬 강하고 목소리가 크다"고 전했다.

“그렌펠 타워 화재는 인재” 성난 시위대 구청에 진입해 시위“그렌펠 타워 화재는 인재” 성난 시위대 구청에 진입해 시위

'가난'이 죄?

그렌펠 타워 참사와 관련한 정부의 정책과 대응에 주민들은 큰 좌절과 분노를 느꼈다.

일부 주민들은 자신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공공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저소득층이나 이민자 등이다.

이들은 거주민에 따라 안전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며 안전(생명)을 돈과 바꾸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렌펠 타워 참사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잊고 경계를 게을리 한다면 재앙은 언제든지 우리 곁으로 다가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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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3 16:56:43
    특파원 리포트
6월 14일은 그렌펠 타워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렌펠 타워 참사는 런던의 한 공공 임대아파트에서 발생한 후진국형 화재 사고로 7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영국 BBC 등 주요 언론들은 참사 1주년을 맞아 이 화재 참사를 깊이 있게 조망하고 있다.

2017년 6월 14일, 화염에 휩싸인 24층짜리 런던 공공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
"그대로 있으라 (Stay put)"

최근 그렌펠 타워 참사에 대한 공공조사(the public inquiry)에서 "화재 당시 입주민들이 안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재빨리 밖으로 대피했어야 했다"라는 지적이 나왔다.

영국 소방당국은 통상 아파트 등 고층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그대로 있으라(stay put)'라는 지침을 기본으로 택한다.

특히 발화 지점이 한 군데일 경우 대부분 이 같은 지침 아래 진화와 구조 활동에 나선다.

콘크리트가 불이 퍼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인데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올 경우 오히려 소방관들의 접근만 힘들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렌펠 타워의 경우는 달랐다.

개·보수 공사를 하면서 콘크리트 외벽에 단열 효과가 좋은 가연성 외장 마감재(cladding)를 붙였는데 이게 문제였다. 사용된 마감재가 불에 너무 취약했기 때문이다.

4층에서 발생한 불은 마감재를 타고 삽시간에 아파트 전체를 삼켰다.

이런 이유로 '그대로 있으라(Stay put)'라는 규칙은 그렌펠 타워의 경우 재앙이었다.

소방당국이 그런 사정을 알고 대피 명령을 내린 것은 1시간 20분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 때 이후 대피한 사람은 36명에 불과했다. 탈출 기회를 놓친 것이다.

2014년 세월호가 기울어져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데도 선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던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렌펠 타워’
'돈'과 '안전'을 맞바꾸다

이 같은 참사는 단지 한 가지 이유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안전보다는 비용을 절감하려는 건물주의 안전 불감증도 크게 작용했다.

그렌펠 타워는 1974년에 지워진 24층짜리 임대아파트로 건물 노후화에 따라 냉난방에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단열 시스템이 필요했는데 외벽에 단열 마감재를 붙이고 이중창을 설치하는 계획안이 마련됐다.

이 과정에서 비용 문제가 발생했는데 돈을 아끼기 위해 단열효과가 뛰어나면서도 값이 싼 가연성 마감재가 선택됐다.

이 가연성 마감재가 화재 당시 불쏘시개로 작용하면서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그렌펠 타워의 개보수 작업은 세입자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의도였지만 그와는 달리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이와 함께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잉글랜드는 2007년 30미터 이상의 신축 건물에는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했다. 하지만 소급 적용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74년에 지어진 그렌펠 타워 등 기존 고층 아파트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그렌펠 타워의 화재 진압을 지휘한 런던소방대 데니 코튼 대장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스프링클러의 설치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 그저 있으면 좋은 것일 수 없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72명의 희생자를 낸 ‘그렌펠 타워’ 참사
'규제 완화'가 능사?

그렌펠 타워 참사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친기업적 규제 완화' 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시민 안전 분야에까지 규제 완화를 지고한 가치로 내세운 정치권이 뒤에 있었던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기업 친화적 정치인들이 내린 결정들로 인해 그렌펠 타워 같은 주거 건물들이 가연성 외장재를 두르게 됐고 시장은 그런 외장재를 공급하기 바빴다"고 지적했다.

인디펜던트도 "보건과 안전에 관한 규제가 종종 조롱당하지만 사실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했고, 더 컨버세이션은 "더 이상 규제라는 말이 더러운 단어인 것처럼 취급당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2014년 멜버른 화재, 2015년 두바이 초고층 건물 화재 등을 통해 가연성 외장재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잇따랐음에도 영국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며 "건설업계의 로비가 안전업계의 로비보다 훨씬 강하고 목소리가 크다"고 전했다.

“그렌펠 타워 화재는 인재” 성난 시위대 구청에 진입해 시위
'가난'이 죄?

그렌펠 타워 참사와 관련한 정부의 정책과 대응에 주민들은 큰 좌절과 분노를 느꼈다.

일부 주민들은 자신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공공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저소득층이나 이민자 등이다.

이들은 거주민에 따라 안전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며 안전(생명)을 돈과 바꾸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렌펠 타워 참사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잊고 경계를 게을리 한다면 재앙은 언제든지 우리 곁으로 다가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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