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되살아난 미륵사지 석탑…문화재 보수 새 역사

입력 2018.06.20 (09:34) 수정 2018.06.2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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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1910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미륵사지 석탑,(우)2018년 보수 작업이 마무리된 미륵사지 석탑의 서남 측면(좌)1910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미륵사지 석탑,(우)2018년 보수 작업이 마무리된 미륵사지 석탑의 서남 측면

9층 짜리 미륵사지 석탑이 6층인 이유는


20년 만에 보수 작업이 마무리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찬찬히 살펴보면 뭔가 부족해 보이는 모습입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짓다가 만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 이유는 원래 9층짜리였던 석탑을 6층까지만 되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2011년 문화재청은 미륵사지 석탑을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보수 직전의 모습(6층)으로 보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10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그대로의 모습, 더 이상 상상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높이에서 작업을 멈춘 셈이지요. 본래의 것으로 회복한다는 의미의 '복원'이 아닌, '보수'란 표현을 쓴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9층 전체 복원보다 6층 부분 보수가 역사성과 진정성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모습을 되돌린 것이란 비판과 익산 주민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제가 콘크리트를 발라 놓은 미륵사지 석탑의 1990년대 모습일제가 콘크리트를 발라 놓은 미륵사지 석탑의 1990년대 모습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석탑 훼손된 아픈 역사

미륵사지 석탑을 이해하려면 전북 익산시에 위치한 미륵사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미륵사는 고구려의 정릉사, 신라의 황룡사와 더불어 삼국 시대 최대 규모 사찰이었습니다. 사찰 초입에는 40m 높이의 목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두 개의 9층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 중 서쪽에 있었던 탑이 바로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중앙 목탑과 동쪽 석탑은 언제 소실됐는지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륵사지 석탑은 18세기 조선 선비 강후진이 쓴 기행문 '와유록(臥遊錄)'에 7층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1915년 일제는 붕괴가 우려된다면서 미륵사지 석탑에 콘크리트를 덧씌워 버리는데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미륵사지 석탑이 흉물스런 모습을 띠게 된 이유지요. 해방되고 세월이 흘러 1992년 정부는 앞서 언급됐던 동쪽 석탑의 복원을 추진합니다. 신중한 고증 없이 효율성만 따지면서 2년 만에 완성된 탑은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최악의 복원 사례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리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고 혹평하기도 했지요.

철저한 고증 없이 2년 만에 날림으로 복원된 동탑철저한 고증 없이 2년 만에 날림으로 복원된 동탑

"작업 너무 느리다" 검찰 수사까지 받은 석탑

미륵사지 석탑을 6층까지만 보수하겠다는 결정은 동탑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무리한 복원으로 오히려 여론의 뭇매를 맞은 광화문 현판·숭례문 단청 등의 사례들도 반면교사가 됐지요. 하지만 남겨진 사진 그대로 재현해내는 작업도 절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제가 타설해 놓은 콘크리트 185톤을 치과용 드릴로 제거하는 데만 3년이 걸렸죠. 나중에 있을 조립과 설계를 위해 해체하면서 3D 스캐닝으로 돌 2,400여 개를 일일이 측정하는 건 속된 말로 '노가다'에 가까웠습니다. 부서진 옛 돌에 새 돌을 티타늄으로 접합하는 기술이 적용됐고 돌과 돌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무기질 재료도 새로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더딘 작업 속도에 '세금도둑'이란 오명도 썼습니다. 결국 전주지검은 2007년 사업비 횡령 혐의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사업단 사무실을 압수수색합니다. 수사 결과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사업단 직원 대부분이 일을 그만둘 만큼 상처는 깊었습니다.

해체 작업 중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영기해체 작업 중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영기

1400년 만에 발견된 석탑의 비밀

전환점은 2009년 1월 14일, 석탑 해체 과정에서 역사적 발견을 하게 되면서 마련됩니다. 석탑의 심주석(기둥돌) 안쪽 정사각형 모양의 깊이 27㎝짜리 구멍(사리공)에서 각종 유물 9,000여 점이 쏟아진 것이죠. 이 중 '금제사리봉영기'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금판에 총 193글자를 새긴 발원문입니다. 백제 최고위 관직 좌평(佐平)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가 639년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백제 무왕과 왕후인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라, 백제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연 셈이었죠. 사리봉영기를 포함해 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중 9점은 모두 보물로도 지정됐습니다.

보수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의 동북 측면보수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의 동북 측면

올해 11월 시민들에게 공개…평가는?

보수가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은 높이만 14.5m, 무게만 1,830톤에 달합니다. 가히 국내 최대, 최고(最古)의 석탑이라고 불릴 만하지요. 이제 평가는 우리의 몫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이르면 올해 11월 시민들에게 공개됩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에만 18년을 바친 김현용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후회는 없고, 어떤 욕을 먹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보다 '정성'에, '창작'보다 '사실'에 무게를 둔 최초의 문화재 보수라는 걸 꼭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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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20 09:34:58
    • 수정2018-06-20 14:16:51
    취재K
(좌)1910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미륵사지 석탑,(우)2018년 보수 작업이 마무리된 미륵사지 석탑의 서남 측면
9층 짜리 미륵사지 석탑이 6층인 이유는


20년 만에 보수 작업이 마무리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찬찬히 살펴보면 뭔가 부족해 보이는 모습입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짓다가 만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 이유는 원래 9층짜리였던 석탑을 6층까지만 되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2011년 문화재청은 미륵사지 석탑을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보수 직전의 모습(6층)으로 보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10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그대로의 모습, 더 이상 상상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높이에서 작업을 멈춘 셈이지요. 본래의 것으로 회복한다는 의미의 '복원'이 아닌, '보수'란 표현을 쓴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9층 전체 복원보다 6층 부분 보수가 역사성과 진정성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문화재청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모습을 되돌린 것이란 비판과 익산 주민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제가 콘크리트를 발라 놓은 미륵사지 석탑의 1990년대 모습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석탑 훼손된 아픈 역사

미륵사지 석탑을 이해하려면 전북 익산시에 위치한 미륵사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미륵사는 고구려의 정릉사, 신라의 황룡사와 더불어 삼국 시대 최대 규모 사찰이었습니다. 사찰 초입에는 40m 높이의 목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두 개의 9층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 중 서쪽에 있었던 탑이 바로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입니다. 중앙 목탑과 동쪽 석탑은 언제 소실됐는지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륵사지 석탑은 18세기 조선 선비 강후진이 쓴 기행문 '와유록(臥遊錄)'에 7층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1915년 일제는 붕괴가 우려된다면서 미륵사지 석탑에 콘크리트를 덧씌워 버리는데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미륵사지 석탑이 흉물스런 모습을 띠게 된 이유지요. 해방되고 세월이 흘러 1992년 정부는 앞서 언급됐던 동쪽 석탑의 복원을 추진합니다. 신중한 고증 없이 효율성만 따지면서 2년 만에 완성된 탑은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최악의 복원 사례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리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고 혹평하기도 했지요.

철저한 고증 없이 2년 만에 날림으로 복원된 동탑
"작업 너무 느리다" 검찰 수사까지 받은 석탑

미륵사지 석탑을 6층까지만 보수하겠다는 결정은 동탑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무리한 복원으로 오히려 여론의 뭇매를 맞은 광화문 현판·숭례문 단청 등의 사례들도 반면교사가 됐지요. 하지만 남겨진 사진 그대로 재현해내는 작업도 절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제가 타설해 놓은 콘크리트 185톤을 치과용 드릴로 제거하는 데만 3년이 걸렸죠. 나중에 있을 조립과 설계를 위해 해체하면서 3D 스캐닝으로 돌 2,400여 개를 일일이 측정하는 건 속된 말로 '노가다'에 가까웠습니다. 부서진 옛 돌에 새 돌을 티타늄으로 접합하는 기술이 적용됐고 돌과 돌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무기질 재료도 새로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더딘 작업 속도에 '세금도둑'이란 오명도 썼습니다. 결국 전주지검은 2007년 사업비 횡령 혐의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사업단 사무실을 압수수색합니다. 수사 결과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사업단 직원 대부분이 일을 그만둘 만큼 상처는 깊었습니다.

해체 작업 중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영기
1400년 만에 발견된 석탑의 비밀

전환점은 2009년 1월 14일, 석탑 해체 과정에서 역사적 발견을 하게 되면서 마련됩니다. 석탑의 심주석(기둥돌) 안쪽 정사각형 모양의 깊이 27㎝짜리 구멍(사리공)에서 각종 유물 9,000여 점이 쏟아진 것이죠. 이 중 '금제사리봉영기'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금판에 총 193글자를 새긴 발원문입니다. 백제 최고위 관직 좌평(佐平)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가 639년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 백제 무왕과 왕후인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라, 백제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연 셈이었죠. 사리봉영기를 포함해 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중 9점은 모두 보물로도 지정됐습니다.

보수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의 동북 측면
올해 11월 시민들에게 공개…평가는?

보수가 완료된 미륵사지 석탑은 높이만 14.5m, 무게만 1,830톤에 달합니다. 가히 국내 최대, 최고(最古)의 석탑이라고 불릴 만하지요. 이제 평가는 우리의 몫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이르면 올해 11월 시민들에게 공개됩니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에만 18년을 바친 김현용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후회는 없고, 어떤 욕을 먹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보다 '정성'에, '창작'보다 '사실'에 무게를 둔 최초의 문화재 보수라는 걸 꼭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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