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범죄자다” 페이스북에 자수한 18살…왜?

입력 2018.06.20 (17:09) 수정 2018.06.2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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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법을 위반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동시에 저는 법을 지속적으로 위반할 것임을 미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경남 진주에 사는 박태영(18)씨가 지난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입니다.

그가 자수한 '불법 행위'는, 이 글을 올리기 30분 전 엄마와 나눈 대화였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누구를 뽑으면 좋을지 묻는 엄마에게, 도지사와 시장, 교육감, 도의원, 시의원, 시의원 비례 후보 가운데 한 명씩을 골라 이 사람을 뽑으라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대체 무엇이 불법인가 싶은데요.

박태영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캡처. 글 앞머리에 ‘진주시 선관위 보세요, 선거법 위반 자수합니다^^’라고 적었다.박태영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캡처. 글 앞머리에 ‘진주시 선관위 보세요, 선거법 위반 자수합니다^^’라고 적었다.

나이 어린 당신, 선거운동 자격 없다

문제가 된 건 박 씨의 나이입니다.

1999년 6월생인 박 씨는 만으로 아직 18살. 민법상 미성년자에 해당합니다.

공직선거법 제60조 1항은 19세 미만 미성년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미성년자처럼 "정치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선거운동의 자유를 제한"해야 "선거의 공정성"이 확보된다는 게 이 조항의 취지입니다. (2012헌마287 헌법재판소 결정문)

여기서 '선거운동'이란, 특정 후보가 당선되거나 당선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행위를 모두 포괄합니다.

직접 선거운동원으로 뛰지 않더라도, 후보를 지지하는 의견을 낸 것 자체가 원칙적으로는 이미 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엄마에게 특정 후보를 찍으라고 말한 미성년자 박태영 씨는, 공직선거법을 어겼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글 내려라" vs "못 내린다"

실제로 박 씨는 이 '자수 글'을 올린 지 11일 뒤에, 진주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공무원은 "페이스북 글을 지우지 않으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으러 와야 한다"고 말했는데요.

하지만 박 씨는 글을 내릴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KBS와의 통화에서 "글로 쓰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올렸고, 선관위에서 연락이 오길 바라긴 했지만 실제로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면서 "정치적 자유를 가지고 의견을 말하는 건 기본권인데, 이조차도 불가능하게 억압하는 공직선거법이 잘못됐다고 비판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진주시 선관위 측은 '중앙사이버선거범죄센터'를 통해 신고가 들어와 인지한 사안이라며,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돼 수사기관에 고발하지 않고 행정조치인 '구두 경고'만 내리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씨의 자수 이후, 비슷한 ‘자수 글’이 여러 건 올라왔다. 위는 18살 문준혁 씨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던 글.박 씨의 자수 이후, 비슷한 ‘자수 글’이 여러 건 올라왔다. 위는 18살 문준혁 씨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던 글.

#선거법_위반을_자수합니다

박태영 씨의 '페이스북 자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작은 반향을 일으켰고, 곧 릴레이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선거권은 물론 선거운동 자격조차 없는 미성년자의 처지를 "주제를 모르는 비(非)시민"으로 표현하며, "선거법이 개정되는 그날까지 해당 조항을 지속적으로 위반할 것을 미리 통보한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는데요.

하지만 이런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수 글'을 올렸던 문준혁(18)씨는 "5~10명 정도가 페이스북에 비슷한 글을 올렸는데, 선관위에서 연락을 받고 모두 비공개로 돌린 걸로 안다"며 "저한테 연락을 준 경남 사천시 선관위 쪽에서는 '좋은' 말로 글을 내리라고 얘기했지만, 구체적인 처벌을 언급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전라북도 선관위가 한 청소년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선거운동 성격의 게시글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6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는 언급과 함께 "이후 귀하의 선거운동이 확인되면 관련 규정에 따라 조치할 예정이니 이 점 유념하라"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전라북도 선거관리위원회가 한 청소년에게 공직선거법 위반을 지적하며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전라북도 선거관리위원회가 한 청소년에게 공직선거법 위반을 지적하며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자수의 글도, 우리 시야에서 일단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는 그날까지 법을 지속적으로 어기겠다는 '범법'의 의지는 여전히 살아있는 만큼,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앞으로도 계속 표출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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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범죄자다” 페이스북에 자수한 18살…왜?
    • 입력 2018-06-20 17:09:52
    • 수정2018-06-20 21:40:53
    취재K
"제가 법을 위반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동시에 저는 법을 지속적으로 위반할 것임을 미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경남 진주에 사는 박태영(18)씨가 지난 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입니다.

그가 자수한 '불법 행위'는, 이 글을 올리기 30분 전 엄마와 나눈 대화였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누구를 뽑으면 좋을지 묻는 엄마에게, 도지사와 시장, 교육감, 도의원, 시의원, 시의원 비례 후보 가운데 한 명씩을 골라 이 사람을 뽑으라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대체 무엇이 불법인가 싶은데요.

박태영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캡처. 글 앞머리에 ‘진주시 선관위 보세요, 선거법 위반 자수합니다^^’라고 적었다.
나이 어린 당신, 선거운동 자격 없다

문제가 된 건 박 씨의 나이입니다.

1999년 6월생인 박 씨는 만으로 아직 18살. 민법상 미성년자에 해당합니다.

공직선거법 제60조 1항은 19세 미만 미성년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미성년자처럼 "정치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선거운동의 자유를 제한"해야 "선거의 공정성"이 확보된다는 게 이 조항의 취지입니다. (2012헌마287 헌법재판소 결정문)

여기서 '선거운동'이란, 특정 후보가 당선되거나 당선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행위를 모두 포괄합니다.

직접 선거운동원으로 뛰지 않더라도, 후보를 지지하는 의견을 낸 것 자체가 원칙적으로는 이미 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엄마에게 특정 후보를 찍으라고 말한 미성년자 박태영 씨는, 공직선거법을 어겼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글 내려라" vs "못 내린다"

실제로 박 씨는 이 '자수 글'을 올린 지 11일 뒤에, 진주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공무원은 "페이스북 글을 지우지 않으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으러 와야 한다"고 말했는데요.

하지만 박 씨는 글을 내릴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KBS와의 통화에서 "글로 쓰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올렸고, 선관위에서 연락이 오길 바라긴 했지만 실제로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면서 "정치적 자유를 가지고 의견을 말하는 건 기본권인데, 이조차도 불가능하게 억압하는 공직선거법이 잘못됐다고 비판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진주시 선관위 측은 '중앙사이버선거범죄센터'를 통해 신고가 들어와 인지한 사안이라며,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돼 수사기관에 고발하지 않고 행정조치인 '구두 경고'만 내리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씨의 자수 이후, 비슷한 ‘자수 글’이 여러 건 올라왔다. 위는 18살 문준혁 씨가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던 글.
#선거법_위반을_자수합니다

박태영 씨의 '페이스북 자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작은 반향을 일으켰고, 곧 릴레이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선거권은 물론 선거운동 자격조차 없는 미성년자의 처지를 "주제를 모르는 비(非)시민"으로 표현하며, "선거법이 개정되는 그날까지 해당 조항을 지속적으로 위반할 것을 미리 통보한다"고 글을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는데요.

하지만 이런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수 글'을 올렸던 문준혁(18)씨는 "5~10명 정도가 페이스북에 비슷한 글을 올렸는데, 선관위에서 연락을 받고 모두 비공개로 돌린 걸로 안다"며 "저한테 연락을 준 경남 사천시 선관위 쪽에서는 '좋은' 말로 글을 내리라고 얘기했지만, 구체적인 처벌을 언급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전라북도 선관위가 한 청소년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선거운동 성격의 게시글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6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는 언급과 함께 "이후 귀하의 선거운동이 확인되면 관련 규정에 따라 조치할 예정이니 이 점 유념하라"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전라북도 선거관리위원회가 한 청소년에게 공직선거법 위반을 지적하며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선거에 참여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자수의 글도, 우리 시야에서 일단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미성년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는 그날까지 법을 지속적으로 어기겠다는 '범법'의 의지는 여전히 살아있는 만큼,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앞으로도 계속 표출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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