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단축 ‘처벌 유예’…누가 당·정·청에 권한 줬나?

입력 2018.06.2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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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7월) 1일부터 시행하는 주52시간제 도입과 관련해 6달 동안 계도기간을 갖기로 했다. 어제(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정·청 회의 결정사항이다. 회의 참석자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홍영표 원내대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등이다. 그런데 누가 이들에게 법 시행을 사실상 유예할 권한을 줬는가?

주당 법정 최대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못 박은 근로기준법은 지난 2월 28일 국회를 통과했다. 여야 국회의원 재석 194명 가운데 찬성 151명, 반대 11명, 기권 32명으로 가결됐다. 앞서 5년의 공론 끝에 사상 최고의 '장기 노동사회'에서 '일과 삶이 양립하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동의가 모인 결과다. 부작용도 예상됐다. 이 때문에 시행일은 사업장 규모 등에 따라 다음 달 1일부터 3년 동안 3단계로 정했다. 산업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업이 신규 채용 등을 할 때 지원대책도 마련됐다.

게다가 법 위반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다. 그런데 처벌을 최장 6달 동안 유예하는 결정을 당·정·청이 내렸다. 한 변호사의 표현을 빌자면 '일개 여당'과 정부, 청와대가 입법권과 사법권을 넘어서는 결정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고용노동부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제 당·정·청 발표 뒤 열린 브리핑에서 "법 시행을 유예할 수 있는 건, 국회도 행정부의 권한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정부가 공식적으로 시행유예, 처벌유예라고 말하는 건 권한을 넘어서는 영역이므로 유예는 없다"고 덧붙였다. 다만,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상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수 있고, 법 준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온 사업주가 처벌되는 건 사회적 손실이기 때문에 최장 6달까지 시정하고 소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고의로 법 준수 의지 없이 관행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시키는 사업주는 엄하게 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정·청이 처벌을 유예하겠다고 했는데,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법 준수 의지에 따라 최대 6달 동안 시정기회를 줄 순 있지만 법대로 처벌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뒤늦게 내놓았다. 당·정·청의 발표와는 엄밀하게는 다른 입장을 내놓은 셈이다. 이러면 당·정·청의 결정사항을 경영계가 잘못 인식할 수 있다. 처벌을 6달 동안 유예한 당·정·청의 발표대로 라면 사용주가 법 준수 의지를 보여줄 만한 인력채용, 시설 확충 등 구체적인 행위 없이도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률가들도 이번 당·정·청의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노총 법률원 부원장인 김형동 변호사는 "지난 정권과 다름없이 대통령과 정부가 결정하면 법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우려된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가 주52시간제 위반에 대해 행정단속을 하지 않을 경우 법률상 작위의무가 있는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소원 대상"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법률원 원장인 신인수 변호사도 이번 결정은 "법적 효력이 없는 발언이고, 사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결정"이라며 "근로감독관이 위반 사실을 적발하고도 임의로 계도만 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 직무유기"라고 밝혔다.


노동계는 "정부의 노동정책이 전반적으로 퇴조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소득주도 성장정책, 노동존중사회 실현에 대한 포기"라고 평가했다. 지난달 최저임금법 개정과 이번 처벌 유예 결정으로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두 축인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모두 뒷걸음질 쳤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사용자 편을 든다는 불신도 더 팽배해졌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계도기간을 두겠다는 건 그동안 준비해오지 않은 경영계에 관대한 조치일 뿐만 아니라 6달 동안 꼼수를 부릴 수 있는 기간을 준 것"이라며 우려를 드러냈다.

한국노총 강훈중 대변인도 "예정대로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해서 올해 7월 1일부터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차례로 소규모 사업장도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하다"며 "첫 단추부터 이렇게 잘못 끼우면 정해진 날짜 안에 노동시간 단축은 어렵다"고 비판했다. 노동계의 우려대로 경영계는 '탄력근로제'와 '유연근로제' 확대 등의 추가 요구를 쏟아내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법정 노동시간을 단축한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요구도 포함돼 있다.

우리 사회는 과거 이와 비슷한 경험을 나눈 적이 있다. 2004년 첫 도입돼 2011년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된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할 때다. 산업현장의 혼란과 경영손실, 임금 감소, 일자리 감소, 경제 위축 등 수많은 우려가 쏟아졌다. 7년이 흐른 2018년. 우리는 당시 그 우려가 기우이자 과장된 공포였다는 것을 삶으로 알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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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시간 단축 ‘처벌 유예’…누가 당·정·청에 권한 줬나?
    • 입력 2018-06-21 17:26:18
    취재K
다음 달(7월) 1일부터 시행하는 주52시간제 도입과 관련해 6달 동안 계도기간을 갖기로 했다. 어제(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정·청 회의 결정사항이다. 회의 참석자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홍영표 원내대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등이다. 그런데 누가 이들에게 법 시행을 사실상 유예할 권한을 줬는가?

주당 법정 최대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못 박은 근로기준법은 지난 2월 28일 국회를 통과했다. 여야 국회의원 재석 194명 가운데 찬성 151명, 반대 11명, 기권 32명으로 가결됐다. 앞서 5년의 공론 끝에 사상 최고의 '장기 노동사회'에서 '일과 삶이 양립하는 사회'로 나아가자는 동의가 모인 결과다. 부작용도 예상됐다. 이 때문에 시행일은 사업장 규모 등에 따라 다음 달 1일부터 3년 동안 3단계로 정했다. 산업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업이 신규 채용 등을 할 때 지원대책도 마련됐다.

게다가 법 위반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다. 그런데 처벌을 최장 6달 동안 유예하는 결정을 당·정·청이 내렸다. 한 변호사의 표현을 빌자면 '일개 여당'과 정부, 청와대가 입법권과 사법권을 넘어서는 결정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고용노동부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제 당·정·청 발표 뒤 열린 브리핑에서 "법 시행을 유예할 수 있는 건, 국회도 행정부의 권한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정부가 공식적으로 시행유예, 처벌유예라고 말하는 건 권한을 넘어서는 영역이므로 유예는 없다"고 덧붙였다. 다만,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상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수 있고, 법 준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온 사업주가 처벌되는 건 사회적 손실이기 때문에 최장 6달까지 시정하고 소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고의로 법 준수 의지 없이 관행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시키는 사업주는 엄하게 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정·청이 처벌을 유예하겠다고 했는데,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법 준수 의지에 따라 최대 6달 동안 시정기회를 줄 순 있지만 법대로 처벌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뒤늦게 내놓았다. 당·정·청의 발표와는 엄밀하게는 다른 입장을 내놓은 셈이다. 이러면 당·정·청의 결정사항을 경영계가 잘못 인식할 수 있다. 처벌을 6달 동안 유예한 당·정·청의 발표대로 라면 사용주가 법 준수 의지를 보여줄 만한 인력채용, 시설 확충 등 구체적인 행위 없이도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률가들도 이번 당·정·청의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노총 법률원 부원장인 김형동 변호사는 "지난 정권과 다름없이 대통령과 정부가 결정하면 법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우려된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가 주52시간제 위반에 대해 행정단속을 하지 않을 경우 법률상 작위의무가 있는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소원 대상"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법률원 원장인 신인수 변호사도 이번 결정은 "법적 효력이 없는 발언이고, 사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결정"이라며 "근로감독관이 위반 사실을 적발하고도 임의로 계도만 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 직무유기"라고 밝혔다.


노동계는 "정부의 노동정책이 전반적으로 퇴조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소득주도 성장정책, 노동존중사회 실현에 대한 포기"라고 평가했다. 지난달 최저임금법 개정과 이번 처벌 유예 결정으로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두 축인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모두 뒷걸음질 쳤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사용자 편을 든다는 불신도 더 팽배해졌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계도기간을 두겠다는 건 그동안 준비해오지 않은 경영계에 관대한 조치일 뿐만 아니라 6달 동안 꼼수를 부릴 수 있는 기간을 준 것"이라며 우려를 드러냈다.

한국노총 강훈중 대변인도 "예정대로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해서 올해 7월 1일부터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차례로 소규모 사업장도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하다"며 "첫 단추부터 이렇게 잘못 끼우면 정해진 날짜 안에 노동시간 단축은 어렵다"고 비판했다. 노동계의 우려대로 경영계는 '탄력근로제'와 '유연근로제' 확대 등의 추가 요구를 쏟아내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법정 노동시간을 단축한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요구도 포함돼 있다.

우리 사회는 과거 이와 비슷한 경험을 나눈 적이 있다. 2004년 첫 도입돼 2011년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된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할 때다. 산업현장의 혼란과 경영손실, 임금 감소, 일자리 감소, 경제 위축 등 수많은 우려가 쏟아졌다. 7년이 흐른 2018년. 우리는 당시 그 우려가 기우이자 과장된 공포였다는 것을 삶으로 알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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