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연대’로 나아가는 위안부 소재 영화

입력 2018.06.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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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개봉 영화 '허스토리'의 첫 장면. 부산 여성경제인연합회 모임을 거울에 비춘다.

카메라가 가만히 뒤로 빠지면, 우리가 보고 있던 인물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곧 문사장(김희애)이 친구 입을 틀어막습니다. 친구는 '사업 잘 된 게 다 남편 덕'이라며 침을 튀던 참입니다. 문사장이 지청구를 줍니다. "여자들은 이기 문젠기라. 와 다 남 때문이고? 니는 어디 있노?"

■과거를 넘어 오늘로 나아가기
이 첫 장면에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의 전반을 가로지르는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거울로 첫 운을 뗀 건 충분히 잘 살아온 여성으로서 자신을 보고, 나아가 역사를 현재에 비추는 거울 같은 작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연을 진실하게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면 절반만 맞는 말인 듯합니다. 20여 년 전 법정투쟁을 다룬 이 영화의 행간에 오늘을 사는 한국 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1998년 시모노세키 재판에서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 책임이 있다'는 일부 승소 판결이 이뤄진 실화가 바탕입니다. 여성 사업가들의 후원과 봉사로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단이 꾸려지고, 과거를 숨긴 채 선뜻 나서지 못하던 당사자들도 마음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사재를 털어 소송단을 이끄는 문사장은 전통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돈 꽤나 있고 승부욕으로 뭉친 사업가입니다. 심지어 하나뿐인 딸보다 일이 우선입니다. 그런 딸은 비뚤어지기는커녕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엄마를 따라 잘만 성장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준 가사도우미 할머니(김해숙)가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안 딸은 기꺼이 할머니들과 함께 수요집회에 나섭니다. 피해 할머니-문사장-딸-지역 여성 사업가들까지를 잇는 인물 구성은, 계급과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들의 연대를 현실의 땅 위에 구축하기 위한 사려 깊은 설계입니다.



아픈 과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화면 틀을 겹쳐놓고 한 발 떨어져 인물의 마음을 살핀다.

■흔한 역사영화에 있지만 '허스토리'에는 없는 것
한국영화들은 종종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재현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자극적인 화면을 보여준 다음 대안 없는 분노 혹은 슬픔에 머물고 마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허스토리'는 플래시백(회상 장면)이 없는 역사 영화입니다. 과거에 갇히는 결과를 철저히 경계하면서, 울음이 터질 만한 대목에선 의도적으로 대사의 리듬을 끊거나 장면을 바꿉니다. 승산 없는 싸움에 왜 그리 몰두하느냐는 친구의 다그침에 문사장이 소리칩니다. "부끄러버서! 내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는 아니고, 못 이겼으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진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 앞에 선 영화는 감상에 젖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상업화하지 않는 대신 이 영화가 자주 사용한 건 '중첩 프레임'입니다. 기둥이나 처마, 문틈 등을 이용해 '화면 속 화면 틀'을 만든 다음, 프레임 건너편에서 인물을 조심스레 넘겨다보는 겁니다. 그렇게 인물의 감정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 속으로 천천히 접근합니다. 보여주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영화 ‘아이 캔 스피크’

지난해 호평받은 위안부 소재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가 개봉하기 오래 전부터 '허스토리'는 기획되고 있었습니다. 피해 할머니들을 대할 때 누구나 느끼는 미안함, 무지에서 오는 일각의 혐오, 동료 여성들과 나누는 자매애 등 두 영화에는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기획된 작품들에 공통점이 여럿인 데다 진심마저 보인다면, 이들 사이에 일종의 시대정신이 공유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미안함과 염치, 혐오와 갑질의 반대말
이 영화들이 말하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란 무엇일까요. <허스토리>의 문사장은 "부끄러븐" 줄 아는, 그러니까 돈도 있고 염치도 있는 인물입니다. 돈 거래가 모든 관계를 정해버리고 돈으로 갑질하는 숱한 사례 속에 우리가 보고 싶은 인물입니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주인공(나문희)을 미워하던 족발집 사장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안 뒤 무지에서 비롯된 혐오를 깨닫고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최근 만연한 혐오와 갑질의 반대편에 미안함과 염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두 영화에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대사가 여러차례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나누는 이들끼리 연대합니다. 이를 통해 두 작품은 내 편과 네 편을 선명하게 나누는 80년대식 남성적 연대와 이별하고 21세기에 걸맞은 비폭력과 공감의 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소재로 오늘을 말하는 이런 영화를 보시면, 현재 생존해계시는 스물 여덟 분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조금은 기뻐하시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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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들의 연대’로 나아가는 위안부 소재 영화
    • 입력 2018-06-23 15:48:35
    취재K
27일 개봉 영화 '허스토리'의 첫 장면. 부산 여성경제인연합회 모임을 거울에 비춘다.

카메라가 가만히 뒤로 빠지면, 우리가 보고 있던 인물들은 거울에 비친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곧 문사장(김희애)이 친구 입을 틀어막습니다. 친구는 '사업 잘 된 게 다 남편 덕'이라며 침을 튀던 참입니다. 문사장이 지청구를 줍니다. "여자들은 이기 문젠기라. 와 다 남 때문이고? 니는 어디 있노?"

■과거를 넘어 오늘로 나아가기
이 첫 장면에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의 전반을 가로지르는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거울로 첫 운을 뗀 건 충분히 잘 살아온 여성으로서 자신을 보고, 나아가 역사를 현재에 비추는 거울 같은 작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사연을 진실하게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면 절반만 맞는 말인 듯합니다. 20여 년 전 법정투쟁을 다룬 이 영화의 행간에 오늘을 사는 한국 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1998년 시모노세키 재판에서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 책임이 있다'는 일부 승소 판결이 이뤄진 실화가 바탕입니다. 여성 사업가들의 후원과 봉사로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단이 꾸려지고, 과거를 숨긴 채 선뜻 나서지 못하던 당사자들도 마음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사재를 털어 소송단을 이끄는 문사장은 전통적 여성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돈 꽤나 있고 승부욕으로 뭉친 사업가입니다. 심지어 하나뿐인 딸보다 일이 우선입니다. 그런 딸은 비뚤어지기는커녕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엄마를 따라 잘만 성장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준 가사도우미 할머니(김해숙)가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안 딸은 기꺼이 할머니들과 함께 수요집회에 나섭니다. 피해 할머니-문사장-딸-지역 여성 사업가들까지를 잇는 인물 구성은, 계급과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들의 연대를 현실의 땅 위에 구축하기 위한 사려 깊은 설계입니다.



아픈 과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화면 틀을 겹쳐놓고 한 발 떨어져 인물의 마음을 살핀다.

■흔한 역사영화에 있지만 '허스토리'에는 없는 것
한국영화들은 종종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재현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자극적인 화면을 보여준 다음 대안 없는 분노 혹은 슬픔에 머물고 마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허스토리'는 플래시백(회상 장면)이 없는 역사 영화입니다. 과거에 갇히는 결과를 철저히 경계하면서, 울음이 터질 만한 대목에선 의도적으로 대사의 리듬을 끊거나 장면을 바꿉니다. 승산 없는 싸움에 왜 그리 몰두하느냐는 친구의 다그침에 문사장이 소리칩니다. "부끄러버서! 내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는 아니고, 못 이겼으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진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 앞에 선 영화는 감상에 젖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상업화하지 않는 대신 이 영화가 자주 사용한 건 '중첩 프레임'입니다. 기둥이나 처마, 문틈 등을 이용해 '화면 속 화면 틀'을 만든 다음, 프레임 건너편에서 인물을 조심스레 넘겨다보는 겁니다. 그렇게 인물의 감정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 속으로 천천히 접근합니다. 보여주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지난해 호평받은 위안부 소재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가 개봉하기 오래 전부터 '허스토리'는 기획되고 있었습니다. 피해 할머니들을 대할 때 누구나 느끼는 미안함, 무지에서 오는 일각의 혐오, 동료 여성들과 나누는 자매애 등 두 영화에는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기획된 작품들에 공통점이 여럿인 데다 진심마저 보인다면, 이들 사이에 일종의 시대정신이 공유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미안함과 염치, 혐오와 갑질의 반대말
이 영화들이 말하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란 무엇일까요. <허스토리>의 문사장은 "부끄러븐" 줄 아는, 그러니까 돈도 있고 염치도 있는 인물입니다. 돈 거래가 모든 관계를 정해버리고 돈으로 갑질하는 숱한 사례 속에 우리가 보고 싶은 인물입니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주인공(나문희)을 미워하던 족발집 사장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안 뒤 무지에서 비롯된 혐오를 깨닫고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최근 만연한 혐오와 갑질의 반대편에 미안함과 염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두 영화에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대사가 여러차례 반복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나누는 이들끼리 연대합니다. 이를 통해 두 작품은 내 편과 네 편을 선명하게 나누는 80년대식 남성적 연대와 이별하고 21세기에 걸맞은 비폭력과 공감의 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소재로 오늘을 말하는 이런 영화를 보시면, 현재 생존해계시는 스물 여덟 분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조금은 기뻐하시리라 감히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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