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만 남긴 못난 남편이라 미안” 쌍용차 30번째 사망자

입력 2018.06.27 (22:11) 수정 2018.06.2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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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가는구나. 사는 게 힘들겠지만 부디 행복해라. 그리고 천하에 못난 자식 어머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떠나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주라."

“형 그동안 고마웠어요. 신세만 지고 가네요.”

27일(오늘) 세상을 떠난 쌍용차 해고자 A씨가 부인과 해고자 동료에게 보낸 문자이다. A 씨는 경기도 평택시의 한 야산에서 오후 4시 30분쯤 숨진 채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문자메시지 외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2009년 쌍용차 사태 당시 경찰특공대 진압 모습2009년 쌍용차 사태 당시 경찰특공대 진압 모습

경찰 집단폭행 당한 뒤 트라우마 시달려…밤낮으로 운전·공사일

A 씨는 1993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해 2009년 공장 점거파업 때 참여했다. 조립공장 옥상에서 경찰특공대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한 뒤 줄곧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밥줄을 끊을 수 없어 새벽에는 화물차 운전을 하고 낮에는 공사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은 A 씨를 "정말 성실한 친구"로 기억했다. "복직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밤낮으로 투잡을 하며 성실히 일했다. 가정과 일에 대해서 정말 성실했다. 빚을 갚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새벽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도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리해고 이후 30번째 사망자…합의 이후 복직대상 포함 안 돼

A 씨는 쌍용차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 이후 30번째 사망자이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에선 그의 죽음을 무척 애석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2015년 노사가 해고자 복직에 합의한 뒤 벌어진 첫번째 비극이기 때문이다.

2009년 76일간의 옥쇄파업 이후 3천여 명의 노동자가 쫓겨났지만 A 씨를 포함한 165명은 일터로 돌아갈 날만 손 꼽으며 버텼다. 그리고 2015년 합의 이후 복직의 길이 열렸지만 일터로 돌아간 사람은 고작 45명에 불과하다. A 씨는 그 안에 들지 못한 120명 가운데 하나였다.


노조 측은 A 씨가 생계 문제로 복직 투쟁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최근 새벽 일을 마치고 1인 시위와 저녁 문화제 등에 참여하며 복직 의사를 강력하게 드러냈다고 말했다. 또 살고 있던 집이 최근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면서 어디로 이사를 가야할 지 걱정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전했다.

"복직 시한만 알려줬더라면...해고자 복직 위해 싸울 것"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은 "회사가 복직 시한만 알려줬더라면, 아니면 문재인 정부가 쌍용차 사태를 조금이라도 빨리 조사해서 해결했다면 A 조합원은 목숨을 끊지 않았을 것이다." 라며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해고자 복직을 위해 계속 싸워나가겠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지난 4월 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32일 동안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2012년엔 5일, 2013년엔 21일, 2015년엔 45일 동안 단식을 했다. 2015년엔 집행부 2명이 쌍용차 평택공장 굴뚝에 올라가 100일 농성을 벌였고, 2년 전엔 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가 171일 동안 버티기도 했다.

노조에선 동종업계에서 시행중인 주간 연속 2교대 근무가 시작되고 티볼리 롱바디와 G4 렉스턴 등 신차가 출시돼 전원 복직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사측에선 마힌드라 그룹에 인수된 2010년 이후 2016년을 제외하곤 줄곧 적자라 사정이 어렵다며 단계적 복직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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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빚만 남긴 못난 남편이라 미안” 쌍용차 30번째 사망자
    • 입력 2018-06-27 22:11:12
    • 수정2018-06-28 13:37:27
    취재K
“그동안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가는구나. 사는 게 힘들겠지만 부디 행복해라. 그리고 천하에 못난 자식 어머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떠나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주라."

“형 그동안 고마웠어요. 신세만 지고 가네요.”

27일(오늘) 세상을 떠난 쌍용차 해고자 A씨가 부인과 해고자 동료에게 보낸 문자이다. A 씨는 경기도 평택시의 한 야산에서 오후 4시 30분쯤 숨진 채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문자메시지 외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2009년 쌍용차 사태 당시 경찰특공대 진압 모습
경찰 집단폭행 당한 뒤 트라우마 시달려…밤낮으로 운전·공사일

A 씨는 1993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해 2009년 공장 점거파업 때 참여했다. 조립공장 옥상에서 경찰특공대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한 뒤 줄곧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밥줄을 끊을 수 없어 새벽에는 화물차 운전을 하고 낮에는 공사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은 A 씨를 "정말 성실한 친구"로 기억했다. "복직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밤낮으로 투잡을 하며 성실히 일했다. 가정과 일에 대해서 정말 성실했다. 빚을 갚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다. 새벽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도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리해고 이후 30번째 사망자…합의 이후 복직대상 포함 안 돼

A 씨는 쌍용차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 이후 30번째 사망자이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에선 그의 죽음을 무척 애석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2015년 노사가 해고자 복직에 합의한 뒤 벌어진 첫번째 비극이기 때문이다.

2009년 76일간의 옥쇄파업 이후 3천여 명의 노동자가 쫓겨났지만 A 씨를 포함한 165명은 일터로 돌아갈 날만 손 꼽으며 버텼다. 그리고 2015년 합의 이후 복직의 길이 열렸지만 일터로 돌아간 사람은 고작 45명에 불과하다. A 씨는 그 안에 들지 못한 120명 가운데 하나였다.


노조 측은 A 씨가 생계 문제로 복직 투쟁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최근 새벽 일을 마치고 1인 시위와 저녁 문화제 등에 참여하며 복직 의사를 강력하게 드러냈다고 말했다. 또 살고 있던 집이 최근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면서 어디로 이사를 가야할 지 걱정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전했다.

"복직 시한만 알려줬더라면...해고자 복직 위해 싸울 것"

김득중 쌍용차지부장은 "회사가 복직 시한만 알려줬더라면, 아니면 문재인 정부가 쌍용차 사태를 조금이라도 빨리 조사해서 해결했다면 A 조합원은 목숨을 끊지 않았을 것이다." 라며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해고자 복직을 위해 계속 싸워나가겠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지난 4월 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32일 동안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2012년엔 5일, 2013년엔 21일, 2015년엔 45일 동안 단식을 했다. 2015년엔 집행부 2명이 쌍용차 평택공장 굴뚝에 올라가 100일 농성을 벌였고, 2년 전엔 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가 171일 동안 버티기도 했다.

노조에선 동종업계에서 시행중인 주간 연속 2교대 근무가 시작되고 티볼리 롱바디와 G4 렉스턴 등 신차가 출시돼 전원 복직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사측에선 마힌드라 그룹에 인수된 2010년 이후 2016년을 제외하곤 줄곧 적자라 사정이 어렵다며 단계적 복직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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