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를 분노케한 비상계엄, 촛불시위 때도?

입력 2018.07.06 (15:11) 수정 2018.07.0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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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 비극의 시작은 5월 18일 자정부터 시작된 전국 비상 계엄조치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시국 수습방안이란 걸 발표한다. 훗날 대법원에 의해 ‘군사 쿠데타’로 규정한 이 조치의 핵심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지자 선포된 지역 계엄을 신군부는 전국 계엄으로 확대한다. 정치활동 금지와 언론 사전 검열 등의 조치를 시행하며 군 병력을 이용해 가혹하게 민주화 시위를 진압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가 위수령 발동과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계엄령(戒嚴令)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은 기무사가 지난해 3월 작성해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입수해 공개했다.

기무사는 이 문건에서 "북한의 도발 위협이 점증하는 상황 속에 군 차원의 대비가 긴요하다"며 "국민의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해 대응하고, 상황 악화 시 계엄 시행을 검토(할 수 있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시위 상황에 따라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발동하겠다는 것이다.

계엄령

계엄이란 한마디로 국가적 비상사태를 맞아 군사력을 이용해 치안을 유지하는 제도다.

헌법 77조 1항은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있어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누는데 통상 말하는 계엄은 비상계엄을 말한다.


비상계엄 선포되면 대통령은 국방장관의 추천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계엄사령관을 임명하는데 바로 이 계엄사령관이 국정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의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사무를 관장함은 물론 국가정보원 같은 정보기관까지 지휘한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사령관은 광범위하게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 계엄사령관은 동원 또는 징발도 할 수 있고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에는 국민의 재산을 파괴 또는 소각할 수 있다.

일반인들도 비상계엄하에서는 살인, 강도, 방화, 통화, 공무방해, 폭발물 등의 죄를 저질렀을 경우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계엄사령관 이처럼 광범위한 권한 때문에 실력자로 떠오르는 게 보통이다.

1979년 10·26 이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신군부의 제거 대상 1호는 바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대표되는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서는 반드시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정승화 총장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보고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한 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이희성 육군 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때 체포된 정승화 계엄사령관1979년 12.12 군사쿠데타 때 체포된 정승화 계엄사령관

추미애 대표 “계엄령 준비한다고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전 촛불시위의 와중에 계엄령 선포를 검토했다는 주장은 그 무렵에도 제기된 바 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6년 12월 “(박 대통령이) 박사모를 시켜 물리적 충돌을 준비시키고 시간을 끌며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고 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계엄령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도 돌고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며 탄핵 사태를 모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계엄령 선포 발동 요건에 해당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더라도 바로 해제됐을 것이라 말한다.

헌법 77조 5항에는 “국회가 재적 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이 이를 해제해야 한다”고 나온다. 당시 야당의원이 과반수인 상황에서 계엄이 유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다.

위수령

기무사가 계엄이 아닌 위수령을 우선 검토한 것도 이런 이유로 볼 수 있다.

이철희 의원이 공개한 기무사 문건에는 “국회가 위수령 무효 법안을 제정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법안이 가결되더라도 2개월 이상 위수령을 유지할 수 있다”고 나온다. 국회가 반대해도 위수령은 2달가량은 유지할 수 있는 만큼 위수령 발동을 우선 검토하자는 것이다.

1950년 3월 육군 부대 경비를 위해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위수령은 군부대가 자기 보호를 위해 외부 침입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이다. 그러나 경비를 위해 필요할 경우 군부대가 주둔지 밖으로 출동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이 조항은 군사정권 시절 군부대가 집회나 시위를 진압하는 구실이 됐다.


우리 헌정사에서 1979~1980년을 제외하고는 선포 사례가 거의 없는 계엄과 달리 위수령은 몇 차례 발동된 적이 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 10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위수령이 발동됐다. 유신체제의 종말을 재촉한 1979년 10월 부마항쟁 때도 박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 마산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앞서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 직후에도 서울 일대 병력이 출동한 적이 있다.

1987년 6.10 항쟁 때도 위수령 발동이 검토됐다. 당시 군 출동 준비령이 하달됐음이 2010년 공개된 ‘작전명령 제87-4호’ 문건에 나온다. 특전사령관의 반대와 정치적 부담 등으로 결국 위수령은 발동되지 않았고,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위수령은 위헌 논란이 적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에 근거 없이 정부가 치안유지에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최근 위수령 폐지안을 입법 예고한 상태로 위수령은 6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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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년 광주를 분노케한 비상계엄, 촛불시위 때도?
    • 입력 2018-07-06 15:11:08
    • 수정2018-07-06 15: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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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 비극의 시작은 5월 18일 자정부터 시작된 전국 비상 계엄조치였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시국 수습방안이란 걸 발표한다. 훗날 대법원에 의해 ‘군사 쿠데타’로 규정한 이 조치의 핵심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지자 선포된 지역 계엄을 신군부는 전국 계엄으로 확대한다. 정치활동 금지와 언론 사전 검열 등의 조치를 시행하며 군 병력을 이용해 가혹하게 민주화 시위를 진압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가 위수령 발동과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계엄령(戒嚴令)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은 기무사가 지난해 3월 작성해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입수해 공개했다.

기무사는 이 문건에서 "북한의 도발 위협이 점증하는 상황 속에 군 차원의 대비가 긴요하다"며 "국민의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해 대응하고, 상황 악화 시 계엄 시행을 검토(할 수 있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시위 상황에 따라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발동하겠다는 것이다.

계엄령

계엄이란 한마디로 국가적 비상사태를 맞아 군사력을 이용해 치안을 유지하는 제도다.

헌법 77조 1항은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있어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누는데 통상 말하는 계엄은 비상계엄을 말한다.


비상계엄 선포되면 대통령은 국방장관의 추천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계엄사령관을 임명하는데 바로 이 계엄사령관이 국정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계엄사령관은 계엄지역의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사무를 관장함은 물론 국가정보원 같은 정보기관까지 지휘한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사령관은 광범위하게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 계엄사령관은 동원 또는 징발도 할 수 있고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에는 국민의 재산을 파괴 또는 소각할 수 있다.

일반인들도 비상계엄하에서는 살인, 강도, 방화, 통화, 공무방해, 폭발물 등의 죄를 저질렀을 경우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계엄사령관 이처럼 광범위한 권한 때문에 실력자로 떠오르는 게 보통이다.

1979년 10·26 이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신군부의 제거 대상 1호는 바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대표되는 신군부는 집권을 위해서는 반드시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정승화 총장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보고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한 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이희성 육군 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때 체포된 정승화 계엄사령관
추미애 대표 “계엄령 준비한다고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전 촛불시위의 와중에 계엄령 선포를 검토했다는 주장은 그 무렵에도 제기된 바 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6년 12월 “(박 대통령이) 박사모를 시켜 물리적 충돌을 준비시키고 시간을 끌며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고 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계엄령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도 돌고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며 탄핵 사태를 모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계엄령 선포 발동 요건에 해당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계엄령을 선포했다 하더라도 바로 해제됐을 것이라 말한다.

헌법 77조 5항에는 “국회가 재적 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이 이를 해제해야 한다”고 나온다. 당시 야당의원이 과반수인 상황에서 계엄이 유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다.

위수령

기무사가 계엄이 아닌 위수령을 우선 검토한 것도 이런 이유로 볼 수 있다.

이철희 의원이 공개한 기무사 문건에는 “국회가 위수령 무효 법안을 제정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법안이 가결되더라도 2개월 이상 위수령을 유지할 수 있다”고 나온다. 국회가 반대해도 위수령은 2달가량은 유지할 수 있는 만큼 위수령 발동을 우선 검토하자는 것이다.

1950년 3월 육군 부대 경비를 위해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위수령은 군부대가 자기 보호를 위해 외부 침입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이다. 그러나 경비를 위해 필요할 경우 군부대가 주둔지 밖으로 출동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이 조항은 군사정권 시절 군부대가 집회나 시위를 진압하는 구실이 됐다.


우리 헌정사에서 1979~1980년을 제외하고는 선포 사례가 거의 없는 계엄과 달리 위수령은 몇 차례 발동된 적이 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 10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위수령이 발동됐다. 유신체제의 종말을 재촉한 1979년 10월 부마항쟁 때도 박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 마산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앞서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 직후에도 서울 일대 병력이 출동한 적이 있다.

1987년 6.10 항쟁 때도 위수령 발동이 검토됐다. 당시 군 출동 준비령이 하달됐음이 2010년 공개된 ‘작전명령 제87-4호’ 문건에 나온다. 특전사령관의 반대와 정치적 부담 등으로 결국 위수령은 발동되지 않았고,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위수령은 위헌 논란이 적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에 근거 없이 정부가 치안유지에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최근 위수령 폐지안을 입법 예고한 상태로 위수령은 6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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