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지하철에선 되지만, 서울 지하철에선 안 되는 것?

입력 2018.07.0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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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일 뿐, 고기가 아닙니다."
"여기 두 남자가 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게이입니다. 그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고정 관념은 편협한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철도인 영국 런던 지하철역에 걸렸던 광고 문구들입니다. 상품을 선전하는 일반 광고와 달리, 채식이나 성소수자 인권처럼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생각해보게 하는 내용들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런던교통국(Transport for London)이 발간한 연간 광고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년 간 런던 지하철역·버스정류장에 붙은 광고 10건 중 1건 이상이 이런 사회적·정치적 광고(단, 정부 광고 포함)였습니다. 오락·레저 광고, 소매업 광고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유형을 차지했습니다.

런던 지하철역에 걸린 성소수자 인권 광고 (출처: 텀블러)런던 지하철역에 걸린 성소수자 인권 광고 (출처: 텀블러)

반면 서울 지하철에는 이런 정치적·사회적 광고가 설 자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1~8호선 운영사인 서울교통공사는 지난달 22일 교통공사 광고심의위원회에 이른바 '의견 광고' 게시 문제를 안건으로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 "앞으로 개인이나 단체의 주장 또는 성·정치·종교·이념의 메시지가 담긴 '의견 광고'를 지하철역에 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간 서울 지하철역에 걸렸던 동물보호 운동 광고,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 페미니즘·성평등 광고를 앞으로는 볼 수 없게 된 겁니다. 숙대 여성학 동아리 학생들이 4호선 숙대입구역에 게시한 페미니즘 광고도 계약 기간인 오는 9월 초까지만 게시됩니다.

[연관 기사] 서울 지하철, 여성주의 광고 “민원 우려로 거절” 논란…“규정대로 심의”

교통공사 측은 "그동안 의견광고 게시를 반려했던 게 많이 이슈화됐었는데 저희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고, 공기업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런 광고를 아예 안 받는 걸로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음 이사회에서 의견광고 게시 금지 규정을 추가한 '광고관리규정' 개정안을 의결할 예정이며, 광고심의위 결정이 나온 지난달 22일부터 이미 의견광고는 받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태호 서울교통공사 사장도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관련 기사 링크와 함께 "지하철을 논란의 장으로 자꾸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지하철은 모두에게 편안한 이동을 제공하는 것이지 논쟁의 공간이 아닙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김태호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캡처김태호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캡처

이런 방침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일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의견광고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 게 과연 바람직한 방향이냐는 겁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지하철역이 "중요한 공론의 영역"이라고 전제한 뒤, "대통령 생일축하 광고는 공익과 관계없기 때문에 게시를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미니즘 광고처럼 성평등과 여성의 시민적 권리라는 공익, 사회 정의를 다루는 광고까지 거부하겠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신 교수는 "남성 등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방식의 광고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설사 반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성숙하게 담론의 영역으로 끌어와야 하는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반대, 항의의 목소리가 들어올 수 있는 건데 교통공사가 그런 부분을 다루기 싫거나 다룰 능력이 없어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보수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시민들의 공적인 일상 공간으로서 지하철역이 가지는 중요한 성격을 교통공사가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서울교통공사 '고객의소리' 게시판에도 "페미니즘 광고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여성 인권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비슷한 취지의 항의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 걸린 페미니즘 광고.서울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 걸린 페미니즘 광고.

신 교수는 이번 문제와 관련해 "공익, 사회정의와 같은 측면에서 광고 게시 판단 기준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잘 운영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

런던 지하철을 운영하는 런던교통국의 광고 정책 가이드라인이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런던교통국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와 관련된 이미지나 내용을 포함한 광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광범위한, 혹은 심각한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광고의 게시는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을 가이드라인에 포함하고 있지만, 분명한 예외를 뒀습니다.

관용(톨레랑스)을 증진시키거나 편견을 저지하는 등, 사회 구성원의 인종·젠더·장애·신념·성적 지향성과 관련된 사회적 평등 문제를 다루려는 의도를 가진 광고들은 이 조항을 이유로 거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광고 정책 수립과 집행을 자문하는 광고운영위원회에 광고 전문가뿐 아니라 인권 전문가, 청년, 성소수자를 구성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광고심의위원회의 구성원을 광고 관련 분야 학자나 광고업계 관계자, 법조인 정도로 제한하고 있는 서울교통공사와 크게 대비됩니다.

런던 지하철을 운영하는 런던교통국 광고 정책집의 표지. 런던 지하철에서는 정당이나 선거운동 광고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범위의 정치적 광고가 허용되고 있습니다런던 지하철을 운영하는 런던교통국 광고 정책집의 표지. 런던 지하철에서는 정당이나 선거운동 광고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범위의 정치적 광고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런던 지하철의 안내 인사가 "숙녀, 신사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에서 "안녕하세요, 여러분(hello everyone)"으로 바뀌었습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든' 승객들이 환영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젠더중립적으로 변화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매우 정치적, 사회적인 공간임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태호 사장은 지하철이 그저 편안한 이동을 제공할 뿐 논쟁의 공간이 아니라고 했지만, 지하철이 시민의 발로 남아 있는 한 지하철역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과 기준은 정치적이고 공적인 의제임이 분명합니다.

교통공사의 광고관리규정에 대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논쟁적인 말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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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런던 지하철에선 되지만, 서울 지하철에선 안 되는 것?
    • 입력 2018-07-07 07:33:00
    취재K
"난 나일 뿐, 고기가 아닙니다."
"여기 두 남자가 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게이입니다. 그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고정 관념은 편협한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철도인 영국 런던 지하철역에 걸렸던 광고 문구들입니다. 상품을 선전하는 일반 광고와 달리, 채식이나 성소수자 인권처럼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생각해보게 하는 내용들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런던교통국(Transport for London)이 발간한 연간 광고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년 간 런던 지하철역·버스정류장에 붙은 광고 10건 중 1건 이상이 이런 사회적·정치적 광고(단, 정부 광고 포함)였습니다. 오락·레저 광고, 소매업 광고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유형을 차지했습니다.

런던 지하철역에 걸린 성소수자 인권 광고 (출처: 텀블러)
반면 서울 지하철에는 이런 정치적·사회적 광고가 설 자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1~8호선 운영사인 서울교통공사는 지난달 22일 교통공사 광고심의위원회에 이른바 '의견 광고' 게시 문제를 안건으로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 "앞으로 개인이나 단체의 주장 또는 성·정치·종교·이념의 메시지가 담긴 '의견 광고'를 지하철역에 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간 서울 지하철역에 걸렸던 동물보호 운동 광고,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 페미니즘·성평등 광고를 앞으로는 볼 수 없게 된 겁니다. 숙대 여성학 동아리 학생들이 4호선 숙대입구역에 게시한 페미니즘 광고도 계약 기간인 오는 9월 초까지만 게시됩니다.

[연관 기사] 서울 지하철, 여성주의 광고 “민원 우려로 거절” 논란…“규정대로 심의”

교통공사 측은 "그동안 의견광고 게시를 반려했던 게 많이 이슈화됐었는데 저희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고, 공기업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런 광고를 아예 안 받는 걸로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음 이사회에서 의견광고 게시 금지 규정을 추가한 '광고관리규정' 개정안을 의결할 예정이며, 광고심의위 결정이 나온 지난달 22일부터 이미 의견광고는 받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태호 서울교통공사 사장도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관련 기사 링크와 함께 "지하철을 논란의 장으로 자꾸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지하철은 모두에게 편안한 이동을 제공하는 것이지 논쟁의 공간이 아닙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김태호 서울교통공사 사장이 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캡처
이런 방침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일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의견광고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 게 과연 바람직한 방향이냐는 겁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지하철역이 "중요한 공론의 영역"이라고 전제한 뒤, "대통령 생일축하 광고는 공익과 관계없기 때문에 게시를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미니즘 광고처럼 성평등과 여성의 시민적 권리라는 공익, 사회 정의를 다루는 광고까지 거부하겠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신 교수는 "남성 등 특정 집단을 비난하는 방식의 광고는 불가능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설사 반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성숙하게 담론의 영역으로 끌어와야 하는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반대, 항의의 목소리가 들어올 수 있는 건데 교통공사가 그런 부분을 다루기 싫거나 다룰 능력이 없어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보수주의"라고 비판했습니다.

시민들의 공적인 일상 공간으로서 지하철역이 가지는 중요한 성격을 교통공사가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서울교통공사 '고객의소리' 게시판에도 "페미니즘 광고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여성 인권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비슷한 취지의 항의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 걸린 페미니즘 광고.
신 교수는 이번 문제와 관련해 "공익, 사회정의와 같은 측면에서 광고 게시 판단 기준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잘 운영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

런던 지하철을 운영하는 런던교통국의 광고 정책 가이드라인이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런던교통국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와 관련된 이미지나 내용을 포함한 광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광범위한, 혹은 심각한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광고의 게시는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을 가이드라인에 포함하고 있지만, 분명한 예외를 뒀습니다.

관용(톨레랑스)을 증진시키거나 편견을 저지하는 등, 사회 구성원의 인종·젠더·장애·신념·성적 지향성과 관련된 사회적 평등 문제를 다루려는 의도를 가진 광고들은 이 조항을 이유로 거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광고 정책 수립과 집행을 자문하는 광고운영위원회에 광고 전문가뿐 아니라 인권 전문가, 청년, 성소수자를 구성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광고심의위원회의 구성원을 광고 관련 분야 학자나 광고업계 관계자, 법조인 정도로 제한하고 있는 서울교통공사와 크게 대비됩니다.

런던 지하철을 운영하는 런던교통국 광고 정책집의 표지. 런던 지하철에서는 정당이나 선거운동 광고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범위의 정치적 광고가 허용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런던 지하철의 안내 인사가 "숙녀, 신사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에서 "안녕하세요, 여러분(hello everyone)"으로 바뀌었습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든' 승객들이 환영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젠더중립적으로 변화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이 매우 정치적, 사회적인 공간임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태호 사장은 지하철이 그저 편안한 이동을 제공할 뿐 논쟁의 공간이 아니라고 했지만, 지하철이 시민의 발로 남아 있는 한 지하철역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과 기준은 정치적이고 공적인 의제임이 분명합니다.

교통공사의 광고관리규정에 대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논쟁적인 말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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