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낸 아나운서 이상협 “뉴스 중 시상이 떠오르면…”

입력 2018.07.08 (07: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상협(44) KBS 아나운서는 수동적인 뉴스 전달자의 비애를 담은 시 '앵커'로 등단했다.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좋은 목소리로 대중을 속였던 시기", "그 불행에 대한 기록"으로 그는 시인이 됐다.

이상협은 자신을 시인으로 만든 이 작품에 대해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시 중 하나"라고 했다. 또 "이 시를 보면 고통스럽고 힘들다. 애착을 가지고 있는 시는 아니다. '앵커' 같은 시를 다시는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1997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로 동상을 받았고 이후 앨범을 두 차례 발매하는 등 음악으로 감정을 전달해오던 이상협이 또 다른 표현매체로 시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상협은 지난 4일 서울시 영등포구 KBS 본관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2008년 8.8 사태 이후 마음이 많이 허했다. 스트레스와 나쁜 에너지를 치환하고 싶었다. 불행에 대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8월 8일, 정권은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을 해임하기 위해 한국방송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날 이상협은 선봉에 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부패한 언론환경과 감봉 4개월의 징계였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그날 이후였어요. 파업 현장에서 북치고 구호 외치는 걸로 해소가 안 되는 뭔가가 있거든요. 시를 통해 상황을 담담하게 기록했어요. 객관적으로 적어 나가는 일기 같은 거죠. 그렇게 시작됐어요."

"대학 때부터 긴 글보다는 시적인 느낌의 문장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이상협은 본격적으로 시작(詩作)한 지 3년 만에 '앵커'를 썼고 일 년 뒤인 2012년 6월 '현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데뷔했다.

등단 6년 만에 출간한 시집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

그리고 등단 6년 만인 지난 4월, 첫 시집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을 출간했다. 시집에는 등단작인 '앵커', '민무늬 시간', '최초의 멍게', '너머', '백자의 숲', '필름 감광사', '후유(後有)'를 포함해 모두 60편의 작품이 실렸다.

이상협은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데 대해 "이명박-박근혜 시대 때 시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시를 써놓은 게 많지 않았고 이것저것 하는 일도 많았다. 제일 큰 이유는 제가 많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열 번 쓰면 그중 서너 차례 겨우 성공해요. 시간이 지나고 버리게 되는 경우도 많아서 결과적으로 열개 중 작품 하나 정도 남아요. 시는 쓰고 버리는 작업의 반복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오래 걸린 것 같아요. 참 재밌는 게 많이 쓰고 오래 쓰면 편하게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지를 볼 때마다 매번 '내가 어떻게 시를 썼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요. 그런데 또 어떻게 써져요."

이상협은 "제 시집을 읽다 보면 뭔지 모를 우울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울음'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은 원래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잖아요. 가족, 친구, 직장에서 내 모습이 다른 것처럼 제게도 시인으로서의 자아와 방송에서의 자아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아요. 방송이 시작되면 '방송 모드'로 스위치를 켜고 아나운서의 모습을 꺼내지만 사실 아나운서가 제 성격에 맞는 직업은 아니에요.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성적인 편이에요. 그런 감성이 시에 드러나는 것 같아요."

불현듯 찾아오는 영감…잊지 않기 위해 메모의 생활화

이상협은 "공간이 달라지면 신체와 감성도 다르게 변하는 것 같다"며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볼 때 마음의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 여행을 통해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정한 상황에서 영감이 오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어떤 단어와 문장이 들어온다"고 덧붙였다.

"시인에게 영감은 되게 중요한데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과 함께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과 같은 문장이 들어와요. 정말 불현듯. 굉장히 짜릿하죠. 꿈속에서 오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또는 뉴스 하던 도중에 생각나기도 해요. 뉴스 중 영감이 오면 조금 난감해요. 그럴 때는 뉴스를 읽으면서 한 손으로 메모를 막 쓰기도 해요. 이런 경우가 자주 있어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시, 츄파춥스 같아

이상협은 이렇게 불현듯 떠오른 표현을 다듬고 확장하는 작업과 "묻혀있던 우리의 좋은 단어를 발굴하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시인은 언어를 실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단어, 문장으로 말을 만들 수 있구나. 이런 단어도 있구나' 하고 알려주는 게 시인인 것 같아요. 보통 주술목 구조로 문장이 구성된다고 생각하는데 시의 문장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잖아요. 술어가 없는 문장임에도 훨씬 이해가 잘 되는 경우도 있고요. 시인들이 일부러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실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이상협은 "현대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우문에 "한국어로 된 모든 글을 이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인 것 같다. 시는 이해 이전의 감정을 느끼는 장르"라고 답했다.

"음악처럼 시도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요. 이해하는 것도 다르고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또 다르죠. 그때마다 계속 감정을 끌어내는 거예요. 츄파춥스처럼 다양한 맛을 느끼는 거죠. 시는 괄호와 공간이 많은 문학이에요. 내가 개입할 여지가 아주 많은 거죠.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롭고 재밌어요. 세상에 어려운 시는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시와 좋아하지 않는 시가 있을 뿐이에요.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읽으면 돼요. 시를 읽고 이상한 감정 하나가 남았다면 성공한 거예요."

K스타 정혜정 kbs.sprinter@kbs.co.kr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시집 낸 아나운서 이상협 “뉴스 중 시상이 떠오르면…”
    • 입력 2018-07-08 07:00:59
    K-STAR

이상협(44) KBS 아나운서는 수동적인 뉴스 전달자의 비애를 담은 시 '앵커'로 등단했다.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좋은 목소리로 대중을 속였던 시기", "그 불행에 대한 기록"으로 그는 시인이 됐다.

이상협은 자신을 시인으로 만든 이 작품에 대해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시 중 하나"라고 했다. 또 "이 시를 보면 고통스럽고 힘들다. 애착을 가지고 있는 시는 아니다. '앵커' 같은 시를 다시는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1997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로 동상을 받았고 이후 앨범을 두 차례 발매하는 등 음악으로 감정을 전달해오던 이상협이 또 다른 표현매체로 시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상협은 지난 4일 서울시 영등포구 KBS 본관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2008년 8.8 사태 이후 마음이 많이 허했다. 스트레스와 나쁜 에너지를 치환하고 싶었다. 불행에 대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8월 8일, 정권은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을 해임하기 위해 한국방송에 공권력을 투입했다. 이날 이상협은 선봉에 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부패한 언론환경과 감봉 4개월의 징계였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그날 이후였어요. 파업 현장에서 북치고 구호 외치는 걸로 해소가 안 되는 뭔가가 있거든요. 시를 통해 상황을 담담하게 기록했어요. 객관적으로 적어 나가는 일기 같은 거죠. 그렇게 시작됐어요."

"대학 때부터 긴 글보다는 시적인 느낌의 문장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는 이상협은 본격적으로 시작(詩作)한 지 3년 만에 '앵커'를 썼고 일 년 뒤인 2012년 6월 '현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데뷔했다.

등단 6년 만에 출간한 시집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

그리고 등단 6년 만인 지난 4월, 첫 시집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을 출간했다. 시집에는 등단작인 '앵커', '민무늬 시간', '최초의 멍게', '너머', '백자의 숲', '필름 감광사', '후유(後有)'를 포함해 모두 60편의 작품이 실렸다.

이상협은 첫 시집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데 대해 "이명박-박근혜 시대 때 시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시를 써놓은 게 많지 않았고 이것저것 하는 일도 많았다. 제일 큰 이유는 제가 많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열 번 쓰면 그중 서너 차례 겨우 성공해요. 시간이 지나고 버리게 되는 경우도 많아서 결과적으로 열개 중 작품 하나 정도 남아요. 시는 쓰고 버리는 작업의 반복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오래 걸린 것 같아요. 참 재밌는 게 많이 쓰고 오래 쓰면 편하게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지를 볼 때마다 매번 '내가 어떻게 시를 썼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요. 그런데 또 어떻게 써져요."

이상협은 "제 시집을 읽다 보면 뭔지 모를 우울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울음'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은 원래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잖아요. 가족, 친구, 직장에서 내 모습이 다른 것처럼 제게도 시인으로서의 자아와 방송에서의 자아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아요. 방송이 시작되면 '방송 모드'로 스위치를 켜고 아나운서의 모습을 꺼내지만 사실 아나운서가 제 성격에 맞는 직업은 아니에요.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내성적인 편이에요. 그런 감성이 시에 드러나는 것 같아요."

불현듯 찾아오는 영감…잊지 않기 위해 메모의 생활화

이상협은 "공간이 달라지면 신체와 감성도 다르게 변하는 것 같다"며 "여행지에서 새로운 것을 볼 때 마음의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 여행을 통해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정한 상황에서 영감이 오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어떤 단어와 문장이 들어온다"고 덧붙였다.

"시인에게 영감은 되게 중요한데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과 함께 '사람은 모두 울고 난 얼굴'과 같은 문장이 들어와요. 정말 불현듯. 굉장히 짜릿하죠. 꿈속에서 오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또는 뉴스 하던 도중에 생각나기도 해요. 뉴스 중 영감이 오면 조금 난감해요. 그럴 때는 뉴스를 읽으면서 한 손으로 메모를 막 쓰기도 해요. 이런 경우가 자주 있어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시, 츄파춥스 같아

이상협은 이렇게 불현듯 떠오른 표현을 다듬고 확장하는 작업과 "묻혀있던 우리의 좋은 단어를 발굴하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시인은 언어를 실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단어, 문장으로 말을 만들 수 있구나. 이런 단어도 있구나' 하고 알려주는 게 시인인 것 같아요. 보통 주술목 구조로 문장이 구성된다고 생각하는데 시의 문장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잖아요. 술어가 없는 문장임에도 훨씬 이해가 잘 되는 경우도 있고요. 시인들이 일부러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실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이상협은 "현대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우문에 "한국어로 된 모든 글을 이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인 것 같다. 시는 이해 이전의 감정을 느끼는 장르"라고 답했다.

"음악처럼 시도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요. 이해하는 것도 다르고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또 다르죠. 그때마다 계속 감정을 끌어내는 거예요. 츄파춥스처럼 다양한 맛을 느끼는 거죠. 시는 괄호와 공간이 많은 문학이에요. 내가 개입할 여지가 아주 많은 거죠.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롭고 재밌어요. 세상에 어려운 시는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시와 좋아하지 않는 시가 있을 뿐이에요.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읽으면 돼요. 시를 읽고 이상한 감정 하나가 남았다면 성공한 거예요."

K스타 정혜정 kbs.sprinter@kbs.co.kr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