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재일학도의용군의 6·25참전…숭고한 양심의 기록

입력 2018.07.0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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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문제에 대응하는 한국 남성의 자세는 다음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의무가 없어도 간다. (이를테면, 해외 영주권· 이중국적 포기하고서…)
둘째, 의무가 없어서 안 간다.
셋째, 의무가 있어서 간다.
넷째, 의무가 있어도 안 간다.
다섯째, 의무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안 간다. (이를테면, ‘그분’들의 즐겨 쓰는…)

[ 재일동포 청년 642명이 현해탄을 건넌 이유는? ]

이 가운데 첫 번째 사례의 선구자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6·25전쟁 참전했던 재일학도의용군의 이야기이다.


지난 6월 22일 일본 도쿄의 주일본 한국대사관이 조촐하지만 뜻깊은 행사를 열었다. ‘6·25전쟁 68주년 기념 ; 재일학도의용군 참전용사 및 재향군인회 초청 행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학도의용군 참전용사 5명 중 조인석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일본지회장과 유재만 이사 등 2명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반세기 이상이 지나, 백세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들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엊그제 일처럼 기억했다.


68년 전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벌어졌을 때, “조국을 지켜야한다”며 안전지대 일본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온 젊은이들이 있었다. 징병제의 의무도 조국의 부름도 없었지만, 학업과 생업을 중단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남긴 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재일동포 학생조직인 한국학생동맹과 조선건국촉진 청년동맹에 모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참전을 결의하고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에 이러한 뜻을 전달했다. 지원자 천 명 가운데 642명이 선발됐다. 상당수는 안정된 삶이 보장된 고학력자였지만, 이들의 양심은 풍전등화 조국의 상황을 외면하지 못했다.

[ 위험한 전투 앞장, 137명 희생 … 뒤통수 친 日정부]

참전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극동지구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참전을 위한 편의제공을 요청했지만 처음에는 확답이 없었다. 실제 참전은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등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진 뒤에야 받아들여졌다.


선발대는 우선 미군에 입대해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뒤 인천상륙작전 등 가장 위험한 전선에 먼저 투입됐다. 이후 미 8군과 한국군에 편입돼 서울탈환작전, 백마고지전투 ,원산·이원상륙작전, 갑산·혜산진 탈환작전 등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희생은 컸다. 전투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35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됐다. (국립국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희생자 수를 147명으로 밝히고 있다.)

양심에 따라 선택한 참전의 길, 희생도 컸지만 대가도 혹독했다. 1951년부터 일본 귀환이 시작됐지만, 정작 1953년 휴전 협정 이후에는 귀환 길이 막혔다. 1952년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허가 없이 참전했다’며 재일학도의용군의 입국을 거부했다. 242명은 결국 이산의 아픔을 안고 대한민국에 남게 됐다. 이들은 훗날,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 반대 운동에도 앞장서게 된다.

[ 목숨을 건 영웅들에게 마땅한 예우를… ]

정부는 1967년에야 참전용사 중 소재가 확인된 317명에게 방위포상 수여했다. 1968년부터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해 보훈 지원을 시작했다. 1977년에는 소재불명 등으로 서훈에서 빠졌던 45명을 찾아 추가로 포상했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1973년 국립묘지에 ‘재일학도의용군위령비’를 세웠다. 1979년에는, 교민 성금과 정부 지원 등을 모아 인천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비’를 세웠다. 해마다 이곳에서 학도의용군의 충혼을 기리는 기념식을 열고 있다.

2014년 6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해외 각지의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 18명을 초청해 보훈 행사를 열었다.


2017년 9월 ‘재일학도의용군 제67주년 6·25참전 기념식’에는 국가보훈처 차장과 인천시장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대통령은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 해외동포 참전의 선구자 … '양심'은 '애국심'의 다른 이름 ]

일본 거주 동포의 참전은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해외동포 참전보다 17년가량 앞섰다. 세계 전쟁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병역에서 빠지려고 기를 쓰고 발버둥치거나, 전쟁 나면 도망갈 궁리부터 하는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다는 뒷말을 들을지라도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모이고 모여서 나라를 지켜온 것은 아닐까?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에 게재된 ‘양심’의 설명이다. “양심을 올바로 지닌. 또는 그런 것” 같은 사전에 게재된 ‘양심적’의 설명이다.

‘양심’이라는 어휘는 사용 주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이를테면, 혹자는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거나 안전지대로 떠나고, 혹자는 ‘양심’에 따라, 안전지대에 머물 권리를 포기하고 전쟁터로 자원해 떠난다.


‘양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말한다면, 재일학도의용군의 희생적 선택은 ‘숭고한 양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 양심은 애국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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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재일학도의용군의 6·25참전…숭고한 양심의 기록
    • 입력 2018-07-08 09:34:24
    특파원 리포트
군대 문제에 대응하는 한국 남성의 자세는 다음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의무가 없어도 간다. (이를테면, 해외 영주권· 이중국적 포기하고서…)
둘째, 의무가 없어서 안 간다.
셋째, 의무가 있어서 간다.
넷째, 의무가 있어도 안 간다.
다섯째, 의무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안 간다. (이를테면, ‘그분’들의 즐겨 쓰는…)

[ 재일동포 청년 642명이 현해탄을 건넌 이유는? ]

이 가운데 첫 번째 사례의 선구자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6·25전쟁 참전했던 재일학도의용군의 이야기이다.


지난 6월 22일 일본 도쿄의 주일본 한국대사관이 조촐하지만 뜻깊은 행사를 열었다. ‘6·25전쟁 68주년 기념 ; 재일학도의용군 참전용사 및 재향군인회 초청 행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학도의용군 참전용사 5명 중 조인석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일본지회장과 유재만 이사 등 2명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반세기 이상이 지나, 백세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들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엊그제 일처럼 기억했다.


68년 전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벌어졌을 때, “조국을 지켜야한다”며 안전지대 일본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온 젊은이들이 있었다. 징병제의 의무도 조국의 부름도 없었지만, 학업과 생업을 중단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남긴 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재일동포 학생조직인 한국학생동맹과 조선건국촉진 청년동맹에 모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참전을 결의하고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에 이러한 뜻을 전달했다. 지원자 천 명 가운데 642명이 선발됐다. 상당수는 안정된 삶이 보장된 고학력자였지만, 이들의 양심은 풍전등화 조국의 상황을 외면하지 못했다.

[ 위험한 전투 앞장, 137명 희생 … 뒤통수 친 日정부]

참전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극동지구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참전을 위한 편의제공을 요청했지만 처음에는 확답이 없었다. 실제 참전은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등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진 뒤에야 받아들여졌다.


선발대는 우선 미군에 입대해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뒤 인천상륙작전 등 가장 위험한 전선에 먼저 투입됐다. 이후 미 8군과 한국군에 편입돼 서울탈환작전, 백마고지전투 ,원산·이원상륙작전, 갑산·혜산진 탈환작전 등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희생은 컸다. 전투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35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됐다. (국립국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희생자 수를 147명으로 밝히고 있다.)

양심에 따라 선택한 참전의 길, 희생도 컸지만 대가도 혹독했다. 1951년부터 일본 귀환이 시작됐지만, 정작 1953년 휴전 협정 이후에는 귀환 길이 막혔다. 1952년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허가 없이 참전했다’며 재일학도의용군의 입국을 거부했다. 242명은 결국 이산의 아픔을 안고 대한민국에 남게 됐다. 이들은 훗날,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 반대 운동에도 앞장서게 된다.

[ 목숨을 건 영웅들에게 마땅한 예우를… ]

정부는 1967년에야 참전용사 중 소재가 확인된 317명에게 방위포상 수여했다. 1968년부터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해 보훈 지원을 시작했다. 1977년에는 소재불명 등으로 서훈에서 빠졌던 45명을 찾아 추가로 포상했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1973년 국립묘지에 ‘재일학도의용군위령비’를 세웠다. 1979년에는, 교민 성금과 정부 지원 등을 모아 인천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비’를 세웠다. 해마다 이곳에서 학도의용군의 충혼을 기리는 기념식을 열고 있다.

2014년 6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해외 각지의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 18명을 초청해 보훈 행사를 열었다.


2017년 9월 ‘재일학도의용군 제67주년 6·25참전 기념식’에는 국가보훈처 차장과 인천시장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대통령은 축하메시지를 보냈다.

[ 해외동포 참전의 선구자 … '양심'은 '애국심'의 다른 이름 ]

일본 거주 동포의 참전은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해외동포 참전보다 17년가량 앞섰다. 세계 전쟁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병역에서 빠지려고 기를 쓰고 발버둥치거나, 전쟁 나면 도망갈 궁리부터 하는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다는 뒷말을 들을지라도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모이고 모여서 나라를 지켜온 것은 아닐까?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에 게재된 ‘양심’의 설명이다. “양심을 올바로 지닌. 또는 그런 것” 같은 사전에 게재된 ‘양심적’의 설명이다.

‘양심’이라는 어휘는 사용 주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이를테면, 혹자는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거나 안전지대로 떠나고, 혹자는 ‘양심’에 따라, 안전지대에 머물 권리를 포기하고 전쟁터로 자원해 떠난다.


‘양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말한다면, 재일학도의용군의 희생적 선택은 ‘숭고한 양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에게 양심은 애국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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