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국정원의 은밀한 ‘블랙리스트’ 핍박받은 그들의 고백

입력 2018.07.10 (17:00) 수정 2018.07.1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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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탐사보도부가 단독 입수한 국가정보원 문건은 한 장짜리 요약본입니다. 환경부가 국정원에 '4대강 관련 민간인 사찰 내역'을 요구했고, 국정원이 이를 요약해서 보낸 겁니다. 문서를 통해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자행한 민간인 사찰 사실이 입증됐지만, 문건에는 '환경단체, 학계 교수, 종교인'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어서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사찰했는지 상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취재진은 4대강 사업을 반대했던 당시 교수, 종교인, 환경단체 등 각 분야 담당자를 수소문해 무작정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사찰 특성상 피해 사례를 찾는 게 쉽지 않을 줄 알았지만, 국정원 직원과의 만남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먼저 4대강 활동을 주도했던 환경단체들을 국정원이 직접 압박한 정황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환경재단 이미경 상임이사는 4대강 사업에 우호적인 연구 결과를 나오게 해달라는 국정원 직원의 회유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후원사로 관계가 좋던 한 사기업 담당자는 국정원 직원이 회의에 들어와 환경재단에대한 지원을 끊을 것을 강요했다며, 이 이사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기업의 담당자는 이미 집행된 금액에 대해서 국정원 직원이 왜 지급했느냐며 압박한다면서 이 이사에게 후원한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4대강 사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단체를 그야말로 고사시키겠다는 전방위 압박이 자행된 겁니다.

환경재단 이미경 상임이사환경재단 이미경 상임이사

이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공기업에 재직 중임에도 용기를 내 고백한 한국가스공사 김형규 과장은 사장실에서 국정원 직원이 환경단체에 자금 지급을 중단하라고 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행동에 항변했지만, 결국 돌아온 건 사업 중단과 업무 배제였습니다.

종교인과 교수는 어떨까요. 국정원 직원이 종종 전화를 걸어 "친하게 지내자", "4대강 사업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다" 등 국정원 직원임을 밝히며 안부 인사하듯 가볍게 종종 연락했습니다. 살면서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국정원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도 상당하죠. 전화를 받은 이들은 모두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후로도 종종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받은 느낀 점은 한결같았습니다. '4대강 사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나를 국정원이 주시하고 있구나', '내 휴대전화, 이메일, 메신저, 동선까지 마음만 먹으면 모두 파악할 수 있겠구나.' 결국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에 나섰던 한 신부는 걱정 끝에 국내 스마트폰 메신저 앱을 버리고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로 갈아탔습니다. 역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던 교수는 보안에 취약하다는 걱정 때문에 멀쩡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스마트폰을 버리고 iOS 기반의 아이폰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국정원 문건에는 학계 교수를 통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거론됩니다. 단순 동향 수집뿐 아니라 '교원 평가실태 점검', '국고지원금, 연구용역비 감사 추진' 등입니다. 교수들은 학자로서 정부기관이 진행하는 다양한 연구에 참여하는데 정부 용역 연구비가 어떻게 집행이 됐는지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언론 인터뷰나 기고문 등을 통해 명료하게 찬반 의사를 밝힌 교수 368명의 2008~2016년 9년치 연구비 수령액을 조사했습니다. 정부 부처에서 진행한 연구용역이 정리돼있는 NTIS,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 홈페이지에 나온 결과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단순 참여교수는 중복 우려가 커서 총책임자로 나온 교수만 집계했습니다.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 홈페이지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 홈페이지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1인당 금액을 비교해 보니 4대강 찬성 교수가 반대 교수의 4배 가까이 더 많았습니다. 특히, 2008년부터 상승 추이를 비교해봤는데 반대 교수들은 제자리걸음이거나 소폭 하락추세인데 반해 찬성 교수는 매년 급상승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위 10명 교수도 추려봤습니다. 가장 많은 연구용역비를 진행한 10명의 교수 모두 찬성 집단 교수였습니다. 제일 큰 금액의 연구 용역을 진행한 교수는 375억 원을 넘겼습니다.

9년간 1인당 평균 연구 용역 수주 금액9년간 1인당 평균 연구 용역 수주 금액

2008~2016년 1인당 연구비 평균2008~2016년 1인당 연구비 평균

취재진은 두 집단간의 현격한 연구비 격차가 4대강 사업에 대한 입장차 때문으로 볼 수 있는지 전문가에게 통계분석을 의뢰했습니다. 한양대학교 정치학과 박상신 교수는 '두 집단 간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결론을 확정지었습니다. 정부의 사업에 대해 찬성하는 교수들에게 정부 연구 용역을 몰아줬다는 얘기입니다.

취재를 통해 만난 수많은 교수와 활동가, 종교인들은 하나같이 "그럼에도 내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끈질긴 외침과 활동이 있었기에 4대강 사업은 사업 기간 내내 감시받고, 문제점들이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됐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더 많은 4대강 사찰 피해자 집단의 일부분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분명 취재진이 접촉하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이고,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국가 안보와 무관한 사안에 대해, 특히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민간인에 대해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사찰하고, 금전적 불이익까지 준 건 명백히 국정원법 위반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근 국정원이 KBS 보도에 대해 사실임을 인정한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보내왔습니다. 이제 피해자들의 용기 어린 고백에만 의존할 때는 지났습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부 내용이 담긴 자료를 공개하고, 필요하다면 수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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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국정원의 은밀한 ‘블랙리스트’ 핍박받은 그들의 고백
    • 입력 2018-07-10 17:00:11
    • 수정2018-07-17 16:41:29
    취재후·사건후
KBS 탐사보도부가 단독 입수한 국가정보원 문건은 한 장짜리 요약본입니다. 환경부가 국정원에 '4대강 관련 민간인 사찰 내역'을 요구했고, 국정원이 이를 요약해서 보낸 겁니다. 문서를 통해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자행한 민간인 사찰 사실이 입증됐지만, 문건에는 '환경단체, 학계 교수, 종교인'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어서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사찰했는지 상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취재진은 4대강 사업을 반대했던 당시 교수, 종교인, 환경단체 등 각 분야 담당자를 수소문해 무작정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사찰 특성상 피해 사례를 찾는 게 쉽지 않을 줄 알았지만, 국정원 직원과의 만남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먼저 4대강 활동을 주도했던 환경단체들을 국정원이 직접 압박한 정황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환경재단 이미경 상임이사는 4대강 사업에 우호적인 연구 결과를 나오게 해달라는 국정원 직원의 회유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후원사로 관계가 좋던 한 사기업 담당자는 국정원 직원이 회의에 들어와 환경재단에대한 지원을 끊을 것을 강요했다며, 이 이사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기업의 담당자는 이미 집행된 금액에 대해서 국정원 직원이 왜 지급했느냐며 압박한다면서 이 이사에게 후원한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4대강 사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단체를 그야말로 고사시키겠다는 전방위 압박이 자행된 겁니다.

환경재단 이미경 상임이사
이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공기업에 재직 중임에도 용기를 내 고백한 한국가스공사 김형규 과장은 사장실에서 국정원 직원이 환경단체에 자금 지급을 중단하라고 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행동에 항변했지만, 결국 돌아온 건 사업 중단과 업무 배제였습니다.

종교인과 교수는 어떨까요. 국정원 직원이 종종 전화를 걸어 "친하게 지내자", "4대강 사업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다" 등 국정원 직원임을 밝히며 안부 인사하듯 가볍게 종종 연락했습니다. 살면서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국정원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도 상당하죠. 전화를 받은 이들은 모두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후로도 종종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이들이 받은 느낀 점은 한결같았습니다. '4대강 사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나를 국정원이 주시하고 있구나', '내 휴대전화, 이메일, 메신저, 동선까지 마음만 먹으면 모두 파악할 수 있겠구나.' 결국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에 나섰던 한 신부는 걱정 끝에 국내 스마트폰 메신저 앱을 버리고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로 갈아탔습니다. 역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던 교수는 보안에 취약하다는 걱정 때문에 멀쩡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스마트폰을 버리고 iOS 기반의 아이폰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국정원 문건에는 학계 교수를 통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거론됩니다. 단순 동향 수집뿐 아니라 '교원 평가실태 점검', '국고지원금, 연구용역비 감사 추진' 등입니다. 교수들은 학자로서 정부기관이 진행하는 다양한 연구에 참여하는데 정부 용역 연구비가 어떻게 집행이 됐는지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언론 인터뷰나 기고문 등을 통해 명료하게 찬반 의사를 밝힌 교수 368명의 2008~2016년 9년치 연구비 수령액을 조사했습니다. 정부 부처에서 진행한 연구용역이 정리돼있는 NTIS,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 홈페이지에 나온 결과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단순 참여교수는 중복 우려가 커서 총책임자로 나온 교수만 집계했습니다.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 홈페이지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1인당 금액을 비교해 보니 4대강 찬성 교수가 반대 교수의 4배 가까이 더 많았습니다. 특히, 2008년부터 상승 추이를 비교해봤는데 반대 교수들은 제자리걸음이거나 소폭 하락추세인데 반해 찬성 교수는 매년 급상승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상위 10명 교수도 추려봤습니다. 가장 많은 연구용역비를 진행한 10명의 교수 모두 찬성 집단 교수였습니다. 제일 큰 금액의 연구 용역을 진행한 교수는 375억 원을 넘겼습니다.

9년간 1인당 평균 연구 용역 수주 금액
2008~2016년 1인당 연구비 평균
취재진은 두 집단간의 현격한 연구비 격차가 4대강 사업에 대한 입장차 때문으로 볼 수 있는지 전문가에게 통계분석을 의뢰했습니다. 한양대학교 정치학과 박상신 교수는 '두 집단 간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결론을 확정지었습니다. 정부의 사업에 대해 찬성하는 교수들에게 정부 연구 용역을 몰아줬다는 얘기입니다.

취재를 통해 만난 수많은 교수와 활동가, 종교인들은 하나같이 "그럼에도 내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끈질긴 외침과 활동이 있었기에 4대강 사업은 사업 기간 내내 감시받고, 문제점들이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됐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더 많은 4대강 사찰 피해자 집단의 일부분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분명 취재진이 접촉하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이고,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국가 안보와 무관한 사안에 대해, 특히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민간인에 대해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사찰하고, 금전적 불이익까지 준 건 명백히 국정원법 위반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최근 국정원이 KBS 보도에 대해 사실임을 인정한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보내왔습니다. 이제 피해자들의 용기 어린 고백에만 의존할 때는 지났습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부 내용이 담긴 자료를 공개하고, 필요하다면 수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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