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좋아하는 것이 당신을 바꾼다, 그리고 세상도…‘니키 드 생팔 X 요코 마즈다’

입력 2018.07.1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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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던 1980년 8월 도쿄 우에노의 한 갤러리. 단발머리를 한 40대 여성이 판화 앞에서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습니다. 이 여성은 우에노 거리의 최신 빌딩 센트럴 21의 여주인이자 요식업계의 큰손인 시즈에 마즈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음식점 '하나야'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라면집과 카페까지 경영하며 돈 버는 데 탁월한 소질을 보였던 시즈에, 하지만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한 건 사업도 돈도 아니었습니다.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한 여성 작가의 예술품이었습니다.

'영혼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강렬한 체험이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갑자기 해방되고 에너지로 가득 차는 것 같은 만남이었다.'

‘샘의 나나-백색의 춤추는 나나’ 니키 드 생팔, 1971년‘샘의 나나-백색의 춤추는 나나’ 니키 드 생팔, 1971년

그때부터 이 일본 여성의 삶은 달라집니다. 자신의 건물 한 층을 모두 제공해 그 작가, 니키 드 생팔의 전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작품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전시회를 잇따라 여는가 하면, 언론에 소개하는 데도 열과 성의를 다했습니다. 작가를 만나기 위해 50살에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하게 됐습니다.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요코로 바꿨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니키가 부르기 쉬운 이름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니키 드 생팔 X 요코 마즈다'는 이렇게 한 작가에 '미친' 삶을 살았던 일본 여성을 조명한 책입니다. 예술과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한 일본인이 어떻게 예술을 만났는지, 그래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그렸습니다. 예술가의 일대기라면 모를까, 팬이나 수집가의 일대기라니 좀 낯섭니다. 단지 부자가 뭔가를 좋아했다는 게 책으로 남길만한 이야기일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보면 좀 다를지 모릅니다. 17살에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21살에 그 남자를 믿고 과감히 도피하다시피 결혼한 무모한 여자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요리, 빨래, 청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다 내가 할 테니까." 남자는 호기롭게 말했었죠. 사내아이 둘을 낳아 키웠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 말을 정말 믿었던 거냐고 되묻습니다. 사랑 같은 건 어느새 증발해 버렸습니다.

내가 번 돈은 나만 쓰겠다며 아예 나가 사는 남편, 그래도 보수적인 시대는 현모양처를 연기하라고 요구합니다. 집안일은 적성에 맞지 않고 만족감도 주지 않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음식점 일은 어렵고, 누구도 나를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이거 82년생 김지영 얘기 아닌가요? 아닙니다. 31년생 시즈에 마즈다 얘깁니다.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는 여성의 삶, 그 가슴 아픈 보편성이 책 속에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해. 뭘 하려고 해도 몸이 받쳐 주질 않아. 일도, 육아도, 아내 구실도 반쪽짜리야.'

"이 시대의 부인이란 남편을 뒤에서 따라가며 드러나지 않게 뒷받침하는 존재였다. 아내는 남편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돌보고 출근을 돕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시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영혼의 자화상’ 니키 드 생팔, 1981년‘영혼의 자화상’ 니키 드 생팔, 1981년

여성의 자화상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니키의 작품을 만난 이후로 요코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남들에게 자신 있게 얘기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됐죠. '욘사마'에 열광하던 일본 여성들이 떠올랐습니다. 평소엔 조용하지만 좋아하는 대상의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커집니다. 돈 쓰는 것, 시간을 들여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 모두 마다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나의 '스타'와 관계된 것을 직접 느끼려고 합니다.

'니키는 나다. 니키의 작품 세계는 그녀 자신의 역사이면서 또한 나 자신의, 여자들 자신의 역사다', '그래, 언젠가 나는 니키의 미술관을 지을 거야. 세상 널리 니키와 그녀의 작품을 알릴 거야.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 거야.' 그녀의 나이 50세였다.

어떤 사람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 버려, 돈 버려가며 그게 무슨 짓이야? 차라리 그 시간에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돈 잘 벌었던 도쿄 빌딩주 '시즈에 마즈다'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니키와 니키의 작품에 열광했던 컬렉터 '요코 마즈다'로 기억합니다. 그녀가 도쿄 거리에 세웠던 음식점도, 휘황찬란한 건물들도 이제는 사라지거나 구식이 됐지만 요코가 모았던 니키의 작품들은 '마즈다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돌고 있습니다. 그녀로 인해 니키는 더 유명해졌고 니키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을 모으는 동안 요코 자신이 행복했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결국 좋아서 하는 그 무언가가 나를 바꿉니다. 먹고 살아야 해서 하는 일로는 부족합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내 힘을 쏟아 더 크게 해주고 싶은 바로 그 대상이 있을 때 삶은 그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사람은 세상도 바꿉니다. 행복하게 사는 법, 혹은 제멋대로 사는 법이라는 키워드로 읽다 보면 주인공이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이 책은 술술 넘어갑니다.


올해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시즈에를 요코로 만든 바로 그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니키 드 생팔 展 마즈다 컬렉션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시회 한쪽에는 작가 니키 드 생팔 옆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짓는 단발머리 요코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불행했던, 하지만 사랑을 쏟으며 그걸 극복할 수 있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책과 전시장에서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니키 드 생팔 X 요코 마즈다'
구로이와 유키 지음, 이연식 옮김
(주)시공사,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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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좋아하는 것이 당신을 바꾼다, 그리고 세상도…‘니키 드 생팔 X 요코 마즈다’
    • 입력 2018-07-18 07:01:31
    여의도책방
일본 경제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던 1980년 8월 도쿄 우에노의 한 갤러리. 단발머리를 한 40대 여성이 판화 앞에서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습니다. 이 여성은 우에노 거리의 최신 빌딩 센트럴 21의 여주인이자 요식업계의 큰손인 시즈에 마즈다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음식점 '하나야'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라면집과 카페까지 경영하며 돈 버는 데 탁월한 소질을 보였던 시즈에, 하지만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한 건 사업도 돈도 아니었습니다.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한 여성 작가의 예술품이었습니다.

'영혼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강렬한 체험이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갑자기 해방되고 에너지로 가득 차는 것 같은 만남이었다.'

‘샘의 나나-백색의 춤추는 나나’ 니키 드 생팔, 1971년
그때부터 이 일본 여성의 삶은 달라집니다. 자신의 건물 한 층을 모두 제공해 그 작가, 니키 드 생팔의 전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작품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전시회를 잇따라 여는가 하면, 언론에 소개하는 데도 열과 성의를 다했습니다. 작가를 만나기 위해 50살에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하게 됐습니다.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요코로 바꿨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니키가 부르기 쉬운 이름을 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니키 드 생팔 X 요코 마즈다'는 이렇게 한 작가에 '미친' 삶을 살았던 일본 여성을 조명한 책입니다. 예술과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한 일본인이 어떻게 예술을 만났는지, 그래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그렸습니다. 예술가의 일대기라면 모를까, 팬이나 수집가의 일대기라니 좀 낯섭니다. 단지 부자가 뭔가를 좋아했다는 게 책으로 남길만한 이야기일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보면 좀 다를지 모릅니다. 17살에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21살에 그 남자를 믿고 과감히 도피하다시피 결혼한 무모한 여자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요리, 빨래, 청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다 내가 할 테니까." 남자는 호기롭게 말했었죠. 사내아이 둘을 낳아 키웠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 말을 정말 믿었던 거냐고 되묻습니다. 사랑 같은 건 어느새 증발해 버렸습니다.

내가 번 돈은 나만 쓰겠다며 아예 나가 사는 남편, 그래도 보수적인 시대는 현모양처를 연기하라고 요구합니다. 집안일은 적성에 맞지 않고 만족감도 주지 않습니다. 어렵게 시작한 음식점 일은 어렵고, 누구도 나를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이거 82년생 김지영 얘기 아닌가요? 아닙니다. 31년생 시즈에 마즈다 얘깁니다.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는 여성의 삶, 그 가슴 아픈 보편성이 책 속에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해. 뭘 하려고 해도 몸이 받쳐 주질 않아. 일도, 육아도, 아내 구실도 반쪽짜리야.'

"이 시대의 부인이란 남편을 뒤에서 따라가며 드러나지 않게 뒷받침하는 존재였다. 아내는 남편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돌보고 출근을 돕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시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영혼의 자화상’ 니키 드 생팔, 1981년
여성의 자화상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니키의 작품을 만난 이후로 요코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남들에게 자신 있게 얘기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됐죠. '욘사마'에 열광하던 일본 여성들이 떠올랐습니다. 평소엔 조용하지만 좋아하는 대상의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커집니다. 돈 쓰는 것, 시간을 들여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 모두 마다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나의 '스타'와 관계된 것을 직접 느끼려고 합니다.

'니키는 나다. 니키의 작품 세계는 그녀 자신의 역사이면서 또한 나 자신의, 여자들 자신의 역사다', '그래, 언젠가 나는 니키의 미술관을 지을 거야. 세상 널리 니키와 그녀의 작품을 알릴 거야.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 거야.' 그녀의 나이 50세였다.

어떤 사람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 버려, 돈 버려가며 그게 무슨 짓이야? 차라리 그 시간에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돈 잘 벌었던 도쿄 빌딩주 '시즈에 마즈다'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니키와 니키의 작품에 열광했던 컬렉터 '요코 마즈다'로 기억합니다. 그녀가 도쿄 거리에 세웠던 음식점도, 휘황찬란한 건물들도 이제는 사라지거나 구식이 됐지만 요코가 모았던 니키의 작품들은 '마즈다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돌고 있습니다. 그녀로 인해 니키는 더 유명해졌고 니키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을 모으는 동안 요코 자신이 행복했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결국 좋아서 하는 그 무언가가 나를 바꿉니다. 먹고 살아야 해서 하는 일로는 부족합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내 힘을 쏟아 더 크게 해주고 싶은 바로 그 대상이 있을 때 삶은 그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사람은 세상도 바꿉니다. 행복하게 사는 법, 혹은 제멋대로 사는 법이라는 키워드로 읽다 보면 주인공이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이 책은 술술 넘어갑니다.


올해 우리나라, 서울에서는 시즈에를 요코로 만든 바로 그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니키 드 생팔 展 마즈다 컬렉션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시회 한쪽에는 작가 니키 드 생팔 옆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짓는 단발머리 요코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불행했던, 하지만 사랑을 쏟으며 그걸 극복할 수 있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책과 전시장에서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니키 드 생팔 X 요코 마즈다'
구로이와 유키 지음, 이연식 옮김
(주)시공사,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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