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활판인쇄로 만나는 진달래꽃

입력 2018.07.22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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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꾹꾹 눌러 찍힌 글자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맨지르한 종이에 글씨가 매끈하게 인쇄된 책이 아니라, 살짝 거친 종이에 글자 한 자 한 자를 꾹꾹 눌러 찍은 흔적이 역력한 책. 심지어 손으로 만져보면 오톨도톨 불거진 흔적까지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을 읽던 기억이 있지요. 책을 술술 읽기에는 지금의 매끈한 책이 더 좋을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읽던 책에 대한 향수는 누구나 갖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그런 향수를 가진 분들을 위한 책, 활판인쇄로 다시 읽는 진달래꽃과 못잊어 입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뽑아내서 활판을 만들어 다시 종이에 한 장 한 장 찍어내는 '활판인쇄'는 6~70년대 인쇄방식입니다. 활판에 잉크를 묻힌 뒤 압력을 가해 말 그대로 '찍어' 내는 거죠. 책을 펼쳐보면 소박하고 정갈한 분위기에 절로 손을 올려보게 됩니다. 손끝에 살짝 와 닿는 글자의 느낌. 이렇게 글을 읽으면 한 글자 한 글자 더 새기며 읽게 되는 걸까요? 심지어 한 페이지를 눌러 찍을 때 활판이 약간 위로 밀리면서 모음자의 그림자가 위로 생겨난 듯한 느낌도 새롭습니다. 컴퓨터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날로그의 감성일까요?


일반 소설책 한 페이지에 500자가 들어간다면, 일반 사람들은 온종일이 걸려도 한 페이지 활판을 다 채워넣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 책에 쓰인 활자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만 2년. 우리가 쓰는 한글 글자를 모두 모으면 2,200~2,300자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글자들을 골라 활자를 만드는 데만 2년이 걸렸다는 얘기입니다. 이러고도 거꾸로 박아넣은 글자를 보며 교정도 하고 활자를 조판해 활판 인쇄기에 한 장씩 찍어내서 책을 만드는 과정도 필요하니, 책이 나오는 데는 모두 3년이 걸렸답니다.

모든 게 쉽게 쉽게 만들어지는 세상이지만, 힘들게 했을 때의 성취감도 있지 않은가, 하고 묻는 책입니다. 이 책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활자 하나하나에 집중해 쏟은 시간과 정성이 묻어있으니까요.



지금은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책도 컴퓨터로 만들지요. 원고만 있으면 책이 나오는데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면 된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택하지 않고 3년이 걸리는 길을 돌아간 것을 두고, 책을 낸 책과인쇄박물관 역시 '무모한 도전'이라 표현합니다. 인쇄 과정이 간단해지고 전자책까지 등장한 시대에 납 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본이 얼마나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냐, 시도 자체가 도전이라는 뜻이겠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일지라도, 활판인쇄기를 보유하고 있는 책과인쇄박물관이 아니면 아예 불가능했을 기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명 남지 않은 주조 장인을 모아 활판인쇄기를 돌리는 것도 박물관 아니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전용태 박물관장은 4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활판인쇄로 책을 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활판인쇄를 위해서는 수많은 글자에 수천 번의 손길이 갑니다. 종이 위에 글자가 살짝 올라탄 책 대신, 활자를 눌러 찍은 인쇄의 무게감을 느껴보세요. 지금의 첨단 인쇄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 잉크가 날아가 붉게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이에 눌러 찍은 인쇄물은 종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살아있습니다" 고 말입니다.

주조 장인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모아 새긴 책을 읽는 경험에 김소월 만큼 어울리는 작가를 고르기 힘들었을 듯싶습니다. 독자 역시 구절을 한 자 한 자 새기며, 쉼표와 마침표까지 새기며 읽게 됩니다. "흔적을 따라 눈으로 한 번, 손으로 한 번 더 읽는" 활판 인쇄의 세계라는 표현이 와 닿는 부분입니다.


책의 정가가 2만 5천 원이어서, 독자들에게는 그리 저렴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활판인쇄에 드는 비용과 정성을 계산해보면 원가는 감히 10만 원짜리라고 할 수 있다"고 전용태 관장은 설명하는군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권쯤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들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절로 손이 갔으니까요.

『활판인쇄로 다시읽는 진달래꽃』『활판인쇄로 다시읽는 못잊어』김소월, 책과인쇄박물관,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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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활판인쇄로 만나는 진달래꽃
    • 입력 2018-07-22 07:06:41
    여의도책방
책을 펼치면 꾹꾹 눌러 찍힌 글자들이 선명하게 다가오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맨지르한 종이에 글씨가 매끈하게 인쇄된 책이 아니라, 살짝 거친 종이에 글자 한 자 한 자를 꾹꾹 눌러 찍은 흔적이 역력한 책. 심지어 손으로 만져보면 오톨도톨 불거진 흔적까지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을 읽던 기억이 있지요. 책을 술술 읽기에는 지금의 매끈한 책이 더 좋을지는 모르지만, 예전에 읽던 책에 대한 향수는 누구나 갖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그런 향수를 가진 분들을 위한 책, 활판인쇄로 다시 읽는 진달래꽃과 못잊어 입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뽑아내서 활판을 만들어 다시 종이에 한 장 한 장 찍어내는 '활판인쇄'는 6~70년대 인쇄방식입니다. 활판에 잉크를 묻힌 뒤 압력을 가해 말 그대로 '찍어' 내는 거죠. 책을 펼쳐보면 소박하고 정갈한 분위기에 절로 손을 올려보게 됩니다. 손끝에 살짝 와 닿는 글자의 느낌. 이렇게 글을 읽으면 한 글자 한 글자 더 새기며 읽게 되는 걸까요? 심지어 한 페이지를 눌러 찍을 때 활판이 약간 위로 밀리면서 모음자의 그림자가 위로 생겨난 듯한 느낌도 새롭습니다. 컴퓨터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날로그의 감성일까요?


일반 소설책 한 페이지에 500자가 들어간다면, 일반 사람들은 온종일이 걸려도 한 페이지 활판을 다 채워넣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 책에 쓰인 활자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만 2년. 우리가 쓰는 한글 글자를 모두 모으면 2,200~2,300자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글자들을 골라 활자를 만드는 데만 2년이 걸렸다는 얘기입니다. 이러고도 거꾸로 박아넣은 글자를 보며 교정도 하고 활자를 조판해 활판 인쇄기에 한 장씩 찍어내서 책을 만드는 과정도 필요하니, 책이 나오는 데는 모두 3년이 걸렸답니다.

모든 게 쉽게 쉽게 만들어지는 세상이지만, 힘들게 했을 때의 성취감도 있지 않은가, 하고 묻는 책입니다. 이 책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활자 하나하나에 집중해 쏟은 시간과 정성이 묻어있으니까요.



지금은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책도 컴퓨터로 만들지요. 원고만 있으면 책이 나오는데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면 된다고 합니다. 이 과정을 택하지 않고 3년이 걸리는 길을 돌아간 것을 두고, 책을 낸 책과인쇄박물관 역시 '무모한 도전'이라 표현합니다. 인쇄 과정이 간단해지고 전자책까지 등장한 시대에 납 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본이 얼마나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냐, 시도 자체가 도전이라는 뜻이겠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일지라도, 활판인쇄기를 보유하고 있는 책과인쇄박물관이 아니면 아예 불가능했을 기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명 남지 않은 주조 장인을 모아 활판인쇄기를 돌리는 것도 박물관 아니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전용태 박물관장은 4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활판인쇄로 책을 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활판인쇄를 위해서는 수많은 글자에 수천 번의 손길이 갑니다. 종이 위에 글자가 살짝 올라탄 책 대신, 활자를 눌러 찍은 인쇄의 무게감을 느껴보세요. 지금의 첨단 인쇄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 잉크가 날아가 붉게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이에 눌러 찍은 인쇄물은 종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살아있습니다" 고 말입니다.

주조 장인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모아 새긴 책을 읽는 경험에 김소월 만큼 어울리는 작가를 고르기 힘들었을 듯싶습니다. 독자 역시 구절을 한 자 한 자 새기며, 쉼표와 마침표까지 새기며 읽게 됩니다. "흔적을 따라 눈으로 한 번, 손으로 한 번 더 읽는" 활판 인쇄의 세계라는 표현이 와 닿는 부분입니다.


책의 정가가 2만 5천 원이어서, 독자들에게는 그리 저렴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활판인쇄에 드는 비용과 정성을 계산해보면 원가는 감히 10만 원짜리라고 할 수 있다"고 전용태 관장은 설명하는군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권쯤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들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절로 손이 갔으니까요.

『활판인쇄로 다시읽는 진달래꽃』『활판인쇄로 다시읽는 못잊어』김소월, 책과인쇄박물관,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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