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소설 ‘장미의 이름’이 현실로? 유럽서 ‘맹독’ 바른 古書 발견

입력 2018.07.24 (20:30) 수정 2018.07.2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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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독살의 도구는 '책'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 수사들이 잇따라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시신의 혀와 손가락 끝이 까맣게 변색됐다는 점이 특이점이다.

살인 사건이었다. 독살의 도구는 '책'이었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위험한' 책(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권)을 읽지 못하도록 책에 독을 묻혀 놨던 것이다.
잘 떨어지지 않는 책장을 침을 발라 넘기며 금서(禁書) 읽기에 몰두했던 수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온 몸에 독이 퍼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이다. 책에 독을 묻힌다는 이 기발한 설정은, 두꺼운 추리소설 후반부에 밝혀지는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런데 실제로 독을 묻힌 고서(古書)가 유럽에서 발견돼 화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들도 이 소식을 전하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떠오른다고 했다.

덴마크 한 대학에서 발견된 독 묻은 古書

연구진이 발견된 고서를 들고 있다/ 출처:유럽방송연맹(EBU)화면 캡처 연구진이 발견된 고서를 들고 있다/ 출처:유럽방송연맹(EBU)화면 캡처

덴마크 오덴세에 있는 덴마크 남부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고문서 연구진들은 최근 이 대학의 한 건물 지하실에 보관된 수백년 전 고서(古書) 4만권 가운데 희귀서적 3권을 우연히 발견했다.

"Anglica Historia"(1570년), "Historia boiemica:Æneas Sylvius"(1575년), "Vitæ Patrum Das ist"(1604년)이었다. 이 세 권은 16세기와 17세기에 만들어진 역사 서적이었는데 표지로 고대 로마법 혹은 교회법과 관련된 중세시대 필사본이 사용됐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있었다(16세기~17세기 유럽 서적상들은 새 책을 제본하기 위해 오래된 양피지를 재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표지에 발린 녹색 염료가 문제였다. 표지에 적힌 라틴어 원문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녹색 염료가 두껍게 발려 있었던 것이다.

중세시대 양피지에 적힌 글자 판독을 위해 연구진은 마이크로 X선 형광분석(XRF)을 실시했다. 혹시 표지에 쓰인 잉크가 구리나 철 또는 칼슘을 함유하고 있다면 X선에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석 결과 책 표지에서 고농도의 비소 성분이 검출됐다. 만일 연구진이 맨손으로 녹색 페인트를 긁어냈다거나 젖은 채 만졌다면 문제가 됐을 것이다.


■독살에 사용되는 비소, 책에 바른 이유는?

비소는 비상이라고 불리는 독약의 주성분이다. 비소화합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살용으로 흔히 사용됐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 중 하나다. 그 독성은 시간이 지나도 줄지 않는 특징이 있다.
먹는 것 뿐 아니라 호흡하는 것도 위험하다. 비소가 적절한 습도와 빛과 접촉하면 아르신(AsH3)이 형성되는데 아르신은 군사용 독가스로 제조될 정도로 맹독 물질이다.

그런데 이 비소가 19세기에는 널리 사용됐다.
구리를 비소에 녹이면 선명한 녹색이 만들어지는데 '에메랄드 그린', '파리스 그린' 으로 불린 이 인공 색소는 색이 선명하고 색이 잘 바래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때문에 옷감이나 벽지, 그림의 안료, 책 표지 등에 유행처럼 쓰였다.(물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공기 중에 흘러나온 비소화합물, 아르신에 중독돼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간 것이다)
다행히 19세기 후반부터는 비소 물질의 독성 효과가 잘 알려지면서 살충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덴마크 남부대학교에서 발견된 책 세 권에 왜 고농도 비소물질이 묻어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소설처럼 음모를 위한 것이었는지, 책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것이었는지, 다양한 가정이 존재한다. 연구진들은 곤충이나 해충으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녹색 안료를 사용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가정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현재 덴마크 남부대학교 도서관은 '독 묻은 책 3권'을 판지 상자에 넣어 통풍이 잘 되는 캐비닛에 보관하고 있다. 앞으로 사서나 독자들이 이 책을 접촉하지 않도록 디지털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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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돋보기] 소설 ‘장미의 이름’이 현실로? 유럽서 ‘맹독’ 바른 古書 발견
    • 입력 2018-07-24 20:30:21
    • 수정2018-07-25 10: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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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독살의 도구는 '책'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 수사들이 잇따라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시신의 혀와 손가락 끝이 까맣게 변색됐다는 점이 특이점이다.

살인 사건이었다. 독살의 도구는 '책'이었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위험한' 책(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권)을 읽지 못하도록 책에 독을 묻혀 놨던 것이다.
잘 떨어지지 않는 책장을 침을 발라 넘기며 금서(禁書) 읽기에 몰두했던 수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온 몸에 독이 퍼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이다. 책에 독을 묻힌다는 이 기발한 설정은, 두꺼운 추리소설 후반부에 밝혀지는 충격적인 반전이다.

그런데 실제로 독을 묻힌 고서(古書)가 유럽에서 발견돼 화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들도 이 소식을 전하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떠오른다고 했다.

덴마크 한 대학에서 발견된 독 묻은 古書

연구진이 발견된 고서를 들고 있다/ 출처:유럽방송연맹(EBU)화면 캡처
덴마크 오덴세에 있는 덴마크 남부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고문서 연구진들은 최근 이 대학의 한 건물 지하실에 보관된 수백년 전 고서(古書) 4만권 가운데 희귀서적 3권을 우연히 발견했다.

"Anglica Historia"(1570년), "Historia boiemica:Æneas Sylvius"(1575년), "Vitæ Patrum Das ist"(1604년)이었다. 이 세 권은 16세기와 17세기에 만들어진 역사 서적이었는데 표지로 고대 로마법 혹은 교회법과 관련된 중세시대 필사본이 사용됐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있었다(16세기~17세기 유럽 서적상들은 새 책을 제본하기 위해 오래된 양피지를 재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표지에 발린 녹색 염료가 문제였다. 표지에 적힌 라틴어 원문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녹색 염료가 두껍게 발려 있었던 것이다.

중세시대 양피지에 적힌 글자 판독을 위해 연구진은 마이크로 X선 형광분석(XRF)을 실시했다. 혹시 표지에 쓰인 잉크가 구리나 철 또는 칼슘을 함유하고 있다면 X선에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석 결과 책 표지에서 고농도의 비소 성분이 검출됐다. 만일 연구진이 맨손으로 녹색 페인트를 긁어냈다거나 젖은 채 만졌다면 문제가 됐을 것이다.


■독살에 사용되는 비소, 책에 바른 이유는?

비소는 비상이라고 불리는 독약의 주성분이다. 비소화합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살용으로 흔히 사용됐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 중 하나다. 그 독성은 시간이 지나도 줄지 않는 특징이 있다.
먹는 것 뿐 아니라 호흡하는 것도 위험하다. 비소가 적절한 습도와 빛과 접촉하면 아르신(AsH3)이 형성되는데 아르신은 군사용 독가스로 제조될 정도로 맹독 물질이다.

그런데 이 비소가 19세기에는 널리 사용됐다.
구리를 비소에 녹이면 선명한 녹색이 만들어지는데 '에메랄드 그린', '파리스 그린' 으로 불린 이 인공 색소는 색이 선명하고 색이 잘 바래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때문에 옷감이나 벽지, 그림의 안료, 책 표지 등에 유행처럼 쓰였다.(물론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공기 중에 흘러나온 비소화합물, 아르신에 중독돼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간 것이다)
다행히 19세기 후반부터는 비소 물질의 독성 효과가 잘 알려지면서 살충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덴마크 남부대학교에서 발견된 책 세 권에 왜 고농도 비소물질이 묻어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소설처럼 음모를 위한 것이었는지, 책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것이었는지, 다양한 가정이 존재한다. 연구진들은 곤충이나 해충으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녹색 안료를 사용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가정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현재 덴마크 남부대학교 도서관은 '독 묻은 책 3권'을 판지 상자에 넣어 통풍이 잘 되는 캐비닛에 보관하고 있다. 앞으로 사서나 독자들이 이 책을 접촉하지 않도록 디지털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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