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8%의 쓰임새…빈곤층 두 번 울리는 ‘에너지바우처’

입력 2018.08.0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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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낮 기온은 38도에 육박했습니다. 서울 영등포 쪽방촌에 도착했을 때, 아스팔트의 후끈한 열기가 더해져 숨이 턱 막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 위에 종이박스 하나를 깔고 누워있었습니다. 너도나도 상의를 벗은 채였습니다. 방 안이 더 더워 밖으로 나왔다는 사람들. 바깥에서 먹고 자고, 집에는 옷만 갈아입으러 들어간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당장 하루를 견디기 위해, 체면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최빈곤층에게 폭염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에너지시민연대가 저소득 빈곤 가구 521곳을 조사했더니 81%가 선풍기 하나로 여름을 나고 있었습니다. 9곳은 선풍기조차 없었고, 27곳은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은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58%가 어지러움·두통을 느꼈고, 구토·호흡곤란·실신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겨울철에 집중됐던 저소득층에 대한 에너지 지원을 여름철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도 이런 지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내년부터 전기, 가스비 등을 절감받을 수 있는 '에너지 바우처'를 여름에도 쓸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없는 혜택이 새로 생겨 반길 법도 한데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정작 우리는 쓰지도 못하는 바우처, 또 남 좋은 일만 시킨다"며 원성을 토해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쪽방촌 거주자들의 말입니다. 실제로 한 노인은 지난해 에너지바우처를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문제일까요? 에너지바우처는 정부가 저소득층에게 발급하는 일종의 '쿠폰'과 같은 것입니다. 취약계층이 전기, 도시가스, 지역난방, 등유, LPG, 연탄 등을 살 수 있습니다. 1인 가구 기준 8만 4천 원 정도가 지원되는데, 기초생활수급자들이 50만 원으로 한 달을 사는 것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정작 상당수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쪽방촌이나 다가구주택, 고시원 등은 개별 가구 고지서가 없습니다. 방값에 전기, 가스비 등이 포함되어 집주인에게 한꺼번에 지불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너지바우처를 사용하려면 전기·가스 고지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바우처를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법이 완전히 막힌 건 아닙니다. 이렇게 개별 고지서가 없을 경우, 직접 한국전력공사나 가스공사에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면 사용 금액을 입급받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환급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배포된 설명서에도 없고, 동사무소도 따로 안내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법을 모르니 실제 이용을 못하는 실정입니다.

실제로 에너지바우처 전체 예산(2016년 기준 487억) 중 단 1.8%, 9억 원만 '환급 방식'으로 집행됐습니다. 고지서를 제출하면 환급받는 방식으로는 63%, 약 300여억 원이 집행됐습니다. 개별 고지서를 받을 수 있는 집, 쉽게 말하면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에너지 복지'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체 예산의 17%, 79억 원은 확보해놓고도 집행되지 못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없는 구조. 정부가 빈곤층에 대한 에너지 지원책을 확대하는 건 의미있는 일이지만, 이 현실을 간과한다면 정작 쓰여야 할 곳에 쓰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연관기사][뉴스9] 저소득층은 있어도 못 쓰는 ‘에너지바우처’…왜?

[사진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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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 1.8%의 쓰임새…빈곤층 두 번 울리는 ‘에너지바우처’
    • 입력 2018-08-04 07:04:11
    취재K
한 낮 기온은 38도에 육박했습니다. 서울 영등포 쪽방촌에 도착했을 때, 아스팔트의 후끈한 열기가 더해져 숨이 턱 막혔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 위에 종이박스 하나를 깔고 누워있었습니다. 너도나도 상의를 벗은 채였습니다. 방 안이 더 더워 밖으로 나왔다는 사람들. 바깥에서 먹고 자고, 집에는 옷만 갈아입으러 들어간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당장 하루를 견디기 위해, 체면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최빈곤층에게 폭염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에너지시민연대가 저소득 빈곤 가구 521곳을 조사했더니 81%가 선풍기 하나로 여름을 나고 있었습니다. 9곳은 선풍기조차 없었고, 27곳은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은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58%가 어지러움·두통을 느꼈고, 구토·호흡곤란·실신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겨울철에 집중됐던 저소득층에 대한 에너지 지원을 여름철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도 이런 지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내년부터 전기, 가스비 등을 절감받을 수 있는 '에너지 바우처'를 여름에도 쓸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없는 혜택이 새로 생겨 반길 법도 한데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정작 우리는 쓰지도 못하는 바우처, 또 남 좋은 일만 시킨다"며 원성을 토해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쪽방촌 거주자들의 말입니다. 실제로 한 노인은 지난해 에너지바우처를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문제일까요? 에너지바우처는 정부가 저소득층에게 발급하는 일종의 '쿠폰'과 같은 것입니다. 취약계층이 전기, 도시가스, 지역난방, 등유, LPG, 연탄 등을 살 수 있습니다. 1인 가구 기준 8만 4천 원 정도가 지원되는데, 기초생활수급자들이 50만 원으로 한 달을 사는 것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러나 정작 상당수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쪽방촌이나 다가구주택, 고시원 등은 개별 가구 고지서가 없습니다. 방값에 전기, 가스비 등이 포함되어 집주인에게 한꺼번에 지불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너지바우처를 사용하려면 전기·가스 고지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바우처를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법이 완전히 막힌 건 아닙니다. 이렇게 개별 고지서가 없을 경우, 직접 한국전력공사나 가스공사에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면 사용 금액을 입급받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환급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배포된 설명서에도 없고, 동사무소도 따로 안내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법을 모르니 실제 이용을 못하는 실정입니다.

실제로 에너지바우처 전체 예산(2016년 기준 487억) 중 단 1.8%, 9억 원만 '환급 방식'으로 집행됐습니다. 고지서를 제출하면 환급받는 방식으로는 63%, 약 300여억 원이 집행됐습니다. 개별 고지서를 받을 수 있는 집, 쉽게 말하면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에너지 복지'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체 예산의 17%, 79억 원은 확보해놓고도 집행되지 못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없는 구조. 정부가 빈곤층에 대한 에너지 지원책을 확대하는 건 의미있는 일이지만, 이 현실을 간과한다면 정작 쓰여야 할 곳에 쓰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연관기사][뉴스9] 저소득층은 있어도 못 쓰는 ‘에너지바우처’…왜?

[사진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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