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핵무기 반대’…‘핵무기 금지조약’도 반대

입력 2018.08.0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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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8월이 되면, 일본 열도는 반핵과 평화의 목소리로 가득 찬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은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을 처음으로 실전 사용했다. 사흘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두 도시는 폐허가 됐고, 엄청난 인명이 살상됐다. 후유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두 도시는 일본에서 반핵‧평화 운동의 상징이 됐다.

히로시마 피폭 73주년…핵 없는 세상을 호소했지만

지난 8월 6일, 원폭 투하 73주년을 맞은 히로시마 시 평화공원에서 연례 평화 기념식이 열렸다. 아베 일본 총리와 80여 개국 대표, 국내외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일반 시민 등 5만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원폭이 투하된 시각인 아침 8시 15분에 맞춰 일제히 묵도를 올리면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염원했다.


평화 기념식 행사장에서 히로시마 시장과 아베 총리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연출됐다. 마쓰이 가즈미 히로시마 시장은‘평화선언’을 통해 “국제 사회가 핵무기 없는 세계의 실현을 위한 대화와 협력을 추진하도록 일본 정부의 역할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핵무기 금지 조약 가입을 거부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메시지였다.

아베 총리는 “핵 군축의 진행 방식에 대해 각국의 생각 차이가 표면화되고 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핵국가 양측의 협력을 얻는 것이 필요한데, 일본은 비핵 3원칙을 견지하면서 양측을 중개하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가, 국제사회의 대응을 주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비핵3원칙은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만들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역대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원칙을 거론했다.

“유일한 피폭국가로서 핵무기 금지조약 가입해야”

아베 총리는 행사 이후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해 유엔이 채택한 핵무기 금지조약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핵무기 금지조약이 지향하는 핵 폐기 목표를 일본도 공유하고 있지만, 일본의 생각과 접근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통해 핵군축의 분위기를 북돋는 역할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일본 정부와는 달리, 야당과 지자체 등에서는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로서 핵무기 금지조약에 가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에다노 대표는 “73년 전 핵무기 희생자와 피폭자 등을 생각해 하루 빨리 핵무기를 폐기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핵보유국들이 핵무기 금지조약에 가입하도록 일본 정부가 유일한 피폭국가로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러한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원폭 피폭자 단체 7곳의 대표들은 평화 기념식 직후 아베 총리와 만나, 일본도 핵무기 금지조약에 서명하고 이를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북미회담이 열리는 등 세계가 핵무기 폐기를 위한 전환점에 와 있다면서, 세계 유일의 전쟁 피폭국가로서 일본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 모두가 참여하는 형태로 국제사회에 접근할 생각”이라는 답변을 되풀이 했다. 피폭자 단체 대표들은 면담이 끝난 뒤, “총리가 말로는 핵무기 금지조약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아사히신문 분석에 따르면, 일본 지방의회의 20% 가량에서 핵무기 금지조약 서명 및 비준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갈수록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핵보유국의 외면으로 ‘금지조약’ 무력화?

유엔의 핵무기 금지조약은 지난해 7월 유엔 가맹국 193개국 중 122개 나라의 찬성으로 채택됐다. 오스트리아, 브라질 등이 주도했다. 기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대체하자는 취지였다. 50개국 이상이 비준하면 발효되는데, 최근까지 10여개 국가가 비준을 마쳤다. 문제는 핵무기 보유국이 이를 노골적으로 기피한다는 점이다.


NPT가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핵 군축’을 지향했다면, 핵 금지조약은 핵 개발 및 실험, 비축 등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 사실상 핵무기를 가졌거나 핵무장이 가능한 국가들을 겨냥한 것이다.

결국 유엔 회원국의 ⅓가량이 표결에 불참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공식 핵보유국은 물론,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 사실상의 핵보유국도 불참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가맹국과 일본도 불참했다. 핵개발에 골몰해온 북한은 당연히 불참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 등을 이유로 들었고, 일본은 핵보유국과 비보유국 사이의 의견 차이 등을 이유로 들었다.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는 한국도 표결에 불참했다.

비핵 3원칙과 핵 금지협정의 ‘딜레마’

1967년 12월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국회에서 비핵 3원칙을 선포한 이후, 이는 사실상 일본 정부의 국시가 됐다. 1971년 11월 중의원은 비핵 3원칙 준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듬해 미국은 오키나와를 반환했다. 사토 전 총리는 나중에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폭 피폭국가라는 사실, 그리고 비핵 3원칙을 내세워 국제사회에서 비핵화 의제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미국 핵잠수함이 일본에 기항하는 문제 등으로 ‘핵무기를 반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또 원자력 발전소의 핵연료를 재활용하겠다면서 핵무기 6천 개 분량의 플루토늄을 비축했다. 이미 언제든 핵무장이 가능한 상황에서 비핵화 정책의 진정성이 끊임없이 의심받는 이유이다.

히로시마 피폭일인 8월 6일 프랑스 파리와 캐나다 토론토 등에서는 피폭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핵무기 금지조약 조기발효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파리 집회는 핵무기 금지조약 채택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국제 비정부기구 ‘ICAN(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이 주최했다. 핵 폐기에 대한 목소리는 높아가고 있지만, 핵보유국들은 요지부동이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례 보고서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 9개 나라를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분류했다. 이들 국가의 핵탄두 수는 올해 기준 만4천 개 수준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핵탄두가 절대 다수이다. 물론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아직 이행되지도 검증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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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핵무기 반대’…‘핵무기 금지조약’도 반대
    • 입력 2018-08-08 19:30:23
    특파원 리포트
해마다 8월이 되면, 일본 열도는 반핵과 평화의 목소리로 가득 찬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은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을 처음으로 실전 사용했다. 사흘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두 도시는 폐허가 됐고, 엄청난 인명이 살상됐다. 후유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두 도시는 일본에서 반핵‧평화 운동의 상징이 됐다.

히로시마 피폭 73주년…핵 없는 세상을 호소했지만

지난 8월 6일, 원폭 투하 73주년을 맞은 히로시마 시 평화공원에서 연례 평화 기념식이 열렸다. 아베 일본 총리와 80여 개국 대표, 국내외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일반 시민 등 5만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원폭이 투하된 시각인 아침 8시 15분에 맞춰 일제히 묵도를 올리면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염원했다.


평화 기념식 행사장에서 히로시마 시장과 아베 총리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연출됐다. 마쓰이 가즈미 히로시마 시장은‘평화선언’을 통해 “국제 사회가 핵무기 없는 세계의 실현을 위한 대화와 협력을 추진하도록 일본 정부의 역할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핵무기 금지 조약 가입을 거부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메시지였다.

아베 총리는 “핵 군축의 진행 방식에 대해 각국의 생각 차이가 표면화되고 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핵국가 양측의 협력을 얻는 것이 필요한데, 일본은 비핵 3원칙을 견지하면서 양측을 중개하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가, 국제사회의 대응을 주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비핵3원칙은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만들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역대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원칙을 거론했다.

“유일한 피폭국가로서 핵무기 금지조약 가입해야”

아베 총리는 행사 이후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해 유엔이 채택한 핵무기 금지조약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핵무기 금지조약이 지향하는 핵 폐기 목표를 일본도 공유하고 있지만, 일본의 생각과 접근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통해 핵군축의 분위기를 북돋는 역할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일본 정부와는 달리, 야당과 지자체 등에서는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가로서 핵무기 금지조약에 가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에다노 대표는 “73년 전 핵무기 희생자와 피폭자 등을 생각해 하루 빨리 핵무기를 폐기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핵보유국들이 핵무기 금지조약에 가입하도록 일본 정부가 유일한 피폭국가로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러한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원폭 피폭자 단체 7곳의 대표들은 평화 기념식 직후 아베 총리와 만나, 일본도 핵무기 금지조약에 서명하고 이를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북미회담이 열리는 등 세계가 핵무기 폐기를 위한 전환점에 와 있다면서, 세계 유일의 전쟁 피폭국가로서 일본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 모두가 참여하는 형태로 국제사회에 접근할 생각”이라는 답변을 되풀이 했다. 피폭자 단체 대표들은 면담이 끝난 뒤, “총리가 말로는 핵무기 금지조약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아사히신문 분석에 따르면, 일본 지방의회의 20% 가량에서 핵무기 금지조약 서명 및 비준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채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갈수록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핵보유국의 외면으로 ‘금지조약’ 무력화?

유엔의 핵무기 금지조약은 지난해 7월 유엔 가맹국 193개국 중 122개 나라의 찬성으로 채택됐다. 오스트리아, 브라질 등이 주도했다. 기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대체하자는 취지였다. 50개국 이상이 비준하면 발효되는데, 최근까지 10여개 국가가 비준을 마쳤다. 문제는 핵무기 보유국이 이를 노골적으로 기피한다는 점이다.


NPT가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핵 군축’을 지향했다면, 핵 금지조약은 핵 개발 및 실험, 비축 등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 사실상 핵무기를 가졌거나 핵무장이 가능한 국가들을 겨냥한 것이다.

결국 유엔 회원국의 ⅓가량이 표결에 불참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공식 핵보유국은 물론,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 사실상의 핵보유국도 불참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가맹국과 일본도 불참했다. 핵개발에 골몰해온 북한은 당연히 불참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 등을 이유로 들었고, 일본은 핵보유국과 비보유국 사이의 의견 차이 등을 이유로 들었다.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는 한국도 표결에 불참했다.

비핵 3원칙과 핵 금지협정의 ‘딜레마’

1967년 12월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국회에서 비핵 3원칙을 선포한 이후, 이는 사실상 일본 정부의 국시가 됐다. 1971년 11월 중의원은 비핵 3원칙 준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듬해 미국은 오키나와를 반환했다. 사토 전 총리는 나중에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폭 피폭국가라는 사실, 그리고 비핵 3원칙을 내세워 국제사회에서 비핵화 의제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미국 핵잠수함이 일본에 기항하는 문제 등으로 ‘핵무기를 반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또 원자력 발전소의 핵연료를 재활용하겠다면서 핵무기 6천 개 분량의 플루토늄을 비축했다. 이미 언제든 핵무장이 가능한 상황에서 비핵화 정책의 진정성이 끊임없이 의심받는 이유이다.

히로시마 피폭일인 8월 6일 프랑스 파리와 캐나다 토론토 등에서는 피폭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핵무기 금지조약 조기발효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파리 집회는 핵무기 금지조약 채택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국제 비정부기구 ‘ICAN(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이 주최했다. 핵 폐기에 대한 목소리는 높아가고 있지만, 핵보유국들은 요지부동이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례 보고서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 9개 나라를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분류했다. 이들 국가의 핵탄두 수는 올해 기준 만4천 개 수준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핵탄두가 절대 다수이다. 물론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아직 이행되지도 검증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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