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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명장모와 김만두, 오키나와 묘표 속 조선인 추적기
입력 2018.08.15 (19:26) 수정 2018.08.15 (21:53) 취재후
1945년 5월 28일 미국 ‘LIFE’지 수록 사진1945년 5월 28일 미국 ‘LIFE’지 수록 사진

사진만 남은 묘표, "일본인 이름이 아닌데?"

1945년 5월 28일, 태평양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 이날 발행된 미국 잡지에 오키나와의 한 마을 사진이 실렸습니다. '매우 좋은 곳(a very pleasant place)'이라는 제목과는 정반대의 사진입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미군 옆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있는 묘표 14개가 보입니다. 이중 일본에서는 잘 쓰지 않는, 어색한 이름이 보입니다.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오키나와로 강제 동원된 조선 사람은 아닐까?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입니다.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지상전까지 벌어지면서, 막대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양측 군인과 민간인까지 모두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인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군인, 군속(군무원)으로 동원된 조선인만 최소 3천 5백 명 이상 (만여 명이라고 적힌 기록도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적어도 약 700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됐습니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유해가 발굴돼 반환된 경우는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에서 확인된 단서는 소중했습니다. 만약 이 묘표 아래에 조선인 유골이 묻혀있다면, 유족의 DNA와 대조해 고국으로 모셔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류큐신보’ 2017년 6월 19일자‘류큐신보’ 2017년 6월 19일자

'명촌장모'와 '금산만두'를 찾아서

취재진은 오키나와로 향했습니다. 70여 년 전 찍힌 이 사진을 다시 주목한 건, 오키나와 지역 일간지 <류큐신보>입니다. 지난해 6월, 오키나와로 끌려온 조선인들의 전쟁 체험을 취재하던 기자가 한 연구자의 집에서 이 사진을 보게 된 겁니다. 오키나와 지역의 과거 사진을 모아둔 책에 이 사진이 실려있었습니다.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두 이름은 일본인이 보기에도 어색했습니다. 조선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취재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최근 몇 년 간 오키나와에서 전쟁 중 숨진 사람들의 '유골'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조선인 유해가 발굴됐다는 소식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속 풍경을 쫓아 매장 추정지로 보이는 장소를 찾아냈지만, 유골이 그 아래 묻혀있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류큐신보>의 오나하 야스타케 사회부장은 "유골이 묘표 아래에 잠들어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모셔두었는지 확실치 않다"면서,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이 지나면서 잊혀버린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동네 할아버지들의 기억

묘표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마을은 오키나와 북부의 모토부정 겐켄. 지금 사진 속 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주차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묘표도 더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차장 건너편 집에 사는 나카무라 히데오(89) 씨를 찾았습니다. 3살부터 이 동네에 살았다는 나카무라 씨. 1945년 전쟁 때 상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월쯤,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배가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이후 바다에서 시신을 건져냈다고 합니다. 지금은 해초 가공소로 바뀐 자리에서 일본군들이 시신을 모아 태웠고, 나중에 주민들이 유골을 모아 지금 사진 속 묘표가 있던 자리 즈음에 묻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묻은 사람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는 몰랐습니다. 나카무라 씨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가는 바람에, 묘표는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도모리 데츠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도모리 데츠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묘표 추정 장소로부터 5km 정도 떨어진 도구치 항에서는 어릴적 조선인 군무원을 봤다는 주민을 만났습니다. 도모리 데츠오(85) 씨. 도모리 씨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마을 길을 오가면서 조선 사람들 수십 명이 거리에 쭉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고 합니다. 일본어도 잘 못 하고, 먹을 것이 없어 지쳐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조선인들을 발로 걷어차는 일본군 병사의 모습까지도 기억합니다. 하루는 배 위에서 조선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매질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다로 떨어져 오키나와 어부가 구해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남은 두 사람 "일본군 배에서 폭격으로 사망"

일본식 이름으로 바꿀 때, 성 바로 뒤에 한자 하나를 더 붙였기 때문에 명촌장모와 금산만두가 조선인이 맞다면, 한국식 이름은 명장모와 김만두일 겁니다.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취재진이 먼저 찾아간 건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해온 오키모토 후키코 씨입니다. 최근, 오키나와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 군속(군무원)을 연구한 논문을 두 편이나 낸 전문가입니다.

강제동원 조선인 명부를 집대성했다는 <전시 조선인 강제노동 조사자료집>, 일명 '다케우치 명부'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명촌장모는 한국식 이름인 명장모가 함께 표기돼 있습니다. 해군 소속으로, '히코산마루'라는 배에서 일했습니다. 사망 날짜는 1945년 1월 22일, 공폭(공중폭격)으로 숨졌다고 적혀있습니다. 금산만두는 육군 소속으로 돼 있는데, 역시 '히코산마루'라는 배에 있다 명장모 씨와 같은 날(45년 1월 22일), 같은 이유(공폭)로 숨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히코산마루'라는 배에 대한 기록은 일본군이 작성한 <혼성 제 44여단 남서 공습전투 상보>에 남아있습니다.
1945년 1월 22일, 아침 7시에 공습경보가 발령되면서 적기 4기가 습격해 히코산마루 상공을 선회, 곧이어 전투기가 급강하해 아주 낮게 비행하며 총격을 가하는 동시에 … 교대 시간이라서 병사 대부분은 갑판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적기의 공습을 알고 선박 내로 대피했지만 … 본 전투에서 전사자 2명, 중경상자 8명을 확인하고, 27명은 생사를 확인할 수 없어 …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1945년 1월 22일, 히코산마루는 미군 공격으로 침몰했고 그 배에는 명촌장모(명장모)와 금산만두라는 두 조선인 군속(군무원)이 타고 있었습니다. 묘표 사진 속 마을 주민들은 그 즈음, 바다에서 시신을 건져내 태워 묻은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장모 씨 조카 성훈 씨명장모 씨 조카 성훈 씨

한국에서 유족을 찾다

두 사람의 유족을 찾아, 남은 조각을 맞춰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 <피징용자사망자연명부>, <구일본해군군속신상조사표>, <구일본육해군징용선사망자명부>)에서도 '금산만두(김만두)'와 '명촌장모(명장모)'가 확인됐습니다. 이들 중 1945년 오키나와 또는 일본 남쪽 바다에서 사망한 사람의 가족을 추적했습니다. 남은 사람은 둘의 조카들뿐입니다.

명장모 씨의 조카, 명성훈 씨는 전남 광양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명장모라는 이름만 기억할 뿐, 삼촌에 대한 기억은 적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뜬 아버지로부터 "명장모라는 동생이 있었고, 배를 타고 가버렸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입니다. 그 삼촌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죽었다는 소식은 취재진을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삼촌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는 김창기 씨는 지금이라도 삼촌의 유골을 아버지 묘소에 함께 묻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김만두 씨 조카 창기 씨김만두 씨 조카 창기 씨

김만두 씨 조카는 경남 통영에서 만났습니다. 김창기 씨 부부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고 합니다. 김창기 씨는 "아버지와 만두 삼촌이 같이 일본에 잡혀갔다가 아버지만 돌아왔다"며, "아버지가 술 한 잔 드시거나 일본말이 들리면 만두 삼촌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삼촌이 일본에 묻혀있을 수 있다는 건 지난해에야 알게 됐지만,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김창기 씨 역시 비용과 절차를 생각하면 그저 까마득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무덤' 오키나와…돌아온 유해는 없다

명장모와 김만두 씨처럼 매장지와 유족이 특정되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취재진은 오키나와 곳곳에서 조선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지역도 확인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오키나와 전쟁 최후의 격전지라는 남부 야마시로 지역입니다. 일본군이 작성한 <제62사단 치중대 전투 경과의 개요>를 보면, 1945년 6월, 미군은 산에 숨어든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기름을 뿌리고 화염방사기로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설수상근무대' 102중대가 주둔했다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당시 농사를 시작하는데, 땅에서 유골이 쏟아져나와 3만 5천여 구를 한 번에 묻었다는 혼백의 탑만 남았습니다. 아마 탑 아래에 조선인 유골도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돼있다는 오키나와 포로수용소 기록 사본에서도 사망자 명단이 확인됩니다. 여러 일본인 이름 가운데 '서이만', '박희규', '장승필' 등 한국인 이름으로 추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 역시 어디에 묻혔는지 현재로선 알지 못합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아직도 유해 발굴과 DNA 대조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발굴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유해 발굴 작업 중인 '가마후야(동굴 파는 사람이라는 뜻)'의 구지켄 다카마츠 씨는 "지금 오키나와 현에 임시 보관된 유골만 600기 정도인데, 대부분 DNA 대조 작업을 못 한 상태"라며, "지금까지 발견된 유골 중에서 조선인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독립한 지 70년이 넘도록, 조선인 유골은 왜 그 섬에 묻혀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이제는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도, 유족도 모두 고령이 됐습니다. 서두를 때입니다.

자료제공 및 감수: 오키모토 후키코, 강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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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5 (19:26)
    • 수정 2018.08.15 (21:53)
    취재후
1945년 5월 28일 미국 ‘LIFE’지 수록 사진1945년 5월 28일 미국 ‘LIFE’지 수록 사진

사진만 남은 묘표, "일본인 이름이 아닌데?"

1945년 5월 28일, 태평양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 이날 발행된 미국 잡지에 오키나와의 한 마을 사진이 실렸습니다. '매우 좋은 곳(a very pleasant place)'이라는 제목과는 정반대의 사진입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미군 옆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있는 묘표 14개가 보입니다. 이중 일본에서는 잘 쓰지 않는, 어색한 이름이 보입니다.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오키나와로 강제 동원된 조선 사람은 아닐까?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입니다. 패망을 앞둔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지상전까지 벌어지면서, 막대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양측 군인과 민간인까지 모두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인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군인, 군속(군무원)으로 동원된 조선인만 최소 3천 5백 명 이상 (만여 명이라고 적힌 기록도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적어도 약 700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됐습니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유해가 발굴돼 반환된 경우는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에서 확인된 단서는 소중했습니다. 만약 이 묘표 아래에 조선인 유골이 묻혀있다면, 유족의 DNA와 대조해 고국으로 모셔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류큐신보’ 2017년 6월 19일자‘류큐신보’ 2017년 6월 19일자

'명촌장모'와 '금산만두'를 찾아서

취재진은 오키나와로 향했습니다. 70여 년 전 찍힌 이 사진을 다시 주목한 건, 오키나와 지역 일간지 <류큐신보>입니다. 지난해 6월, 오키나와로 끌려온 조선인들의 전쟁 체험을 취재하던 기자가 한 연구자의 집에서 이 사진을 보게 된 겁니다. 오키나와 지역의 과거 사진을 모아둔 책에 이 사진이 실려있었습니다.

명촌장모와 금산만두, 두 이름은 일본인이 보기에도 어색했습니다. 조선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취재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최근 몇 년 간 오키나와에서 전쟁 중 숨진 사람들의 '유골'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조선인 유해가 발굴됐다는 소식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속 풍경을 쫓아 매장 추정지로 보이는 장소를 찾아냈지만, 유골이 그 아래 묻혀있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류큐신보>의 오나하 야스타케 사회부장은 "유골이 묘표 아래에 잠들어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모셔두었는지 확실치 않다"면서,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이 지나면서 잊혀버린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나카무라 히데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동네 할아버지들의 기억

묘표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마을은 오키나와 북부의 모토부정 겐켄. 지금 사진 속 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주차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묘표도 더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차장 건너편 집에 사는 나카무라 히데오(89) 씨를 찾았습니다. 3살부터 이 동네에 살았다는 나카무라 씨. 1945년 전쟁 때 상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월쯤,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배가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이후 바다에서 시신을 건져냈다고 합니다. 지금은 해초 가공소로 바뀐 자리에서 일본군들이 시신을 모아 태웠고, 나중에 주민들이 유골을 모아 지금 사진 속 묘표가 있던 자리 즈음에 묻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묻은 사람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는 몰랐습니다. 나카무라 씨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가는 바람에, 묘표는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도모리 데츠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도모리 데츠오/오키나와 모토부 주민

묘표 추정 장소로부터 5km 정도 떨어진 도구치 항에서는 어릴적 조선인 군무원을 봤다는 주민을 만났습니다. 도모리 데츠오(85) 씨. 도모리 씨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마을 길을 오가면서 조선 사람들 수십 명이 거리에 쭉 쓰러져 누워있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고 합니다. 일본어도 잘 못 하고, 먹을 것이 없어 지쳐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조선인들을 발로 걷어차는 일본군 병사의 모습까지도 기억합니다. 하루는 배 위에서 조선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매질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다로 떨어져 오키나와 어부가 구해준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남은 두 사람 "일본군 배에서 폭격으로 사망"

일본식 이름으로 바꿀 때, 성 바로 뒤에 한자 하나를 더 붙였기 때문에 명촌장모와 금산만두가 조선인이 맞다면, 한국식 이름은 명장모와 김만두일 겁니다.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취재진이 먼저 찾아간 건 오키나와 전쟁을 연구해온 오키모토 후키코 씨입니다. 최근, 오키나와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 군속(군무원)을 연구한 논문을 두 편이나 낸 전문가입니다.

강제동원 조선인 명부를 집대성했다는 <전시 조선인 강제노동 조사자료집>, 일명 '다케우치 명부'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명촌장모는 한국식 이름인 명장모가 함께 표기돼 있습니다. 해군 소속으로, '히코산마루'라는 배에서 일했습니다. 사망 날짜는 1945년 1월 22일, 공폭(공중폭격)으로 숨졌다고 적혀있습니다. 금산만두는 육군 소속으로 돼 있는데, 역시 '히코산마루'라는 배에 있다 명장모 씨와 같은 날(45년 1월 22일), 같은 이유(공폭)로 숨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히코산마루'라는 배에 대한 기록은 일본군이 작성한 <혼성 제 44여단 남서 공습전투 상보>에 남아있습니다.
1945년 1월 22일, 아침 7시에 공습경보가 발령되면서 적기 4기가 습격해 히코산마루 상공을 선회, 곧이어 전투기가 급강하해 아주 낮게 비행하며 총격을 가하는 동시에 … 교대 시간이라서 병사 대부분은 갑판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적기의 공습을 알고 선박 내로 대피했지만 … 본 전투에서 전사자 2명, 중경상자 8명을 확인하고, 27명은 생사를 확인할 수 없어 …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1945년 1월 22일, 히코산마루는 미군 공격으로 침몰했고 그 배에는 명촌장모(명장모)와 금산만두라는 두 조선인 군속(군무원)이 타고 있었습니다. 묘표 사진 속 마을 주민들은 그 즈음, 바다에서 시신을 건져내 태워 묻은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장모 씨 조카 성훈 씨명장모 씨 조카 성훈 씨

한국에서 유족을 찾다

두 사람의 유족을 찾아, 남은 조각을 맞춰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 <피징용자사망자연명부>, <구일본해군군속신상조사표>, <구일본육해군징용선사망자명부>)에서도 '금산만두(김만두)'와 '명촌장모(명장모)'가 확인됐습니다. 이들 중 1945년 오키나와 또는 일본 남쪽 바다에서 사망한 사람의 가족을 추적했습니다. 남은 사람은 둘의 조카들뿐입니다.

명장모 씨의 조카, 명성훈 씨는 전남 광양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명장모라는 이름만 기억할 뿐, 삼촌에 대한 기억은 적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뜬 아버지로부터 "명장모라는 동생이 있었고, 배를 타고 가버렸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입니다. 그 삼촌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죽었다는 소식은 취재진을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삼촌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 온다는 김창기 씨는 지금이라도 삼촌의 유골을 아버지 묘소에 함께 묻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김만두 씨 조카 창기 씨김만두 씨 조카 창기 씨

김만두 씨 조카는 경남 통영에서 만났습니다. 김창기 씨 부부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고 합니다. 김창기 씨는 "아버지와 만두 삼촌이 같이 일본에 잡혀갔다가 아버지만 돌아왔다"며, "아버지가 술 한 잔 드시거나 일본말이 들리면 만두 삼촌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삼촌이 일본에 묻혀있을 수 있다는 건 지난해에야 알게 됐지만,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김창기 씨 역시 비용과 절차를 생각하면 그저 까마득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무덤' 오키나와…돌아온 유해는 없다

명장모와 김만두 씨처럼 매장지와 유족이 특정되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취재진은 오키나와 곳곳에서 조선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지역도 확인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오키나와 전쟁 최후의 격전지라는 남부 야마시로 지역입니다. 일본군이 작성한 <제62사단 치중대 전투 경과의 개요>를 보면, 1945년 6월, 미군은 산에 숨어든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기름을 뿌리고 화염방사기로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설수상근무대' 102중대가 주둔했다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당시 농사를 시작하는데, 땅에서 유골이 쏟아져나와 3만 5천여 구를 한 번에 묻었다는 혼백의 탑만 남았습니다. 아마 탑 아래에 조선인 유골도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돼있다는 오키나와 포로수용소 기록 사본에서도 사망자 명단이 확인됩니다. 여러 일본인 이름 가운데 '서이만', '박희규', '장승필' 등 한국인 이름으로 추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 역시 어디에 묻혔는지 현재로선 알지 못합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아직도 유해 발굴과 DNA 대조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발굴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유해 발굴 작업 중인 '가마후야(동굴 파는 사람이라는 뜻)'의 구지켄 다카마츠 씨는 "지금 오키나와 현에 임시 보관된 유골만 600기 정도인데, 대부분 DNA 대조 작업을 못 한 상태"라며, "지금까지 발견된 유골 중에서 조선인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독립한 지 70년이 넘도록, 조선인 유골은 왜 그 섬에 묻혀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이제는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도, 유족도 모두 고령이 됐습니다. 서두를 때입니다.

자료제공 및 감수: 오키모토 후키코, 강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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