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북한의 진짜 표정을 읽는다…팔과 다리의 가격

입력 2018.08.16 (07:0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탈북자 이야기, 식상하다고?

북한 이탈 주민의 수기나 고생담을 다룬 책은 수없이 많았다. 두만강을 건너고 철조망을 뛰어 넘는 엇비슷한 이야기 끝엔 흔한 주장이 붙곤 했다.

'김 씨 일가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 개발에 쓰이는 대북 지원을 끊자' 같은. 이런 주장이 반드시 틀렸다고만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진영 논리에 빠지는 탓에 이야기가 갈피를 잃기도 했다.

그러므로 탈북자를 소재로 삼은 작가는 불리한 처지에서 글을 시작하게 된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어오는 요즘같은 시기에는 어느 편에 서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소설가 장강명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독자들이 그저 눈을 감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잘못 없이 굶어 죽은 비극에 대해 더 슬퍼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그게 누구의 책임이었는지 아는 것은 뒤로 미뤄도 된다. 비난의 대상을 찾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먼 미래로 연기하거나, 아예 하지 않아도 되고」9쪽.

식량 배급을 받는 북한 주민들식량 배급을 받는 북한 주민들

굶어 죽어가는 마을에서 생기는 일에 대하여

익사(溺死)는 인간이 가진 호흡 능력의 한계를, 낙사(落死)는 신체 골격의 단단한 정도를 시험한다.

아사(餓死)는 어떨까. 인간성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죽음이다. 남을 위해 나의 먹을 것을 내어줄 이웃이 있는 지, 먹을 것을 가진 이웃에게 칼을 들 수 있는 지…

장강명은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일어난 대기근인 '고난의 행군' 시절 한 마을의 풍경 변화를 섬뜩하도록 담담히 전한다.

몇 달째 배급이 끊기고, 젖먹이를 가마솥에 넣고 삶은 어머니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옥수수를 심듯 시신을 땅에 묻는 모습들. 책이 말하는 건 고난의 행군을 극복해 나간 눈물겨운 스토리가 아니다. 그 시대를 감당한 북한 사람들의 표정에 관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금 북한의 그 '표정'을 제대로 읽고 전달할 사람들은 전 세계에 한국인들뿐이다.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짜 표정을 표현할 자유가 없다. 어떤 미묘하고 복잡한 표정은 그 얼굴의 주인이 쓰는 말을 모르면 제대로 읽을 수 없는데, 한국어는 서양인이 배우기에 아주 어려운 언어다. 그러니까 한국어를 밥벌이 수단으로 택한 내게 그만큼 책임이 더 떨어진다고 생각 한다」 121쪽.

지난 1월 미국 의회 국정연설에 참석한 지성호 대표지난 1월 미국 의회 국정연설에 참석한 지성호 대표

"북한 정권의 목격자" 트럼프 소개에 목발로 답례한 탈북자

이야기의 주인공 탈북자 지성호는 198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회 국정 연설에서 그를 직접 소개하면서 지 씨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지 씨는 14살에 옥수수와 맞바꿀 석탄을 훔치다 열차에서 떨어져 팔과 다리를 잃었다. 2006년 북한에서 빠져나와 목발을 짚고 중국의 밤거리와 라오스의 밀림을 헤메다 한국에 닿았다.

포장마차에서 번 돈으로 등록금을 모아 동국대에 입학한 뒤 북한 인권 단체 나우(NAUH)를 만들었다. 국제 사회에 북한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는 그의 단체는 중국에서 감금·폭행당하는 탈북 여성들을 300명 가까이 구조해 내기도 했다.

「청년은 목발을 들고 두만강과 메콩강을 건너고, 포장마차를 끌고, 대학생이 되고, 단체를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폭행당하는 여성들을 구할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려 애쓸 것이었다. 아직 소년은 그걸 몰랐다. 그러나 다리 끝에서부터 가슴으로 어떤 의지가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131쪽.

논픽션을 즐겨 썼던 ‘조지 오웰’이 롤모델이라는 장강명 작가논픽션을 즐겨 썼던 ‘조지 오웰’이 롤모델이라는 장강명 작가

우리의 팔과 다리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쓰이기를

이 책은 장강명의 두 번째 논픽션이다. 문학상과 공채 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친 『당선, 합격, 계급』을 출간한 지 두 달 만이다.

2년 전에는 통일된 한반도 상황을 가정하고 쓴 소설『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쓸 때도 지성호 대표의 도움을 받아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팔과 다리의 가격』의 수익금은 모두 나우에 기부된다고 한다. 그는 왜 북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속적으로 글을 쓰려는 걸까.

장강명은 책에 이렇게 썼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잘려 없어진 한 팔과 한 다리의 가격이 아니라 아직 갖고 있는 한 팔과 다리의 힘에 대한 것입니다."

【팔과 다리의 가격】지은이 장강명, 출판사 아시아, 2018년 7월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여의도 책방] 북한의 진짜 표정을 읽는다…팔과 다리의 가격
    • 입력 2018-08-16 07:01:19
    여의도책방
탈북자 이야기, 식상하다고?

북한 이탈 주민의 수기나 고생담을 다룬 책은 수없이 많았다. 두만강을 건너고 철조망을 뛰어 넘는 엇비슷한 이야기 끝엔 흔한 주장이 붙곤 했다.

'김 씨 일가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핵무기 개발에 쓰이는 대북 지원을 끊자' 같은. 이런 주장이 반드시 틀렸다고만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진영 논리에 빠지는 탓에 이야기가 갈피를 잃기도 했다.

그러므로 탈북자를 소재로 삼은 작가는 불리한 처지에서 글을 시작하게 된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어오는 요즘같은 시기에는 어느 편에 서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다. 소설가 장강명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독자들이 그저 눈을 감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잘못 없이 굶어 죽은 비극에 대해 더 슬퍼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그게 누구의 책임이었는지 아는 것은 뒤로 미뤄도 된다. 비난의 대상을 찾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먼 미래로 연기하거나, 아예 하지 않아도 되고」9쪽.

식량 배급을 받는 북한 주민들
굶어 죽어가는 마을에서 생기는 일에 대하여

익사(溺死)는 인간이 가진 호흡 능력의 한계를, 낙사(落死)는 신체 골격의 단단한 정도를 시험한다.

아사(餓死)는 어떨까. 인간성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죽음이다. 남을 위해 나의 먹을 것을 내어줄 이웃이 있는 지, 먹을 것을 가진 이웃에게 칼을 들 수 있는 지…

장강명은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일어난 대기근인 '고난의 행군' 시절 한 마을의 풍경 변화를 섬뜩하도록 담담히 전한다.

몇 달째 배급이 끊기고, 젖먹이를 가마솥에 넣고 삶은 어머니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옥수수를 심듯 시신을 땅에 묻는 모습들. 책이 말하는 건 고난의 행군을 극복해 나간 눈물겨운 스토리가 아니다. 그 시대를 감당한 북한 사람들의 표정에 관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지금 북한의 그 '표정'을 제대로 읽고 전달할 사람들은 전 세계에 한국인들뿐이다.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짜 표정을 표현할 자유가 없다. 어떤 미묘하고 복잡한 표정은 그 얼굴의 주인이 쓰는 말을 모르면 제대로 읽을 수 없는데, 한국어는 서양인이 배우기에 아주 어려운 언어다. 그러니까 한국어를 밥벌이 수단으로 택한 내게 그만큼 책임이 더 떨어진다고 생각 한다」 121쪽.

지난 1월 미국 의회 국정연설에 참석한 지성호 대표
"북한 정권의 목격자" 트럼프 소개에 목발로 답례한 탈북자

이야기의 주인공 탈북자 지성호는 198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회 국정 연설에서 그를 직접 소개하면서 지 씨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지 씨는 14살에 옥수수와 맞바꿀 석탄을 훔치다 열차에서 떨어져 팔과 다리를 잃었다. 2006년 북한에서 빠져나와 목발을 짚고 중국의 밤거리와 라오스의 밀림을 헤메다 한국에 닿았다.

포장마차에서 번 돈으로 등록금을 모아 동국대에 입학한 뒤 북한 인권 단체 나우(NAUH)를 만들었다. 국제 사회에 북한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는 그의 단체는 중국에서 감금·폭행당하는 탈북 여성들을 300명 가까이 구조해 내기도 했다.

「청년은 목발을 들고 두만강과 메콩강을 건너고, 포장마차를 끌고, 대학생이 되고, 단체를 만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폭행당하는 여성들을 구할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려 애쓸 것이었다. 아직 소년은 그걸 몰랐다. 그러나 다리 끝에서부터 가슴으로 어떤 의지가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131쪽.

논픽션을 즐겨 썼던 ‘조지 오웰’이 롤모델이라는 장강명 작가
우리의 팔과 다리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쓰이기를

이 책은 장강명의 두 번째 논픽션이다. 문학상과 공채 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친 『당선, 합격, 계급』을 출간한 지 두 달 만이다.

2년 전에는 통일된 한반도 상황을 가정하고 쓴 소설『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쓸 때도 지성호 대표의 도움을 받아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을 그렸다.

『팔과 다리의 가격』의 수익금은 모두 나우에 기부된다고 한다. 그는 왜 북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속적으로 글을 쓰려는 걸까.

장강명은 책에 이렇게 썼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잘려 없어진 한 팔과 한 다리의 가격이 아니라 아직 갖고 있는 한 팔과 다리의 힘에 대한 것입니다."

【팔과 다리의 가격】지은이 장강명, 출판사 아시아, 2018년 7월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