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반미’·‘반일’ 외친 지도자 잃은 오키나와…미군 기지 이전은 난제로

입력 2018.08.16 (15:07) 수정 2018.08.3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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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상징 ‘오나가 다케시’ 오키나와 지사가 지나 8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구심점을 잃은 지역사회는 혼돈에 빠졌다. 빈소에는 주민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미군 비행장, 오키나와를 떠나라”

고인은 오키나와 나하에 태어났다. 나하시 의원과 현 의원, 나하 시장을 거쳐, 2014년 현 지사에 당선됐다.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보수·혁신계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원래는 보수 성향이었으나,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의 민간인 자살 강요 사건’을 부정하자, 반정부 성향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텐마 미군 비행장의 헤노코 이전에 반대하며 일본 중앙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나하시 북쪽 후텐마 미군 기지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비행장으로 꼽힌다. 주거지로 둘러싸여 있어, 주민들은 항상 소음과 사고 공포에 시달렸다. 항공기 관련 사고에 미군 범죄까지 잇따르면서 반미정서는 극에 달했다. 1999년, 나고 시의 헤노코 해안을 매립해 기지를 옮긴다는 결정이 나왔다. 그러나 주민들은 미봉책이라며 반발했다. 환경 파괴 우려까지 더해졌다. 오키나와 밖으로 나가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2015년 오나가 지사는 전임 지사가 승인한 헤노코 해안 매립을 직권 취소했다. 2016년 12월 대법원은 매립 승인 취소는 위법이라고 판결했지만, 노나가 지사는 승인 철회 절차를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던 중, 지난 4월 췌장암 진단과 수술을 받았다. 지난달 30일 입원 뒤 일주일여 만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진정한 오키나와 사람”의 죽음…‘비행장 이전’ 난제 그대로

영결식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일을 이틀 앞둔 8월 13일, 고인이 10년 동안 시장을 지낸 ‘나하’ 시에서 엄수됐다. 정부와 정계 인사, 지역 주민 등 약 5천 명의 조문객들이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위패와 영정은 오키나와 현청과 나하 시청을 들러 작별을 고했다. “오나가 지사, 고마워요”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나미네 전 오키나와 지사는 영결식 조사를 통해 “목숨을 건 당신의 행동은 일본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신의 소중한 뜻은 다음 세대에 충실히 전해질 것입니다”라며 애도의 뜻을 밝혔다. 토미카와 오키나와 부지사는 “고인은 오키나와에 대해서만 생각한, 진정한 오키나와 사람이었다. 오키나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정치를 했다.”고 회고했다. 현 의회 니사토 의장은 “어려운 정치 상황 속에서도 주민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고인의 뜻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조문”이라고 강조했다.

고인과 치열하게 맞섰던 일본 정부도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대변인 격인 스가 관방장관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스가 장관은 “후텐마 미군기지의 ‘헤노코’ 이전에 대해 의견이 나눠져 있었지만, 오키나와 진흥대책을 논의해온 것은 특별한 기억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헤노코 이전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일본을 둘러싼 안보 환경이 엄중해지는 가운데 미·일 동맹의 억지력 유지와 후텐마 비행장의 위험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오노데라 방위상은 “현 의원 시절부터 오랫동안 교류했다. 많은 추억이 있었는데 매우 안타깝다”고 밝혔고, 후쿠이 오키나와·북방 담당상도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다. 고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정치권 “애도” 한목소리… “비행장 해법”은 동상이몽

여당 측은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지역 여론의 흐름을 주시하는 분위기이다. 닛카이 자민당 간사장은 “오키나와가 직면한 과제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모습에서 정치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통하는 것을 느꼈다. 전후 일본의 많은 과제를 짊어진 오키나와의 발전을 위해, 주민과 함께 하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시바 전 간사장도 “우리와 입장은 달랐지만, 보수의 생각을 지닌 정치인이었다. 오키나와의 존재 방식을 한마음으로 고민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공동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대표는 “오키나와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적에 감사한다.”면서 “후텐마 기지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헤노코 이전을 위한 협의를 진행해왔다. 미군 기지로 인한 오키나와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야당 측에서는 고인의 뜻을 잇겠다고 천명했다. 나가쓰마 입헌민주당 대표 대행은 “진심으로 애도 드린다. 고인의 뜻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마키 국민민주당 공동대표는 “다른 나라의 군사기지가 자국 내에 있다는 위화감을 끝까지 호소해온 진짜 보수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 오키나와를 위해 결사적으로 투쟁한 신념의 정치인이었다.”며 애도했다.

시이 공산당 위원장은 “불굴의 신념으로 헤노코 기지 이전 반대를 위해 4년 동안 싸워온 데 대해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면서 “보수와 혁신의 울타리를 넘은 공동투쟁이야말로 오키나와의 미래”라고 강조했다. 자유당과 사민당도 “고인의 뜻을 받들어 투쟁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키나와 출신의 유명 가수 ‘아무로 나미에’는 이례적으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추모의 글을 올렸다. 지난 5월 오나가 지사로부터 ‘현민 영예상’을 받은 것을 언급하면서, “오키나와에 헌신한 고인의 뜻이 계승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강제 병합, 휩쓸린 전쟁, 자살 강요… ‘반일감정’ 높은 일본 땅

일본 열도 최남단 류큐제도에 자리 잡은 오키나와 현과 중앙 정부와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독립왕국이었다가 19세기 강제 병합된 뒤, 2차 대전 당시 일본 본토를 지키는 전진기지로 내몰렸다.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약 석 달간의 전투는 일본군의 패전과 집단자살로 막을 내렸다. 미·일 양측의 전사자가 10만∼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오키나와는 전투가 끝난 6월 23일을 희생자 위령의 날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전화에 휩쓸린 오키나와는 폐허가 됐다. 당시 오키나와 민간인 9만여 명, 그리고 강제 징집된 3만 명도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오키나와에서는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자신들처럼 집단 자결할 것을 강요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살 강요’의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버티고 있다. 주민들 사이의 반일 감정은 그만큼 뿌리가 깊다.

일제 패망 이후, 오키나와는 오랜 시간 미국의 지배를 받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됐다. 미군은 떠나지 않았다. 주일 미군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다. 대륙과 해양, 일본 열도의 길목을 지키는 군사적‧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중국 등을 의식해 오키나와의 무장 강화를 서두르고 있다.

오노데라 방위상 “헤노코 이전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매립 예정지에 대한 토사 반입 재개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차기 지사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후임 지사 선거는 다음 달(9월) 13일에 고시돼, 30일 투개표가 이뤄진다.


오나가 지사에 대한 추모 열기가 선거 과정의 중요 변수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선거 결과까지 좌우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미군기지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고, 고인을 대체할 수 있는 지도자도 없어 보인다. 오키나와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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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6 15:07:56
    • 수정2018-08-30 09:24:00
    특파원 리포트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상징 ‘오나가 다케시’ 오키나와 지사가 지나 8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구심점을 잃은 지역사회는 혼돈에 빠졌다. 빈소에는 주민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미군 비행장, 오키나와를 떠나라”

고인은 오키나와 나하에 태어났다. 나하시 의원과 현 의원, 나하 시장을 거쳐, 2014년 현 지사에 당선됐다.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보수·혁신계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원래는 보수 성향이었으나,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의 민간인 자살 강요 사건’을 부정하자, 반정부 성향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후텐마 미군 비행장의 헤노코 이전에 반대하며 일본 중앙정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나하시 북쪽 후텐마 미군 기지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비행장으로 꼽힌다. 주거지로 둘러싸여 있어, 주민들은 항상 소음과 사고 공포에 시달렸다. 항공기 관련 사고에 미군 범죄까지 잇따르면서 반미정서는 극에 달했다. 1999년, 나고 시의 헤노코 해안을 매립해 기지를 옮긴다는 결정이 나왔다. 그러나 주민들은 미봉책이라며 반발했다. 환경 파괴 우려까지 더해졌다. 오키나와 밖으로 나가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2015년 오나가 지사는 전임 지사가 승인한 헤노코 해안 매립을 직권 취소했다. 2016년 12월 대법원은 매립 승인 취소는 위법이라고 판결했지만, 노나가 지사는 승인 철회 절차를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새로운 싸움을 준비하던 중, 지난 4월 췌장암 진단과 수술을 받았다. 지난달 30일 입원 뒤 일주일여 만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진정한 오키나와 사람”의 죽음…‘비행장 이전’ 난제 그대로

영결식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일을 이틀 앞둔 8월 13일, 고인이 10년 동안 시장을 지낸 ‘나하’ 시에서 엄수됐다. 정부와 정계 인사, 지역 주민 등 약 5천 명의 조문객들이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위패와 영정은 오키나와 현청과 나하 시청을 들러 작별을 고했다. “오나가 지사, 고마워요”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나미네 전 오키나와 지사는 영결식 조사를 통해 “목숨을 건 당신의 행동은 일본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신의 소중한 뜻은 다음 세대에 충실히 전해질 것입니다”라며 애도의 뜻을 밝혔다. 토미카와 오키나와 부지사는 “고인은 오키나와에 대해서만 생각한, 진정한 오키나와 사람이었다. 오키나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정치를 했다.”고 회고했다. 현 의회 니사토 의장은 “어려운 정치 상황 속에서도 주민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고인의 뜻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조문”이라고 강조했다.

고인과 치열하게 맞섰던 일본 정부도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대변인 격인 스가 관방장관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스가 장관은 “후텐마 미군기지의 ‘헤노코’ 이전에 대해 의견이 나눠져 있었지만, 오키나와 진흥대책을 논의해온 것은 특별한 기억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헤노코 이전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일본을 둘러싼 안보 환경이 엄중해지는 가운데 미·일 동맹의 억지력 유지와 후텐마 비행장의 위험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오노데라 방위상은 “현 의원 시절부터 오랫동안 교류했다. 많은 추억이 있었는데 매우 안타깝다”고 밝혔고, 후쿠이 오키나와·북방 담당상도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다. 고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정치권 “애도” 한목소리… “비행장 해법”은 동상이몽

여당 측은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지역 여론의 흐름을 주시하는 분위기이다. 닛카이 자민당 간사장은 “오키나와가 직면한 과제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모습에서 정치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통하는 것을 느꼈다. 전후 일본의 많은 과제를 짊어진 오키나와의 발전을 위해, 주민과 함께 하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시바 전 간사장도 “우리와 입장은 달랐지만, 보수의 생각을 지닌 정치인이었다. 오키나와의 존재 방식을 한마음으로 고민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공동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대표는 “오키나와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적에 감사한다.”면서 “후텐마 기지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헤노코 이전을 위한 협의를 진행해왔다. 미군 기지로 인한 오키나와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야당 측에서는 고인의 뜻을 잇겠다고 천명했다. 나가쓰마 입헌민주당 대표 대행은 “진심으로 애도 드린다. 고인의 뜻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마키 국민민주당 공동대표는 “다른 나라의 군사기지가 자국 내에 있다는 위화감을 끝까지 호소해온 진짜 보수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다. 오키나와를 위해 결사적으로 투쟁한 신념의 정치인이었다.”며 애도했다.

시이 공산당 위원장은 “불굴의 신념으로 헤노코 기지 이전 반대를 위해 4년 동안 싸워온 데 대해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면서 “보수와 혁신의 울타리를 넘은 공동투쟁이야말로 오키나와의 미래”라고 강조했다. 자유당과 사민당도 “고인의 뜻을 받들어 투쟁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키나와 출신의 유명 가수 ‘아무로 나미에’는 이례적으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추모의 글을 올렸다. 지난 5월 오나가 지사로부터 ‘현민 영예상’을 받은 것을 언급하면서, “오키나와에 헌신한 고인의 뜻이 계승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강제 병합, 휩쓸린 전쟁, 자살 강요… ‘반일감정’ 높은 일본 땅

일본 열도 최남단 류큐제도에 자리 잡은 오키나와 현과 중앙 정부와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독립왕국이었다가 19세기 강제 병합된 뒤, 2차 대전 당시 일본 본토를 지키는 전진기지로 내몰렸다.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약 석 달간의 전투는 일본군의 패전과 집단자살로 막을 내렸다. 미·일 양측의 전사자가 10만∼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오키나와는 전투가 끝난 6월 23일을 희생자 위령의 날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전화에 휩쓸린 오키나와는 폐허가 됐다. 당시 오키나와 민간인 9만여 명, 그리고 강제 징집된 3만 명도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오키나와에서는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자신들처럼 집단 자결할 것을 강요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살 강요’의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버티고 있다. 주민들 사이의 반일 감정은 그만큼 뿌리가 깊다.

일제 패망 이후, 오키나와는 오랜 시간 미국의 지배를 받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됐다. 미군은 떠나지 않았다. 주일 미군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다. 대륙과 해양, 일본 열도의 길목을 지키는 군사적‧전략적 요충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중국 등을 의식해 오키나와의 무장 강화를 서두르고 있다.

오노데라 방위상 “헤노코 이전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매립 예정지에 대한 토사 반입 재개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차기 지사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후임 지사 선거는 다음 달(9월) 13일에 고시돼, 30일 투개표가 이뤄진다.


오나가 지사에 대한 추모 열기가 선거 과정의 중요 변수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선거 결과까지 좌우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미군기지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고, 고인을 대체할 수 있는 지도자도 없어 보인다. 오키나와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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