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북한, 중국의 핵개발 모델 꿈꾸나?

입력 2018.08.16 (16:35) 수정 2018.08.3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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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0월 16일 中인민일보 호외판(원자탄 실험 성공).

■ 중국의 핵무기 프로젝트 '양탄일성(兩彈一星)'

1955년 중국은 타이완을 놓고 미국과 심각한 군사적 갈등을 겪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측은 원자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내며 중국을 위협했다. 당시 마오저둥은 "3억 명이 목숨을 잃어도 세월이 흘러 더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라며 미국의 핵무기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맞섰지만 내심으로는 '핵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굶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파탄직전의 경제 상황 속에서도 핵무기 개발에 국가 예산의 30%가 넘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1964년 신장에서 원폭실험을 한데 이어 3년도 채 안돼 1967년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1970년 사실상 장거리 미사일로 사용될 수 있는 발사체, 즉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핵무기 투발수단까지 갖춘 이른바 양탄일성의 목표를 달성한다. 서방 국가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였다.

핑퐁외교로 시작된 미-중간 화해는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다.핑퐁외교로 시작된 미-중간 화해는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다.

중국, 핵보유 이후 미국과 수교 -> 경제 개방

양탄일성의 효과는 대단했다. 핵을 보유하게 된 중국과 중국 핵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미국을 조르던 타이완의 운명은 서로 반대로 흘러갔다. 1971년 중국은 타이완을 밀어내고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중국은 핵보유국으로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수교에 나섰다. 타이완 주둔 미군을 철수하기로 하는 등 중국은 원하는 것을 하나씩 챙길 수 있었다.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을 결단했고, 오늘날 미국과 패권을 다툴 정도로 경제력이 커졌고 군사력도 따라서 배가됐다.

북한은 아마도 중국의 이런 성공 모델을 꿈꾸고 있을 법 하다. 유엔 차원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굶어죽는 경제 파탄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을 소리 높여 외친 뒤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내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싱가포르까지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 좋다. 하지만 과연 북한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싱가포르 북미 회담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싱가포르 북미 회담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 중국과 지금 북한의 같은점과 다른점

중국의 핵개발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핵개발 초기에는 미국을 견제하는 심리에서 당시 소련이 많은 기술적 도움을 주었지만, 마오저둥과 후르시초프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소련은 기술진을 전부 철수시켰다. 이후 소련은 오히려 중국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1959년 6월 20일 소련은 제네바에서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핵실험 금지 협정을 논하게 된다. 중국의 핵개발을 지지한건 지구상에서 오로지 북한이 유일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유엔 차원의 강력한 대북제재 속에 이뤄졌다. 최근 공작원이었던 흑금성 박채서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도 핵개발 초기에는 중국의 도움을 받았으나, 곧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중국은 현재 유엔 차원의 대북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해 시진핑 국가 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힌 상태다.

2016년 2월 7일 中 환구시보 사설2016년 2월 7일 中 환구시보 사설

■환구시보 "北, 中과 같은 길 갈 수 없다...단념하라"

지난 2016년 2월 7일자 관영 환구시보 논평을 살펴보자. 북한은 중국과 같은 양탄일성의 길을 갈 수 없으니 단념하라는 내용이다. 논평은 중국의 핵개발 당시 주변 정세와 지금 북한이 직면한 정세는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당시엔 핵확산 금지조약이 없어서 불법이 아니었다는 주장과 함께 현실적으로도 중국은 면적이 넓은 대국이어서 핵실험을 할 수 있었지만 북한은 그런 현실적 여건도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문일현 중국 정법대 교수는 중국 학계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과거 중국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국의 냉전 구도 속에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중국이 냉전의 양 극인 미국과 소련 중간에서 균형을 흔들 수 있었기에 핵 보유국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북한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비슷한 방식을 시도하려하지만 북한 핵문제에서 만큼은 미국과 중국이 같은 의견입니다. 북한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세력 판도를 바꿀수 있을 정도의 체급이 안된다는 점도 직시해야 합니다."

■북한, 아직도 핵보유국 인정 꿈꾸나?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카드를 높이 들고 국제사회로 나왔을때 모두가 박수쳤던 것은 그것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카드로 모두의 시선을 잡아 끈 뒤 지금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아직도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유엔주재 북한대사 명의로 "북한은 책임있는 핵보유국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로서 비확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선언한바 있다.

우리 입장에서 북한의 핵을 인정할 수는 없다. 미국과 중국도 공식적으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상 핵무기를 개발했다가 자발적으로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갈 길은 무척이나 험난해 보인다. 지금 전 세계는 북한을 상대로 전례없는 시도, 전례없는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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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6 16:35:18
    • 수정2018-08-30 09:24:00
    특파원 리포트
▲1964년 10월 16일 中인민일보 호외판(원자탄 실험 성공).

■ 중국의 핵무기 프로젝트 '양탄일성(兩彈一星)'

1955년 중국은 타이완을 놓고 미국과 심각한 군사적 갈등을 겪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측은 원자탄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내며 중국을 위협했다. 당시 마오저둥은 "3억 명이 목숨을 잃어도 세월이 흘러 더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라며 미국의 핵무기에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맞섰지만 내심으로는 '핵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굶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파탄직전의 경제 상황 속에서도 핵무기 개발에 국가 예산의 30%가 넘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1964년 신장에서 원폭실험을 한데 이어 3년도 채 안돼 1967년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1970년 사실상 장거리 미사일로 사용될 수 있는 발사체, 즉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핵무기 투발수단까지 갖춘 이른바 양탄일성의 목표를 달성한다. 서방 국가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였다.

핑퐁외교로 시작된 미-중간 화해는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다.
중국, 핵보유 이후 미국과 수교 -> 경제 개방

양탄일성의 효과는 대단했다. 핵을 보유하게 된 중국과 중국 핵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미국을 조르던 타이완의 운명은 서로 반대로 흘러갔다. 1971년 중국은 타이완을 밀어내고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중국은 핵보유국으로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수교에 나섰다. 타이완 주둔 미군을 철수하기로 하는 등 중국은 원하는 것을 하나씩 챙길 수 있었다. 이후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을 결단했고, 오늘날 미국과 패권을 다툴 정도로 경제력이 커졌고 군사력도 따라서 배가됐다.

북한은 아마도 중국의 이런 성공 모델을 꿈꾸고 있을 법 하다. 유엔 차원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굶어죽는 경제 파탄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을 소리 높여 외친 뒤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내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싱가포르까지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 좋다. 하지만 과연 북한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싱가포르 북미 회담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 중국과 지금 북한의 같은점과 다른점

중국의 핵개발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핵개발 초기에는 미국을 견제하는 심리에서 당시 소련이 많은 기술적 도움을 주었지만, 마오저둥과 후르시초프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소련은 기술진을 전부 철수시켰다. 이후 소련은 오히려 중국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1959년 6월 20일 소련은 제네바에서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핵실험 금지 협정을 논하게 된다. 중국의 핵개발을 지지한건 지구상에서 오로지 북한이 유일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유엔 차원의 강력한 대북제재 속에 이뤄졌다. 최근 공작원이었던 흑금성 박채서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도 핵개발 초기에는 중국의 도움을 받았으나, 곧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중국은 현재 유엔 차원의 대북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해 시진핑 국가 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힌 상태다.

2016년 2월 7일 中 환구시보 사설
■환구시보 "北, 中과 같은 길 갈 수 없다...단념하라"

지난 2016년 2월 7일자 관영 환구시보 논평을 살펴보자. 북한은 중국과 같은 양탄일성의 길을 갈 수 없으니 단념하라는 내용이다. 논평은 중국의 핵개발 당시 주변 정세와 지금 북한이 직면한 정세는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당시엔 핵확산 금지조약이 없어서 불법이 아니었다는 주장과 함께 현실적으로도 중국은 면적이 넓은 대국이어서 핵실험을 할 수 있었지만 북한은 그런 현실적 여건도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문일현 중국 정법대 교수는 중국 학계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과거 중국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국의 냉전 구도 속에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중국이 냉전의 양 극인 미국과 소련 중간에서 균형을 흔들 수 있었기에 핵 보유국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북한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비슷한 방식을 시도하려하지만 북한 핵문제에서 만큼은 미국과 중국이 같은 의견입니다. 북한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세력 판도를 바꿀수 있을 정도의 체급이 안된다는 점도 직시해야 합니다."

■북한, 아직도 핵보유국 인정 꿈꾸나?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카드를 높이 들고 국제사회로 나왔을때 모두가 박수쳤던 것은 그것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카드로 모두의 시선을 잡아 끈 뒤 지금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아직도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유엔주재 북한대사 명의로 "북한은 책임있는 핵보유국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로서 비확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선언한바 있다.

우리 입장에서 북한의 핵을 인정할 수는 없다. 미국과 중국도 공식적으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역사상 핵무기를 개발했다가 자발적으로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갈 길은 무척이나 험난해 보인다. 지금 전 세계는 북한을 상대로 전례없는 시도, 전례없는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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