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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특파원리포트] 독립운동의 산실…‘3·1중학’ 건물 최초 확인
입력 2018.08.19 (20:17) 수정 2018.08.19 (22:20) 특파원 리포트
[단독/특파원리포트] 독립운동의 산실…‘3·1중학’ 건물 최초 확인
[임시정부 시절에도 의무교육…. 상하이에 공립학교 설립]

일제강점기 시절 상하이 임시정부 산하에는 민족교육을 위한 초등 공립학교, 그리고 중등 공립학교가 각각 존재했습니다. 임시정부도 엄연히 국가이고, 국가는 국민에 대한 교육의 의무를 지고 있으니 공립학교를 세워야 하는 것이죠.

임시정부의 첫 공립학교는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입니다. 1917년에 교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후 1920년 임시정부 산하 공립학교로 편입됐습니다. 초대 교장인 여운형 선생을 시작으로 손정도, 안창호 선생 등 12명의 교장과 60여 명의 교사가 근무했는데, 교원들은 대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그러나...중등학교인 '3·1중학'은 위치도 아직 몰라]

또 하나의 공립학교인 중등교육기관은 인성학교의 졸업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이후 1925년 설립됩니다. '고등보수학원'이라 명명됐다가 몇 년 뒤 3·1중학 또는 3·1공학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하지만 자료가 비교적 충실히 남아있는 인성학교와 달리 3·1중학은 학교 위치도 아직 공식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다만, 학교가 문을 연 1925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몇몇 신문이 짤막하게 3·1중학의 개교 기사를 게재하면서 학교에 대한 정보를 남긴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인 김규식 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와 영어를 교육했으며, 한국인과 중국인 남녀 학생 모두를 교육하는 기관이라는 정도입니다.

日외무성 특별조사문건日외무성 특별조사문건

['일본 외무성 문서' 덕을 보다?]

3·1중학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된 건 최근 입수한 일본 외무성의 특별 조사문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상하이총영사관과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의 도움을 받아 입수할 수 있었는데요, 특별조사문건이란 일본 외무성이 우리 독립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밀정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정리해 본국에 보낸 문건을 말합니다. 여기에 3·1 중학에 대한 상세한 조사 내용이 기재돼 있었던 겁니다.

당시 일제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학교 이름은 3·1 공학 ▶중등 수준 조선 학생의 일본대학 입학 준비를 위한 교육 기관임 ▶학생 수는 100명 정도 ▶3년 속성 과정 제공 ▶교장 김규식, 교감 최창식 ▶직원은 조선인 5명, 중국인 10명, 외국인 수 명.

[3·1중학의 주소는 프랑스 조계지 내 항경리(恒慶里)]

정말 상세하게 조사를 해놓았지요? 이 문건에서 학교의 주소지도 처음으로 확인됐습니다. 프랑스 조계지 내 '항경리'(恒慶里)라는 곳입니다. '항경리'라는 지명은 사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기도 합니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한인애국단 본부'가 최근 발견된 곳이기도 하지요. 과거 기록에는 한인애국단의 본부가 '신천상리'(新天祥里)에 있다고 나와 있는데, 지도를 찾아보면 '신천상리'라는 지명이 없어서 그간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왔었거든요. 그러다가 '신천상리'가 사실은 지도상의 '항경리'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면서 한인애국단 본부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던 거죠. 바로 그 '항경리'라는 마을에 3·1 중학의 건물도 존재했었던 겁니다.

[항경리에서 옛 학교 건물을 찾아내다]

당시 지명 '항경리'는 지금은 다른 지명으로 바뀌었지만, 옛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대조해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을은 옛 건축물들이 보존된 그야말로 '올드 상하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좁은 골목길 사이에서 1920~30년대부터 학교 건물로 쓰였다는 3층짜리 건물을 한 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개의 나란한 건물을 붙여서 사용하고 있는 형태였습니다.

 항경리에서 찾아낸 옛 학교 건물 항경리에서 찾아낸 옛 학교 건물

1930년대 발간된 지도를 찾아보면 이 자리에 '건명소학'이라는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문을 두드려 봤습니다. 한참 만에 나타난 집 주인에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반갑게 맞아주는데요, 알고 보니 '건명소학'이라는 오래된 학교를 처음부터 운영해오던 교장 선생님의 따님이었습니다. 이 건물의 연원을 묻자 "1930년대에 부모님이 학교를 여시면서 이 건물로 오셨다고 알고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이 분의 기억으로는 1930년대 초반 또는 중반 무렵에 '건명소학'이라는 학교를 부친께서 세우셨다는 얘깁니다. 이 동네에서 학교라고 할 수 있는 건 이 건물밖에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3·1 중학과 건명소학의 관계는?]

그렇다면 일본 외무성 문서 기록상 '항경리'라는 마을에 있었다고 기재된 '3·1 중학'과 취재진이 그 마을에서 찾아낸 '건명소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우리 공립학교들은 1930년대 들어 자금난이 심해지고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잇달아 문을 닫게 됩니다. 인성학교는 1935년에 폐교식을 가진 것으로 기록돼있고, 3·1 중학은 이보다 1~2년 먼저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항경리에 있던 3·1 중학이 1930년대 초중반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고, 곧이어 같은 동네에서 학생 100명 정도의 같은 규모의 '건명소학'이라는 학교가 새로 생겨났다는 거죠. 이 동네에서 학교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은 이 건물 이외에 찾아볼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건명소학은 3·1중학의 학교 건물과 학생들을 그대로 넘겨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찾아낸 3·1 중학 건물?.. 그러나 시간이 별로 없다]

실제로 당시 재정난을 겪는 학교의 인수 과정이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취재를 도운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소장도 '항경리'의 이 건물이 3·1중학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향후 관련 당국의 추가 검증에도 참여할 의사를 밝혔는데요, 만일 3·1 중학의 건물로 최종 확인될 경우 당시 공립교육기관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리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항경리 일대를 상하이시가 조만간 재개발할 계획을 세워놓았기 때문인데요. 이미 항경리의 일부 지역은 재개발에 착수된 상태입니다. 지난 6월에 KBS가 찾아냈던 항경리의 '한인애국단 본부'도, 건물은 이미 재개발로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해외에 아직 남아있는 우리 독립운동의 주요 유적과 사료들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가 시급히 취해져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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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9 (20:17)
    • 수정 2018.08.19 (22:20)
    특파원 리포트
[단독/특파원리포트] 독립운동의 산실…‘3·1중학’ 건물 최초 확인
[임시정부 시절에도 의무교육…. 상하이에 공립학교 설립]

일제강점기 시절 상하이 임시정부 산하에는 민족교육을 위한 초등 공립학교, 그리고 중등 공립학교가 각각 존재했습니다. 임시정부도 엄연히 국가이고, 국가는 국민에 대한 교육의 의무를 지고 있으니 공립학교를 세워야 하는 것이죠.

임시정부의 첫 공립학교는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입니다. 1917년에 교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후 1920년 임시정부 산하 공립학교로 편입됐습니다. 초대 교장인 여운형 선생을 시작으로 손정도, 안창호 선생 등 12명의 교장과 60여 명의 교사가 근무했는데, 교원들은 대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그러나...중등학교인 '3·1중학'은 위치도 아직 몰라]

또 하나의 공립학교인 중등교육기관은 인성학교의 졸업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이후 1925년 설립됩니다. '고등보수학원'이라 명명됐다가 몇 년 뒤 3·1중학 또는 3·1공학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하지만 자료가 비교적 충실히 남아있는 인성학교와 달리 3·1중학은 학교 위치도 아직 공식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다만, 학교가 문을 연 1925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몇몇 신문이 짤막하게 3·1중학의 개교 기사를 게재하면서 학교에 대한 정보를 남긴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인 김규식 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와 영어를 교육했으며, 한국인과 중국인 남녀 학생 모두를 교육하는 기관이라는 정도입니다.

日외무성 특별조사문건日외무성 특별조사문건

['일본 외무성 문서' 덕을 보다?]

3·1중학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게 된 건 최근 입수한 일본 외무성의 특별 조사문건이 계기가 됐습니다. 상하이총영사관과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의 도움을 받아 입수할 수 있었는데요, 특별조사문건이란 일본 외무성이 우리 독립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밀정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정리해 본국에 보낸 문건을 말합니다. 여기에 3·1 중학에 대한 상세한 조사 내용이 기재돼 있었던 겁니다.

당시 일제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학교 이름은 3·1 공학 ▶중등 수준 조선 학생의 일본대학 입학 준비를 위한 교육 기관임 ▶학생 수는 100명 정도 ▶3년 속성 과정 제공 ▶교장 김규식, 교감 최창식 ▶직원은 조선인 5명, 중국인 10명, 외국인 수 명.

[3·1중학의 주소는 프랑스 조계지 내 항경리(恒慶里)]

정말 상세하게 조사를 해놓았지요? 이 문건에서 학교의 주소지도 처음으로 확인됐습니다. 프랑스 조계지 내 '항경리'(恒慶里)라는 곳입니다. '항경리'라는 지명은 사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기도 합니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한인애국단 본부'가 최근 발견된 곳이기도 하지요. 과거 기록에는 한인애국단의 본부가 '신천상리'(新天祥里)에 있다고 나와 있는데, 지도를 찾아보면 '신천상리'라는 지명이 없어서 그간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왔었거든요. 그러다가 '신천상리'가 사실은 지도상의 '항경리'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면서 한인애국단 본부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던 거죠. 바로 그 '항경리'라는 마을에 3·1 중학의 건물도 존재했었던 겁니다.

[항경리에서 옛 학교 건물을 찾아내다]

당시 지명 '항경리'는 지금은 다른 지명으로 바뀌었지만, 옛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대조해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을은 옛 건축물들이 보존된 그야말로 '올드 상하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좁은 골목길 사이에서 1920~30년대부터 학교 건물로 쓰였다는 3층짜리 건물을 한 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개의 나란한 건물을 붙여서 사용하고 있는 형태였습니다.

 항경리에서 찾아낸 옛 학교 건물 항경리에서 찾아낸 옛 학교 건물

1930년대 발간된 지도를 찾아보면 이 자리에 '건명소학'이라는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문을 두드려 봤습니다. 한참 만에 나타난 집 주인에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반갑게 맞아주는데요, 알고 보니 '건명소학'이라는 오래된 학교를 처음부터 운영해오던 교장 선생님의 따님이었습니다. 이 건물의 연원을 묻자 "1930년대에 부모님이 학교를 여시면서 이 건물로 오셨다고 알고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이 분의 기억으로는 1930년대 초반 또는 중반 무렵에 '건명소학'이라는 학교를 부친께서 세우셨다는 얘깁니다. 이 동네에서 학교라고 할 수 있는 건 이 건물밖에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3·1 중학과 건명소학의 관계는?]

그렇다면 일본 외무성 문서 기록상 '항경리'라는 마을에 있었다고 기재된 '3·1 중학'과 취재진이 그 마을에서 찾아낸 '건명소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우리 공립학교들은 1930년대 들어 자금난이 심해지고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잇달아 문을 닫게 됩니다. 인성학교는 1935년에 폐교식을 가진 것으로 기록돼있고, 3·1 중학은 이보다 1~2년 먼저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항경리에 있던 3·1 중학이 1930년대 초중반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고, 곧이어 같은 동네에서 학생 100명 정도의 같은 규모의 '건명소학'이라는 학교가 새로 생겨났다는 거죠. 이 동네에서 학교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은 이 건물 이외에 찾아볼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건명소학은 3·1중학의 학교 건물과 학생들을 그대로 넘겨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찾아낸 3·1 중학 건물?.. 그러나 시간이 별로 없다]

실제로 당시 재정난을 겪는 학교의 인수 과정이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취재를 도운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소장도 '항경리'의 이 건물이 3·1중학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향후 관련 당국의 추가 검증에도 참여할 의사를 밝혔는데요, 만일 3·1 중학의 건물로 최종 확인될 경우 당시 공립교육기관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리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항경리 일대를 상하이시가 조만간 재개발할 계획을 세워놓았기 때문인데요. 이미 항경리의 일부 지역은 재개발에 착수된 상태입니다. 지난 6월에 KBS가 찾아냈던 항경리의 '한인애국단 본부'도, 건물은 이미 재개발로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해외에 아직 남아있는 우리 독립운동의 주요 유적과 사료들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가 시급히 취해져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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