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에릭남도 거기서 차별을 당했을까?

입력 2018.08.23 (10:03) 수정 2018.08.2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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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Crazy Rich Asians)', 9월 18일 한국 개봉


■ 에릭남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 극장표 통째로 산 이유는?

아시아계 영화가 전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화제다. 케빈 콴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워너브러더스사 제작, 존 츄 감독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Crazy Rich Asians)다. 1993년 조이럭클럽 이후 25년만의, 전 배역이 아시아계로 캐스팅된 헐리우드 대형영화사의 영화다.

한국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가수이자 진행자인 에릭 남과 그 형제들이, 이 영화의 흥행을 돕기 위해 미 애틀란타 한 극장의 전체 표를 구매했다는 소식으로 더욱 화제가 됐다.
에릭남은 이같은 이벤트를 기획한 이유에 대해 "주류 미디어에서 잘못 그려지는 아시아인의 모습에 지쳤다. 우리는 기계광이나 수학을 잘하는 괴짜거나 닌자 자객이 아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섹시하고, 그 이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얼마나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뉴욕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로부터 들었던 여러 얘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TV시리즈나 영화에서 아시아인들이 괴짜, 폭력배 아니면 중국집 배달원 같은 사람들로만 나오는데, 백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요?"라는 푸념들이다. 단지 푸념이라기에는, 그들이 당해온 인종차별적 경험에 대한, 보다 진지한 문제제기일 것이다.
에릭남 스스로 미국에서 자라면서 외모 비하 등으로 차별을 많이 당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이 영화에 그만한 돈이 아깝지 않은 이유는 이 영화가 북미 엔터테인먼트업계의 모든 아시아계에게 엄청난 의미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골딩헨리 골딩

■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도 있다!

이 영화의 여성 주역들을, 콘스탄스 우, 양자경 같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아시아계 여성 배우들이 맡은 것과 달리,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즉 싱가포르 최고 갑부 집안의 상속자인 닉 영 역을 맡은 배우 헨리 골딩에게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단순히 영화 데뷔작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데뷔작이다. 말레이시아계 영국인인 그는 전직 헤어디자이너이자 말레이시아에서 BBC방송의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진행자였다.

여주인공역을 맡은, 미국 TV 드라마 역사상 첫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로 평가되는 '후레쉬 오프 더 보트(Fresh off the Boat)'의 주연으로 유명한 콘스탄스 우는, 남자 주인공 선택에 영화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는 미 잡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보여주고 싶었다. nerdy함을 표현할 수 있는, 머리는 좋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그러나 사랑스러운 섹시한 남자 주인공을 원했다". 어쩌면 그게, 전혀 배우 경험조차 없는 신선한 아시아계 남성을 주역으로 과감히 발탁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주인공 헨리 골딩의 이른바 '섹시한' 면모는, 침실, 해변, 파티 등등 다양한 장면들을 통해 물씬 과시된다.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 그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머릿 속으로 한 번 할리우드 영화의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떠올려보라? 특히 이야기의 주요 골격을 이루는 남녀의 로맨스에서의 주역으로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떠올려보라? 두번째 세번째 주요 배역이라고 억지로 꿰맞추지 말고 진짜 주인공으로 누가 있었는지 떠올려보라? 누가 떠오르는가? 그렇다, 없다.
돈의 논리가 가장 중요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티켓 파워인 '섹시한 남자 주인공'으로, 돈이 안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아시아계를 캐스팅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한이 에릭남의 가슴속에도 서려 있었던 건 아닐까? 아시아계 남자는 섹시할 수 없다는 편견! 굳이 남자든 여자든 섹시해져야 하느냐 마느냐 같은 게 논점이 아니다. 문제는 실제로 아시아계의 삶에는 매우 다양한 면들이 있지만,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섹시한 남자들도 있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그간 그런 면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지난해 캐나다 공영방송 CBC의 첫 아시아계 중심의 드라마 시리즈 <김 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을 취재하면서 만난 한국계 배우 폴 영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게 항상 정형화된 배역들만 맡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차이나타운의 상인, 감초로 끼어드는 웃긴 남자, 주인공의 친구나 이웃사람, 폭력배 같은 것들이다. 그는 "정형화된 그런 배역들만 맡다 보면 배우로서의 훈련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훈련을 할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주요한 배역의 오디션을 볼 수 없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캐스팅에서의 인종 차별은 아시아계 남자 배우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오랫동안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들을 주역으로 캐스팅하기를 주저해왔다. 또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문제가 도드라져온 흑인이나, 상대적으로 인구 증가 속도가 빠른 히스패닉계보다, 아시아계와 관련해서는 그런 문제가 덜 부각돼왔다. 뉴욕타임즈는, 아시아계 인구는 미국에서 5%가 넘지만 영화에서 아시아계가 주역을 맡는 비율은 1%가 안 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할리우드가 전세계를 상대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아시아계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60%를 차지하는데도 말이다.

최근까지도 할리우드 영화에서, 원작에서는(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 아시아계였던 배역을 백인으로 바꾼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영화 '알로 하'에서는 하와이 원주민과 중국인의 후손 역할을 엠마 스톤이 맡았고, '마션'에서는 한국계 과학자 역할을 매킨지 데이비스가 맡았다. 2016년 '닥터 스트레인지'에서는 히말라야 왕국 출신 역할은 틸다 스윈톤에게, 지난해 유명 애니메니션 원작의 영화 '공각기동대'에서는 여주인공 일본인 모토코 쿠사나기 역이 스칼렛 요한슨에게 돌아갔다.

할리우드 영화계가 이처럼 인종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데 대한 비판이 많다. 그러나, 주로 백인 남자들인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은 말한다, "아시아계에는 주연으로 발탁할 배우들이 없다"고. 그러나 BBC는 유색인종 역할을 백인으로 갈아치우는 할리우드 관행의 이유가, 고질적인 인종차별적 관념과 백인 배우들이 돈을 더 많이 벌어줄 것이란 인식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야말로, 할리우드의 그런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감독 존 추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넷플릭스의 제작 제의를 "이 영화는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에서 제작되고 배급되어야 의미가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또 원작 소설의 저자 케빈 콴은, 할리우드와 영화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주인공을 백인 여성으로 바꿔 달라'는 압력에 대해 "당신은 요점을 아주 잘못 짚었어"라며 거절했다.

영화 스틸컷영화 스틸컷

■ 기껏해야 로맨틱 코미디?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 영화에 대해 '인종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계급에 대한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60%의 부를 독점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완의 6% 부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방대한 아시아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특수한 일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아시아계에 획을 긋는 영화가 '기껏해야 최고 갑부들의 로맨틱 코미디'냐는 비판일 것이다. 그는 이처럼 모든 배역이 아시아계인 영화라면, 대륙 철도 건설에서의 중국인 노동자 착취, 1882년 중국인 배척법, 2차대전 때 일본인 강제 이주 같은 걸 다뤘으면 어땠을까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영화에서 닉 영의 어머니로, 평범한 중국계 미국인의 딸인 아들의 여자친구 레이첼(콘스탄스 우 역)과 대립하는, 엘레노아 영 역의 배우 양자경이 내놓는다. 양자경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리우드에 처음 갔을 때, 내가 배역을 맡으려면 이유가 있어야 했어요. 왜 우리(아시아계)가 배역을 맡으려면 설명이 필요한 거죠?"

왜 아시아계가 주역을, 또는 아시아계가 전부 배역을 맡는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만들려면, 그런 거창한 담론과 의미가 수반되어야 하는가? 왜 그냥 아시아계가 나오고, 그냥 아시아계가 만드는 영화는 안되는 것인가?

문화평론가 피아 세레스는 와이어드에서, '그냥 또 하나의 로맨틱 코미디'라는 말로는 이 영화가 이룬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영화는 '그냥 또 하나의 로맨틱 코미디'라서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이 영화는 그냥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온통 아시아의 것들로 채워진 영화를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특별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아시아에 대한 이해를, 분명 넓힐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저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를 아시아계가 만들었다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다. 인종이나 민족과 관련된 심오한 의미가 없는 평범한 아시아계 영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찌들었던 할리우드에 증명해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할리우드 제작사들은, 심오한 의미 없이도 아시아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용기를 낼 것이고, 그냥 괜히 아시아계의 섹시한 남자배우들을 캐스팅할 수도 있을 것이며, 최소한 원래 아시아계였던 배역을 백인으로 바꾸라는 압력을 자제하게 될 것이다.

에릭 남에릭 남

영화나 연극, 드라마 등에서 표출되는 모습은, 그 인종이나 민족을 비추는 거울이다. 분명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지배하는 할리우드는, 북미서구유럽의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는데 성공적이지 못해왔다. 그것은 단순히 배우나 작가, 감독 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다른 인종이나 다른 민족의 진짜 모습에 대한, 공고하고 오래되고 그래서 의식적이기도 무의식적이기도 한 차별의 반영이다.

에릭남과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 영화에 흥분하는 이유 역시, 할리우드 등 북미 엔터테인먼트 산업계가, 이제라도 아시아계를 제대로 비춰주기를 바라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해 아시아계가 먼저 나서 해야 할 일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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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3 10:03:06
    • 수정2018-08-23 10: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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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Crazy Rich Asians)', 9월 18일 한국 개봉


■ 에릭남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 극장표 통째로 산 이유는?

아시아계 영화가 전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화제다. 케빈 콴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워너브러더스사 제작, 존 츄 감독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Crazy Rich Asians)다. 1993년 조이럭클럽 이후 25년만의, 전 배역이 아시아계로 캐스팅된 헐리우드 대형영화사의 영화다.

한국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가수이자 진행자인 에릭 남과 그 형제들이, 이 영화의 흥행을 돕기 위해 미 애틀란타 한 극장의 전체 표를 구매했다는 소식으로 더욱 화제가 됐다.
에릭남은 이같은 이벤트를 기획한 이유에 대해 "주류 미디어에서 잘못 그려지는 아시아인의 모습에 지쳤다. 우리는 기계광이나 수학을 잘하는 괴짜거나 닌자 자객이 아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섹시하고, 그 이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얼마나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뉴욕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로부터 들었던 여러 얘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TV시리즈나 영화에서 아시아인들이 괴짜, 폭력배 아니면 중국집 배달원 같은 사람들로만 나오는데, 백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요?"라는 푸념들이다. 단지 푸념이라기에는, 그들이 당해온 인종차별적 경험에 대한, 보다 진지한 문제제기일 것이다.
에릭남 스스로 미국에서 자라면서 외모 비하 등으로 차별을 많이 당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이 영화에 그만한 돈이 아깝지 않은 이유는 이 영화가 북미 엔터테인먼트업계의 모든 아시아계에게 엄청난 의미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골딩
■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도 있다!

이 영화의 여성 주역들을, 콘스탄스 우, 양자경 같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아시아계 여성 배우들이 맡은 것과 달리,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즉 싱가포르 최고 갑부 집안의 상속자인 닉 영 역을 맡은 배우 헨리 골딩에게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단순히 영화 데뷔작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데뷔작이다. 말레이시아계 영국인인 그는 전직 헤어디자이너이자 말레이시아에서 BBC방송의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진행자였다.

여주인공역을 맡은, 미국 TV 드라마 역사상 첫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로 평가되는 '후레쉬 오프 더 보트(Fresh off the Boat)'의 주연으로 유명한 콘스탄스 우는, 남자 주인공 선택에 영화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는 미 잡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보여주고 싶었다. nerdy함을 표현할 수 있는, 머리는 좋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그러나 사랑스러운 섹시한 남자 주인공을 원했다". 어쩌면 그게, 전혀 배우 경험조차 없는 신선한 아시아계 남성을 주역으로 과감히 발탁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주인공 헨리 골딩의 이른바 '섹시한' 면모는, 침실, 해변, 파티 등등 다양한 장면들을 통해 물씬 과시된다.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 그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머릿 속으로 한 번 할리우드 영화의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떠올려보라? 특히 이야기의 주요 골격을 이루는 남녀의 로맨스에서의 주역으로 섹시한 아시아계 남자 주인공을 떠올려보라? 두번째 세번째 주요 배역이라고 억지로 꿰맞추지 말고 진짜 주인공으로 누가 있었는지 떠올려보라? 누가 떠오르는가? 그렇다, 없다.
돈의 논리가 가장 중요한 할리우드 영화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티켓 파워인 '섹시한 남자 주인공'으로, 돈이 안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아시아계를 캐스팅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한이 에릭남의 가슴속에도 서려 있었던 건 아닐까? 아시아계 남자는 섹시할 수 없다는 편견! 굳이 남자든 여자든 섹시해져야 하느냐 마느냐 같은 게 논점이 아니다. 문제는 실제로 아시아계의 삶에는 매우 다양한 면들이 있지만,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섹시한 남자들도 있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그간 그런 면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지난해 캐나다 공영방송 CBC의 첫 아시아계 중심의 드라마 시리즈 <김 씨네 편의점(Kim's Convenience)>을 취재하면서 만난 한국계 배우 폴 영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게 항상 정형화된 배역들만 맡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차이나타운의 상인, 감초로 끼어드는 웃긴 남자, 주인공의 친구나 이웃사람, 폭력배 같은 것들이다. 그는 "정형화된 그런 배역들만 맡다 보면 배우로서의 훈련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훈련을 할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주요한 배역의 오디션을 볼 수 없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캐스팅에서의 인종 차별은 아시아계 남자 배우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오랫동안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들을 주역으로 캐스팅하기를 주저해왔다. 또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문제가 도드라져온 흑인이나, 상대적으로 인구 증가 속도가 빠른 히스패닉계보다, 아시아계와 관련해서는 그런 문제가 덜 부각돼왔다. 뉴욕타임즈는, 아시아계 인구는 미국에서 5%가 넘지만 영화에서 아시아계가 주역을 맡는 비율은 1%가 안 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할리우드가 전세계를 상대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아시아계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60%를 차지하는데도 말이다.

최근까지도 할리우드 영화에서, 원작에서는(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 아시아계였던 배역을 백인으로 바꾼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영화 '알로 하'에서는 하와이 원주민과 중국인의 후손 역할을 엠마 스톤이 맡았고, '마션'에서는 한국계 과학자 역할을 매킨지 데이비스가 맡았다. 2016년 '닥터 스트레인지'에서는 히말라야 왕국 출신 역할은 틸다 스윈톤에게, 지난해 유명 애니메니션 원작의 영화 '공각기동대'에서는 여주인공 일본인 모토코 쿠사나기 역이 스칼렛 요한슨에게 돌아갔다.

할리우드 영화계가 이처럼 인종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데 대한 비판이 많다. 그러나, 주로 백인 남자들인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와 감독들은 말한다, "아시아계에는 주연으로 발탁할 배우들이 없다"고. 그러나 BBC는 유색인종 역할을 백인으로 갈아치우는 할리우드 관행의 이유가, 고질적인 인종차별적 관념과 백인 배우들이 돈을 더 많이 벌어줄 것이란 인식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야말로, 할리우드의 그런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감독 존 추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넷플릭스의 제작 제의를 "이 영화는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에서 제작되고 배급되어야 의미가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또 원작 소설의 저자 케빈 콴은, 할리우드와 영화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주인공을 백인 여성으로 바꿔 달라'는 압력에 대해 "당신은 요점을 아주 잘못 짚었어"라며 거절했다.

영화 스틸컷
■ 기껏해야 로맨틱 코미디?

워싱턴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 영화에 대해 '인종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계급에 대한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60%의 부를 독점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완의 6% 부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방대한 아시아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특수한 일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아시아계에 획을 긋는 영화가 '기껏해야 최고 갑부들의 로맨틱 코미디'냐는 비판일 것이다. 그는 이처럼 모든 배역이 아시아계인 영화라면, 대륙 철도 건설에서의 중국인 노동자 착취, 1882년 중국인 배척법, 2차대전 때 일본인 강제 이주 같은 걸 다뤘으면 어땠을까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영화에서 닉 영의 어머니로, 평범한 중국계 미국인의 딸인 아들의 여자친구 레이첼(콘스탄스 우 역)과 대립하는, 엘레노아 영 역의 배우 양자경이 내놓는다. 양자경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리우드에 처음 갔을 때, 내가 배역을 맡으려면 이유가 있어야 했어요. 왜 우리(아시아계)가 배역을 맡으려면 설명이 필요한 거죠?"

왜 아시아계가 주역을, 또는 아시아계가 전부 배역을 맡는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만들려면, 그런 거창한 담론과 의미가 수반되어야 하는가? 왜 그냥 아시아계가 나오고, 그냥 아시아계가 만드는 영화는 안되는 것인가?

문화평론가 피아 세레스는 와이어드에서, '그냥 또 하나의 로맨틱 코미디'라는 말로는 이 영화가 이룬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할 수 없지만, 이 영화는 '그냥 또 하나의 로맨틱 코미디'라서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이 영화는 그냥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온통 아시아의 것들로 채워진 영화를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특별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아시아에 대한 이해를, 분명 넓힐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저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를 아시아계가 만들었다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다. 인종이나 민족과 관련된 심오한 의미가 없는 평범한 아시아계 영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에 찌들었던 할리우드에 증명해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할리우드 제작사들은, 심오한 의미 없이도 아시아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용기를 낼 것이고, 그냥 괜히 아시아계의 섹시한 남자배우들을 캐스팅할 수도 있을 것이며, 최소한 원래 아시아계였던 배역을 백인으로 바꾸라는 압력을 자제하게 될 것이다.

에릭 남
영화나 연극, 드라마 등에서 표출되는 모습은, 그 인종이나 민족을 비추는 거울이다. 분명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지배하는 할리우드는, 북미서구유럽의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는데 성공적이지 못해왔다. 그것은 단순히 배우나 작가, 감독 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다른 인종이나 다른 민족의 진짜 모습에 대한, 공고하고 오래되고 그래서 의식적이기도 무의식적이기도 한 차별의 반영이다.

에릭남과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 영화에 흥분하는 이유 역시, 할리우드 등 북미 엔터테인먼트 산업계가, 이제라도 아시아계를 제대로 비춰주기를 바라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해 아시아계가 먼저 나서 해야 할 일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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