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받던 성폭행 사건 피고인, 보석 없이 풀려난 이유는?

입력 2018.08.24 (09:00) 수정 2018.08.2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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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사건 피고인 측의 요청에 따라 8월 27일자로 일부 내용이 수정, 보완돼 재게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한 여성이 성폭행 피해를 신고했습니다. 피의자는 구속됐고, 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인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1심 재판부는 죄를 인정하고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언젠가 신문에서 본 듯한 성폭력 사건의 일반적인 수사·재판 과정으로 느껴지실 겁니다. 그런데 6개월 뒤,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감옥에 있던 피고인이 보석 신청도 없이 풀려난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사건 배당 받고도 3개월 동안 방치한 재판부

올해 2월 초 1심 판결이 난 뒤, 피고인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그는 사건 당시 술에 취한 상태여서 기억이 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의 진실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현역 군인이기 때문에 항소심 사건은 고등군사법원에 접수됐습니다. 3월 초의 일입니다. 하지만 사건 접수 3개월이 지나도록, 재판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신진희 변호사(대한법률구조공단)는 "형식 면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첫 공판기일이 이렇게 늦어진 건 이례적인 일"이라며 "적어도 5월 초순에는 항소심 첫 공판기일이 잡혀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결국 잡힌 항소심 첫 공판기일은 6월 15일. 사건 접수 뒤 거의 100일에 가까운 시일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날 피고인 측은 "피해자가 진술을 수차례 번복했다"면서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했습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한달 뒤 피해자 측에 증인소환장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1심 재판부가 이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한 바 있고, 증인 신문 과정에서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7월 25일 재판에 나오지 않았고, 이에 재판부는 8월 9일 또 다시 재판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또 보름이 지났습니다.

결국 8월 9일 법정에 출석해 증인 신문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피해자. 변호사(피해자 국선 전담 변호사)에게서 전화로 날벼락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피고인이 나흘 뒤에 석방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김기춘 풀어준 '구속기간 만료' 조항 몰랐을 리 없어"

재판부가 변호사를 통해 통보한 피고인의 석방 이유는 '구속기간 만료'였습니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고인은 2심이 진행되는 동안 최대 6개월까지만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을 수 있는데, 정해진 기간이 지났으니 풀어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6일 풀려난 것도 이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복잡한 사건이 아닌 이상, 항소심 진행 과정에서 구속 상태인 피고인이 풀려나는 일은 드물다는 게 법조인들의 설명입니다. 1심에 비해 다툴 쟁점이 적어, 대부분 6개월 안에 판결이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번 사건은 1심조차 단 2개월 안에 마무리 됐습니다.

신진희 변호사는 "구속 사건일 경우 재판부는 구속기간 만료일 전에 선고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재판부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피해자는 물론 피고인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한본 변호사(법무법인 정도) 역시 "군사법원에는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지도 않은데 보기 드문 일"이라며 "어떤 사유가 있었는지는 봐야겠지만, 재판부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국선 변호인은 재판부에서 별다른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탄원서…6개월 동안 뭐했나"

8월 13일 월요일, 피고인은 예정대로 석방됐습니다. 이와 동시에, "가까스로 괜찮아졌던" 피해자의 일상은 다시 주저 앉았습니다. 그 사람과 어쩌다 마주칠지도 모른다, 지금 내 SNS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피해자는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에서 "당장 (피고인이) 월요일에 나오는 걸 목요일에 들은 제 심정을 아시냐. 억장이 무너진다"며 "구속기간이 다하는 6개월 동안 정말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건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어 "(피고인 석방 사실을) 미리 말씀만 해주셨어도 신변 보호 요청이든 뭐든 대비를 했을 텐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말 동안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며 "세상에게 버려진 기분"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피해자에게 법원은 "(보복 같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만 전달했다고 합니다. 피고인 측도 "피해자와 접촉을 시도한 적이 전혀 없다"고 취재진에 설명했습니다. 또 이번 석방은 피고인 측의 요청사항이 아니라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며, 지금 출소했다고 해서 피고인이 특별한 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안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위해 법원이 취한 조치는 아무 것도 없었고, 피해자는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 신변 보호를 신청했습니다. 그렇게 벌써 열흘이 넘는 시일이 흘렀지만, 재판부는 아직도 선고 기일을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정말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제 잘못도 아닌데 제가 밥을 먹는대로 토하고, 약없이는 잠도 못 자고, 남들과 같은 일상생활을 못하는 건 불공평하니까요. … 제발 피해자가 불안에 떨지 않게 해주세요." (피해자 탄원서 중)

"눈이 아닌 마음으로" 탄원서를 읽어주길 바란다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재판부가 얼마나 귀기울여 듣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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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판 받던 성폭행 사건 피고인, 보석 없이 풀려난 이유는?
    • 입력 2018-08-24 09:00:29
    • 수정2018-08-27 14:19:20
    취재K
◇ 본 기사는 사건 피고인 측의 요청에 따라 8월 27일자로 일부 내용이 수정, 보완돼 재게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한 여성이 성폭행 피해를 신고했습니다. 피의자는 구속됐고, 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인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1심 재판부는 죄를 인정하고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언젠가 신문에서 본 듯한 성폭력 사건의 일반적인 수사·재판 과정으로 느껴지실 겁니다. 그런데 6개월 뒤,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감옥에 있던 피고인이 보석 신청도 없이 풀려난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사건 배당 받고도 3개월 동안 방치한 재판부

올해 2월 초 1심 판결이 난 뒤, 피고인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그는 사건 당시 술에 취한 상태여서 기억이 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의 진실성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현역 군인이기 때문에 항소심 사건은 고등군사법원에 접수됐습니다. 3월 초의 일입니다. 하지만 사건 접수 3개월이 지나도록, 재판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신진희 변호사(대한법률구조공단)는 "형식 면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첫 공판기일이 이렇게 늦어진 건 이례적인 일"이라며 "적어도 5월 초순에는 항소심 첫 공판기일이 잡혀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결국 잡힌 항소심 첫 공판기일은 6월 15일. 사건 접수 뒤 거의 100일에 가까운 시일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날 피고인 측은 "피해자가 진술을 수차례 번복했다"면서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청했습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한달 뒤 피해자 측에 증인소환장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1심 재판부가 이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한 바 있고, 증인 신문 과정에서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7월 25일 재판에 나오지 않았고, 이에 재판부는 8월 9일 또 다시 재판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또 보름이 지났습니다.

결국 8월 9일 법정에 출석해 증인 신문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피해자. 변호사(피해자 국선 전담 변호사)에게서 전화로 날벼락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피고인이 나흘 뒤에 석방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김기춘 풀어준 '구속기간 만료' 조항 몰랐을 리 없어"

재판부가 변호사를 통해 통보한 피고인의 석방 이유는 '구속기간 만료'였습니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고인은 2심이 진행되는 동안 최대 6개월까지만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을 수 있는데, 정해진 기간이 지났으니 풀어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6일 풀려난 것도 이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복잡한 사건이 아닌 이상, 항소심 진행 과정에서 구속 상태인 피고인이 풀려나는 일은 드물다는 게 법조인들의 설명입니다. 1심에 비해 다툴 쟁점이 적어, 대부분 6개월 안에 판결이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번 사건은 1심조차 단 2개월 안에 마무리 됐습니다.

신진희 변호사는 "구속 사건일 경우 재판부는 구속기간 만료일 전에 선고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재판부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피해자는 물론 피고인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한본 변호사(법무법인 정도) 역시 "군사법원에는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지도 않은데 보기 드문 일"이라며 "어떤 사유가 있었는지는 봐야겠지만, 재판부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국선 변호인은 재판부에서 별다른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탄원서…6개월 동안 뭐했나"

8월 13일 월요일, 피고인은 예정대로 석방됐습니다. 이와 동시에, "가까스로 괜찮아졌던" 피해자의 일상은 다시 주저 앉았습니다. 그 사람과 어쩌다 마주칠지도 모른다, 지금 내 SNS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피해자는 재판부에 보낸 탄원서에서 "당장 (피고인이) 월요일에 나오는 걸 목요일에 들은 제 심정을 아시냐. 억장이 무너진다"며 "구속기간이 다하는 6개월 동안 정말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건가"라고 물었습니다. 이어 "(피고인 석방 사실을) 미리 말씀만 해주셨어도 신변 보호 요청이든 뭐든 대비를 했을 텐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말 동안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며 "세상에게 버려진 기분"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피해자에게 법원은 "(보복 같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만 전달했다고 합니다. 피고인 측도 "피해자와 접촉을 시도한 적이 전혀 없다"고 취재진에 설명했습니다. 또 이번 석방은 피고인 측의 요청사항이 아니라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며, 지금 출소했다고 해서 피고인이 특별한 이익을 보는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안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위해 법원이 취한 조치는 아무 것도 없었고, 피해자는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 신변 보호를 신청했습니다. 그렇게 벌써 열흘이 넘는 시일이 흘렀지만, 재판부는 아직도 선고 기일을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정말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제 잘못도 아닌데 제가 밥을 먹는대로 토하고, 약없이는 잠도 못 자고, 남들과 같은 일상생활을 못하는 건 불공평하니까요. … 제발 피해자가 불안에 떨지 않게 해주세요." (피해자 탄원서 중)

"눈이 아닌 마음으로" 탄원서를 읽어주길 바란다는 피해자의 이야기를, 재판부가 얼마나 귀기울여 듣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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